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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양 전 지회장은 광양 노조 사무실에서 고 양우권씨를 생각하다 울었다.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양 전 지회장은 광양 노조 사무실에서 고 양우권씨를 생각하다 울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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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11년 만에 김앤장·포스코와 싸워 이긴 30년 하청노동자의 눈물>에서 이어집니다.)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 넘게 지켜낸 양동운(62) 전 지회장은 동료인 고 양우권씨를 잃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울었다. 지난 2015년 회사의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고인이 사망한 뒤, 한때 수백명이던 노조 조합원은 40명까지 축소됐다. 당시 노조 지회장이던 양동운씨는 고인의 죽음에 항의하다 회사에서 해고됐고, 시위 도중 구속까지 됐다.

하지만 2016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2심에서 승리하며 포스코 하청 노조는 전환점을 맞는다. 양씨는 현재 800명까지 불어난 노조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대한민국 노동계가 지금껏 비정규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한 게 맞는지 자책감이 든다고 했다. "삼십년 인생을 노조에 바쳤는데, 결과적으로 하청, 비정규직, 계약직, 기간제, 인턴, 특고, 간접 고용 노동자는 늘어나기만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양씨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각각 조합원이 100만 명일 정도로 노조가 커졌는데, 사용자의 원·하청 분리 정책에는 뒷북만 쳐온 것 아닌가"라며 "노조가 내 임금 올리겠다는 데만 함몰돼 사회 전반을 보지 못하고, 후배들의 근로조건을 제한하는 데 너무 쉽게 동의해온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11년간 싸운 그의 눈물 "양우권 열사가 살아있었다면…"
  
- 1987년 입사다.

"스물 여덟에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그 전까진 고향인 순천 해룡면에서 부모님 따라 작게 농사를 지었다. 감나무도 하고 밤나무도 하고, 고추, 벼농사도 했다. 소도 대여섯 마리 키웠다. 그러다 면사무소에 붙은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 모집공고를 봤다. 그때 회사 안 들어가고 노조 안 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진짜 순진하게 살았을 텐데(웃음)."

- 노조를 처음 결성한 게 1989년이다.

"3월 22일이었다. 차별 좀 바꿔보자는 거였다. 하청 노동자는 작업복 색깔, 안전모 색깔까지 정규직과 달랐다. 밖에 딱 나오면 누가 하청이고 정규직인지 금방 구분됐다. 하청 작업복은 청색이었고 정규직은 갈색이었다. 하청 안전모는 노란색, 정규직은 흰색이었다. 정규직은 아주 자랑스럽게 갈색 옷 입고 출퇴근하고 지역 사회를 다녔다. 최근 와서야 하청과 정규직 옷 색깔이 같아졌다.

노조 하기는 참 힘들었다. 시작부터 험난했다. 우리는 몰랐는데 회사엔 이미 어용 노조가 있었다. 5명이 가입돼 있는. 그때는 복수노조가 금지돼 있을 때라 노조 설립 신고부터 막혔다. 노조 세우겠다고 모인 스무명이 같이 농성을 했다. 순천 천주교 신부님의 중재로 겨우 노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포스코는 수십년간 '무노조'를 내세웠고 민주노총이라고 하면 알러지 반응을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청 업체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온갖 협박과 회유로 노조 깨진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힘들게 민주노조 하나 세우면 바로 관리자들이 나서서 2노조를 만들고 숫자 늘린다. 다수 노조가 되면 민주노조 조합원 하나하나 회유하고 협박해 무력화시킨다. 지금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 중에 교섭권 가진 곳은 광양에 한 곳뿐이다. 민주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광양제철소에 총 5곳, 포항제철소에 총 7곳이다. 이만큼 지키기도 정말 어려웠다. 이번 판결로 많이 늘어날 거다."

- 노조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2015년 5월 10일이다. 양우권 열사를 지켜주지 못했던 날... 양우권 열사는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인 이지테크에서 일하다 2011년에 해고됐다. 노조 한다는 이유였다. 2012년 부당해고 판결이 나왔고, 양우권 열사는 2014년에 어렵게 복직했다. 하지만 회사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하루종일 빈 책상에만 앉혀놓고 머리 위에 CCTV를 달아 감시했다. 사측의 탄압으로 50명 넘던 이지테크 조합원은 양우권 열사 홀로 남았다.

양우권 열사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2015년 5월 9일, 이지그룹이 충남 금산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양우권 열사를 비롯해 8명이 봉고차 타고 금산으로 가서 집회를 했다. 근데 어린 자녀들이 너무 많이 왔더라. 낮 12시까지 집회를 이어갔는데 아무래도 이지그룹 회장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씨는 참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권이한테 이 정도 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우권이도 동의했다. 광양으로 돌아오는데 중간에 우권이가 내려달라고 했다. 인근 야산 공원이었다. 걸어가려나 보다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권이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힘들다고. 퍼뜩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인에게 연락해 얼른 우권이 어디있나 찾아보라고 했더니 밤새 집에 안 들어왔다고 하더라. 우권이는 전날 내렸던 그 야산에 있었다. 우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빨간 머리띠에 목을 맨 거였다. 제철소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내가 지회장으로서 우권이를 좀 더 따뜻하게 감싸줬다면 그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늘 죄책감이 들고... 30년 노조 하면서 가장 큰 상처다."

