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30 05:14최종 업데이트 22.08.3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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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한국에서는 국민스포츠지만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꽤 생소한 종목이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 미국과 그 미국의 강한 문화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그 주변 지역들을 제외하면 일본과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성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역시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영향으로 야구가 시작됐다.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조선 청년들을 모아 황성 YMCA 야구단을 조직한 1904년이 한국 야구 역사의 출발점이며,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에 세워진 근대식 학교들에서 운영된 야구부들을 통해 기술이 발전되고 대중의 관심도 확장되어왔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지원에 힘입어 다양한 야구대회들이 열리면서 야구인들이 체육행정의 중심적인 위치로 진입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야구를 일본 식민통치나 미군정 통치의 결과라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야구는 일본이나 미국이 가르쳐준 것이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어깨너머로' 배워오면서 성장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본 야구와 한국 야구

제국 시기의 일본은 미국과 그 주변 국가들을 제외하면 성공적으로 야구 문화가 이식된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 1870년대에 미국인들에 의해 전해진 야구가 1890년대부터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다이이찌 고교 학생들의 활약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메이저리그 선발팀 방문경기에서 17세 소년 사와무라 에이지가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포진된 전설적인 타선을 상대로 9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사건을 계기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 2년 뒤인 1936년에는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1940년대 초에는 고교 야구부의 수가 1000개를 넘어섰다.

 

베이브루스와 이영민 일본에서 야구가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1934년 메이저리그 선발팀 방일경기에 나선 일본야구대표팀에는 이미 조선의 홈런왕 이영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기 후 베이브루스와 기념촬영한 이영민. ⓒ 대한체육회

1910년대 이후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인 학생들의 수도 늘어났고 그들이 다니는 학교들에서는 대부분 야구부가 만들어져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일본인 학교와 구별되어 있었고, 총독부나 일본 야구계는 조선인 학교들까지 야구부를 창설하도록 장려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1904년에 질레트 선교사에 의해 창설되어 10여 년간 왕성하게 활동한 최초의 한국인 야구팀인 황성 YMCA 야구단이 있었고 그들에게 도전하는 과정에서 야구부를 만들고 발전시킨 휘문, 경신, 배재, 중앙, 보성 등의 학교들이 있었다.

그래서 1920년에는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제1회 대회로 인정되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로는 일본인 학교들을 모방해서 야구부를 만드는 학교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나 일본의 야구계에서 조선인 학교에 일본인 지도자를 보내거나 교류 활동을 기획해 조선인을 상대로 야구 교육을 지원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1930년대 이후 일본의 프로야구팀이나 도쿄대, 게이오대, 릿쿄대 등 일본에서 프로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도쿄 6대학 리그' 소속의 유명 대학팀들이 서울에서 방문경기를 치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부분은 일본인 단체의 초청으로 성사된 철도국이나 경성의전 등 일본인들로 구성된 팀들과의 친선경기일 뿐이었으며, 초청된 관중들도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에 국한되었다.

그래서 한발 앞선 일본의 야구 기술을 조선의 청년들에게 전한 것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조선인들이었다. 1890년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배재학당과 YMCA 교육관 같은 곳에서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의 세례를 받은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교육을 받은 근대교육 1세대 청년들이 방학을 이용해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에서 배운 야구 기술을 전수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야구경기 사진 속 다카하시 토오루 1910년 초 동대문의 훈련원 터에서 열린 황성YMCA와 관립한성학교의 경기 장면으로 알려진 사진. 포수 뒤의 주심은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로서 대한체육회와 한국야구위원회의 자료에는 한성학교의 체육교사로 설명되어 있지만, 사실은 체육과는 거리가 먼 문학자로서 훗날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겨 조선문학사와 조선사상사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는 인물이다. 도쿄대학에 다니던 시절 야구를 접한 것으로 보이며 1903년 한성학교에 부임한 뒤 어느 시점부턴가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질레트와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처음 야구를 가르친 인물로 꼽을 수 있다. ⓒ 대한체육회


동경 유학생들, 조선에 야구기술을 전파하다

1909년 와세다대생 윤기현을 중심으로 모인 25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처음 '동경 유학생팀'을 구성해 고향을 찾아 당대 조선 최강을 자부하던 황성 YMCA팀과 모국 방문경기를 벌여 무려 19대 9의 대승을 거두며 한발 앞선 일본야구의 위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했다.

그들의 방문경기는 여러모로 초창기 한국 야구계에 큰 충격을 던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번트'와 '더블플레이'였다. 타자 자신은 아웃당할 각오로 코앞에 타구를 떨굼으로써 주자들을 진루시키는 전술은 투수가 공을 던지면 힘껏 후려치는 것만 생각했던 당시 조선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또한 상대 타구를 잡으면 아웃카운트 한 개를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타구 하나를 가지고 동시에 두 명, 혹은 세 명의 주자를 잡아낸다는 생각 자체도 기술 이전에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야구팀은 한 가지 유니폼을 맞춰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게 된 것도 그들이 끼친 중요한 영향으로 꼽힌다. 깔끔한 유니폼을 맞춰 입은 동경 유학생팀과 마주 서서 보니 제각각 저고리와 잠방이 따위를 되는대로 걸치고 나온 황성 YMCA 선수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불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첫 번째 방문 경기의 성과에 대해 두루 호평이 쏟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연례행사로 자리를 잡게 됐다. 동경 유학생 모국 방문 경기는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 속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이어졌고, 1937년까지 모두 10차례나 이루어지면서 숱한 화제와 성과들을 남겼다.