- 고 양우권씨는 유서에서 조합원들에게 "제가 바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양동운 지회장을 위시하여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워서 정규직화 소송, 해고자문제 꼭 승리하십시오. 멀리서 하늘에서 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화장하여 제철소 1문 앞에 뿌려 주십시오. 새들의 먹이가 되어서라도 내가 일했던 곳,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 날아서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 보렵니다"라고 썼다.

"그나마 이번 판결로 우권이의 유언을 이룬 것 같아 너무 기쁘다. 우권이의 간절한 바람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도 없지 않았을까. 우리들은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는데... 우권이는 끝까지 우리들이 받는 차별, 설움을 생각했다. 떠나는 순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자기 대신 극복하고, 혜택 받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게 너무...

고맙다. 미안하다. 경남 남해에 있는 우권이 묘소에는 기일인 5월 10일마다 간다. 이번 판결 나고 나서 한번 다녀왔다. 우권이가 살아서 이 모습을 봤다면 진짜 좋았을 걸..."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이지테크분회장이던 고 양우권 열사가 2015년 5월 10일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서.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이지테크분회장이던 고 양우권 열사가 2015년 5월 10일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서.
ⓒ 포스코사내하청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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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고 양우권씨 사망 직후 회사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다 구속까지 됐다.

"동지가 죽었는데 출근할 수는 없었다. 그때 전 조합원이 60명 정도 됐다. 지회장으로서 일하지 말고 다 나가자고 했다. 당시 조합원들은 양우권 열사와 소속 회사도 다 달랐지만, 단 한 명도 출근하지 않고 따라줬다. 그렇게 상복 입고 이지그룹 본사 앞에서 40여일 노숙 투쟁을 했다. 전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각오한 싸움이었다. 여론이 안 좋았지만 회사 쪽에선 계속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내가 대표로 해고를 수용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모두 복귀했다.

구속된 건 금속노조와 연대 집회를 했을 때였다. 경찰들과 밀고 당기다 회사 문이 열렸고 그 길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다 곧바로 연행됐다. 특수건조물침입이었다. 서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살았다. 해고도 구속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 이후 다시 포스코에서 일하지 못했다. 그때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지회장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곳 내가 안 고치면 누가 고치겠나"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전 지회장. 양씨는 30년 동안 세번 해고됐고, 한번 구속됐다. 그리고 한명의 동지를 잃었다.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전 지회장. 양씨는 30년 동안 세번 해고됐고, 한번 구속됐다. 그리고 한명의 동지를 잃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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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최종 해고되기 전에도 두 번 해고를 겪었다. 생활은 어떻게 했나.

"가족들에게 빚을 많이 졌다(웃음). 1998년, 2001년에 해고됐었다. 노조하고 파업한다고. 부당한 해고였고, 법적 절차를 거쳐 복직하는 데 1년씩 걸렸다. 해고되면 첫 번째로 임금이 없어지지 않나. 아내와 세 딸들이 많이 고생 많이 했다. 아이들 학원도 제대로 못 보냈고... 아내가 순천에서 과일 농사, 벼농사를 좀 지어서 그걸로 먹고 살았다.

그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아내가 10여 년 전부터 시내에서 식당을 차렸다. 횟집 했다가 장어집도 했다가… 지금은 식당 접고 독거노인 돌봄 센터 일을 나간다. 내가 또 노조 지회장 맡았다고 하면 미쳤다고 했었지만, 돈 못 벌어온다고 구박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노조 일을 마음 놓고 볼 수 있었다. 아내에게 고맙다.

둘째 딸은 2015년에 내가 구속된 걸 본 이후로 결심을 하더니 지금은 노무사가 됐다. 최근에 서울에서 사무실을 개업했다. 처음엔 금융업 쪽에 취업한다고 했었는데 나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것 같더라. 특히 해고 사건 상담이 오면 혼신의 힘을 다해달라고 부탁한다. 노조 일 다 끝나면 제가 가족들에게 잘해줘야 한다(웃음)."

- 최근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저도 현장에 두 번 다녀왔다. 차별 받는 비정규직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다시 한 번 느꼈다. 하청 노동자는 먹고 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게 대한민국 현실이다. 너무 답답하다. 어디든 똑같은 것 같아서(제조업 중 조선업과 제철업은 사내하청 비율이 가장 높은 업종이다. 2021년 고용노동부 고용형태 공시 결과를 보면, 제조업 전체의 사내하청 노동자 비율은 19.5%(29만 4000명)인데, 이중 조선업이 사내하청 비율 61.2%(5만 6000명)로 가장 높았고, 철강금속업의 사내하청 비율이 38.7%(3만 7000명)로 두 번째였다).

그들이 노조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에 선했다. 하청 노조 조직하기가 정규직보다 훨씬 어렵다. 하청 노동자들은 고용이 불안하다. 그러니 '평생 직장' 개념이 적을 수밖에 없다. '에잇, 더러우니 딴 데 가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앞에 총대 메고 싸울 필요가 있냐는 거다.

저는 우리 하청 노동자들도 이 생각은 좀 바꿨으면 좋겠다. 내가 일하는 곳 내가 안 고치면 누가 고치겠나. 포기하고 다른 데 옮겨간다고 해도 다를까. 똑같다. 대우조선이고 포스코고 대한민국 하청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야 다 유사하다. 제철소나 조선소나 위험하고 힘들고 덥고 추운 일은 하청 노동자들이 한다.

요즘도 젊은 친구들이 대놓고 이런 얘길 한다. '다음에 어디 시험보고 좋은 데 공고 나면 거기로 가면 되지, 굳이 나서서 회사에 찍히기 싫다.' 저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아니다. 너가 포기하면 다른 사람들도 포기하고, 이 비참한 하청은 영원히 존재할 거다.' 자신이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이 언제든 떠날 마음을 품고 일하는 건 회사 입장에서도 전혀 좋지 않다고 본다. 신참 데려다 한참 가르쳐놨더니 더럽다고 다른 곳 가버리면 회사로서도 얼마나 낭비인가. 회사가 노동자를 귀하게 여기고 올바르게 대접하면 노동자는 떠나지 않는다. 하청 노동자도 애사심을 가지도록 유도해야 회사도 중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 근본적으로 대기업들이 원·하청을 나누는 이유가 뭘까.

"가장 큰 목적이 노동 통제라고 본다. 하청을 차별함으로써 막대한 노무비를 줄이고, 동시에 정규직들의 불만을 무마한다.

지금 대한민국 정규직들은 다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들 옆에 하청이 없다면? 만족하지 못할 거다. 나는 그걸 100% 확신한다. 포스코 정규직만 봐도 그렇다. 자기들은 여름에 더우면 나갈 일 없고, 겨울에 추우면 나갈 일 없다. 그런데도 하청 노동자 임금의 배를 넘게 받고 하청엔 없는 복지·휴가 혜택까지 누린다.

그렇게 정규직들은 하청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당연한 '정규직'이 마치 벼슬처럼 됐다. 그 울타리 속에 들어간 이들은 '노동자'라는 개념을 상실해간다. '저 밑에 하청 놈들도 사는데, 너는 훨씬 낫잖아? 지역 사회에서도 다르게 대우받잖아?' 하는 회사의 전략이 통한 거다."
 
양동운(62) 전 지회장은 30년간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지켰다. 포스코를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내 11년만에 최종 승소 판결도 이끌었다. 하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우리가 30년간 뭘 한 건가 싶다"고 했다.
 양동운(62) 전 지회장은 30년간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지켰다. 포스코를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내 11년만에 최종 승소 판결도 이끌었다. 하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우리가 30년간 뭘 한 건가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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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대우조선 파업 과정에서도 원·하청간 노노 갈등이 불거졌다.

"요즘 제가 조합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30년 노조 했는데, 이룬 게 하나도 없는 세상인 것 같다'고. 발버둥은 쳤는데, 뒤돌아보니 개선한 것보다 오히려 나빠진 게 더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노조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누구나 취업해서 엇비슷하게는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계약직, 비정규직 이런 말 없었다.

근데 지금은 어떤가. 하청, 기간제, 인턴까지 너무 당연해졌다. 예전엔 수습 3개월이면 정규직 됐다. 요즘은 그런 기업 찾아보기 힘들다. 계약직으로 쓰다가, 기간 연장까지 하고 실컷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 또 정규직 전환 여부를 회사가 판단한다. 진짜 후퇴도 이런 후퇴가 없다.

결과가 이렇다면 우리 노동조합들도 그동안 사회를 올바로 보지 못한 것 아닌가 살펴볼 때가 아닐까. 그동안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인정도 받았고, 조합원도 100만 명을 넘겼다. 한국노총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노조가 이렇게 커졌는데, 대한민국 노조는 그동안 경총이나 사용자들의 전략에 뒷북만 울려온 것 아닌가 싶다. 사용자의 원·하청 분리 정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거다.

노조가 사회 전반을 돌아보지 못하고, 내 임금 올리겠다는 데만 함몰됐던 건 아닐까. 지금 있는 조합원만 챙기느라 후배들의 근로 조건을 제한하는 데에 너무 쉽게 동의했던 게 아닐까. 원청, 하청 노동자들도 어느새 그런 대기업들의 함정에 빠져 같이 빨려 들어갔던 건 아닐까. 평생 노조 열심히는 했는데, 정말 잘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서글프다."

[관련 기사]
"박지만, 하늘에서 두 눈 부릅뜨고 보겠다" http://omn.kr/dkc0
"박지만, 인간다운 경영인 되라"... 노조 분회장 자살 http://omn.kr/dj7m

태그:#포스코, #양동운, #하청, #양우권,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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