그 10차례의 방문 경기를 통해 그들은 YMCA 야구단 외에 오성학교나 배재고보 같은 조선인 팀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지도 경기'를 하기도 했지만, 1928년 제8차 모국 방문 때는 일본인 팀들의 전용구장 격이던 용산 만철구장으로 원정해 철도구락부와 맞대결을 벌여 역전승 하며 늘 기죽어 있던 조선인 팀들의 대리 복수를 해준 적도 있었다.

고시엔의 조선 소년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더 많은 학교에서 야구부가 만들어졌다. 전조선야구대회가 꾸준히 개최된 것도 이유가 됐지만, 일본에 전국야구대회 체제가 확립되면서 조선 지역의 학교에 출전권이 주어지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일본은 1915년에 아사히(朝日) 신문사 주최로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를 창설했다. 토너먼트를 통해 지역별 예선과 본선을 치르며 전국 최고의 중등학교(오늘날의 고등학교) 야구팀을 가리는 대회다.

특히 1924년부터는 새로 지어진 고시엔(甲子圓) 야구장에서 본선을 치르게 되면서 '고시엔 대회'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됐다. 고시엔은 공교롭게도 10간(干)과 12지(支)의 첫 글자가 모인 갑자(甲子)년인 1924년에 완공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무엇보다 1932년에 '야구통제령'이 내려지면서 여름에 치러지는 '우승야구대회'와 봄에 치러지는 '선발야구대회'를 제외한 모든 전국야구대회가 폐지된 이후로는 지금까지 일본의 '유이한' 전국고교야구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두 대회 모두 고시엔 구장에서 본선을 치르게 되면서 각각 '여름 고시엔'과 '봄 고시엔'으로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더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전국 모든 학교에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 여름 고시엔이다. 오늘날 '여름 고시엔' 대회는 해마다 3000개 이상의 팀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종목 아마추어 스포츠 대회이기도 하다.

그 대회가 2회째를 맞던 1916년에 중앙 YMCA 야구단이 조선 대표로 출전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한반도의 야구는 과도기에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하지만 식민지로 이주하는 일본인과 그 자녀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상황이 바뀌어 7회 대회가 열린 1921년부터는 조선 지역과 만주 지역의 학교들도 자체 예선을 통해 출전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호가 개방된 뒤에도 조선 지역 대표로 본선에 출전하는 것은 대부분 일본인 학교들이었다. 1921년 제7회 대회부터 태평양 전쟁으로 대회가 중단되기 전인 1940년 제26회 대회까지 조선의 학교들에 출전 자격이 주어진 20번의 대회에서 경성중학이 7번 대표로 선발된 것을 비롯해 부산중학, 평양중학, 인천상업중학, 부산상업중학 등 일본인 학생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들이 대부분의 본선 출전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1923년 7월 27일, 경성중학 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지역 예선 결승전에서 한국인 학생들로만 구성된 휘문고보 야구부가 한 해 전 조선 대표로 선발됐던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을 10대 1로 크게 이기고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야구부를 만든 학교인 휘문고보는 동경제국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6대학 리그'에서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동경 유학생팀'의 4,5,6차 모국방문 경기를 주도했던 박석윤을 감독으로 영입해 일본의 학교들과 대등한 수준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야구지도자였던 그의 지도 아래 투수이자 4번 타자였던 김종세와 포수로서 3번 타자로 활약한 김정식이 공수의 핵을 이루어 강한 전력을 만든 휘문은 본선에서도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2회전에서 만난, 역시 선수 전원은 일본인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만주 대표 대련상업을 9대 4로 누르며 8강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4강 진출권을 놓고 만난 리츠메이칸 중학과의 3회전에서도 8회까지 4대 4로 팽팽히 맞섰지만 결국 9회 초에 3점을 빼앗기며 7대 5로 탈락했다. 휘문고보가 출전했던 당시에는 아직 오사카 고시엔 야구장이 지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고시엔 대회'라는 약칭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 외에 한국인 학생으로만 구성된 팀이 본선에 진출한 적은 없었지만 대구상업(1930)이나 평양중학(1932), 신의주상업(1935), 인천상업(1936), 평양1중학(1940) 등 일본인 학생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학교들이 조선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그 안에 속해있던 한두 명의 한국인 학생이 함께 고시엔 구장을 밟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중 1936년 인천상업 선수로서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았던 김선웅은 해방 후 인천고 야구부를 재건하고 지도해 1950년대 인천고의 무적 시대를 이끌며 김진영과 서동준을 비롯한 한국야구계의 중심적인 인물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생각보다 멀었던 한국과 일본의 야구
 

제 2차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 1957년부터 시작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모국 방문 경기는 일본에서 야구를 전문적으로 수련한 선수들의 조직적인 야구기술 전수 이벤트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한국 야구는 그 행사를 통해 장훈과 김기태, 김박성(가네모토 도모아키) 등 일본 프로야구의 정상급 스타 플레이어가 될 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김성근, 배수찬 등 중요한 지도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 국가기록원

 
36년간의 식민통치 기간 일본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야구 역시 그 일부였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야구에 대해 일본은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자생적으로 싹을 틔우다시피 한 한국 야구는 일본에 유학하거나 일본인 학교에 끼어들어 야구를 접한 몇몇 학생들을 통해 어깨 너머로 기술과 자극을 공급받으며 나름대로 성장해왔다.

일본의 야구가 본격적인 방식으로 한국 야구에 영향을 미친 것은 1960년대 좀 더 전문적으로 야구를 수련한 재일교포 학생과 사회인 선수들이 귀국하면서부터였고, 그런 영향이 더욱 확대된 것은 1980년대 일본의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때 한국의 야구계가 새삼 느낀 충격들은, 역설적으로 해방 이전에 일본과 한국의 야구 사이에는 생각보다 더 먼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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