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1 18:42최종 업데이트 22.09.2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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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때 교양 필수로 민주주의와 법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 법학 전공 수업이 아니었으니 법학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보다는 법과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학습과 토론을 나누는 수업이었다. 그때 처음 들은 말이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

간단히 얘기하자면 법의 지배는 법 그 자체가 원칙이 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른바 법치(法治).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을 통해 사회를 지배하는 인치(人治)의 사회를 의미한다. 대부분 사회에서 법치는 보편적인 선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회는 스스로 법치사회를 표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치는 이성의 지배, 인치는 감정의 지배라고 했다.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선'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아주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했다.

법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사유마저도

딜레마. 세계는 언제나 딜레마로 구성된다. 이것도 저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딜레마를 갈등이나 모순, 한계 같은 말로 바꿔도 상관없겠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으며 사유를 확장하고 가능성을 상상하고 세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인류와 사회는 발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법에는 딜레마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법이란 '이미' 일관성이 있고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법이 그래요, 법이."


법은 이성과 합리의 산물이다. 그보다는 이성과 합리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다. 법과 제도는 현재 수준의 인류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이성적 판단이기 때문에 '법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두지 않는다. 물론 법은 언제든 개정되고 고쳐질 수 있지만 그 역시 법과 제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그것이 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법적 안정성이다).

법치의 사회는 안정되고 평온하지만 법이라는 완전무결한 도구는 딜레마를 통한 사유의 확장과 갈등을 통한 세계의 발전, 한계를 극복하는 인류 보편의 지혜엔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는다. 법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흡수하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그러나 그 흡수와 포용은 그저 법이 그렇다고 여기는 '규정'일 뿐 실제의 세계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다. 법 안에 들지 못하는 세계는 외면되거나 배제된다. 가끔 삭제되기도 하고.

그래서 법은 매우 편리하다. 법을 지키는 것과 옳은 일, 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나쁜 일을 단순하게 등치시키는 것은 딜레마를 고민하는 골치아픈 과정을 없애주고 사건과 세계의 맥락을 이해하는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단축해준다. 본래 상상력이 많으면 인생 고달픈 법이니까. "네 사정은 이해하지만, 법이 그래요, 법이."

규정된 이성과 합리에 갇혀 살아가는 일이란 편리하게도 사유를 거세하는 '반지성'의 근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꽤나 똑똑한 민주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알리바이기도 하다. 안정된 체제란 더 나은 다른 세계로의 상상력을 박탈시키는 일, 체제의 안정을 가져오는 법이란 상상하지 않는 기계를 양산하는 일이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있는 법원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연합뉴스

 
오늘날 법에 모든 사고를 의탁하고 옳고 그름마저 법의 판단에 맡기는 태도는 비단 체제의 옹호자들에게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실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사람들, 이른바 운동권들 혹은 진보 시민이나 깨어있다고 믿는 시민들도 이른바 리걸 마인드(Legal Mind)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운동의 현장은 이제 일터보다는 법원에 가깝다. 소송하고 항고하고 변호사들과 재판 전략을 만들고 언론을 통해 법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 조합원을 조직하고 학습하고 더 나은 일터와 삶을 토론하고 그를 위해 투쟁하는 일보다 우선된다.

정치도 마찬가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우리들을 더욱 행복하게 하는지 질문하거나 당신의 무엇이 부도덕했는지를 비판하기보다는 그저 법을 어겼는지 여부로 정치적 '승패'를 나눈다.

자식의 시험을 대리해주는 부모가 공직에 나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보다는 그것이 법을 어겼는지 여부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거리에 나선 장애인이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보다는 그들이 도로교통법을 어겼는지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되는 세상이 됐다.

편리한 도구인 법에 지나치게 의탁해 운동도 정치도 실종됐다. 그보다는 운동을 하는 사람, 정치를 하는 사람, 나아가 세계를 구성하고 만들어가는 모든 '주체'가 실종됐다. 법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인간을 한없이 게으르게 만들었다.

자초한 세계

'검찰 정권'이라 불리는 윤석열 정부는 어떤 면에서 작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가장 잘 대변하는 정치집단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시대의 명언은 사람과 사람이라는 맥락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를 가장 그럴싸하게 치장한 말일지도 모른다.

무슨 질문을 해도 "법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같은 법무부 장관에게 분통을 터뜨리기도 무안하다. 그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많은 사람들은 자녀의 학력 위조를 위해 문화적, 사회적 자본을 '남용'한 어느 공직자를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고 변명하기 바빴다. 우리 편에게만 유리한 선택적 몰이해일까. 그보다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에 대한 맹신이 만든 모순에 가깝다. 우리 사회의 태도가 그렇다. 옳고 그름을 오직 법으로만 판단하려는 게으른 사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국민의힘 이용호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곤란한 처지를 토로하면서 조언이나 위로를 구하는 글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댓글에는 '누칼협'이 나타난다. "누가 목에 칼 대고 협박했냐?"라는 빈정거림이다.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어떤 딜레마에 빠져 있는지, 어떤 갈등이 교차하고 있는지에 대한 맥락을 뺀 채 모든 것이 '그저 너의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말.

누가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한 것이 아니면 '원칙적으론' 너의 선택이니 감내하라는 말. 제도와 원칙, 법이라는 납작한 기준으로 수없이 많은 사고와 사람과 역사를 단순화하는 태도가 만들어낸 세계의 파생이다.

법은 최소한이다

그러니 법을 다 어기고 살면 괜찮을까. 그건 '아노미'다. 앞서도 말했지만 법은 인류가 함께 쌓아 올린 현 수준의 인류가 낼 수 있는 이성과 합리의 총아에 가깝다. 법을 잘 지키는 일이란 적어도 반사회적 인간이 되지 않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법의 한계를 언제나 절실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지점이다.

현대 법철학의 근간을 세운 라드브루흐는 법의 이념과 목적으로 정의,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을 제시했다. 그는 상충하는 가치이기도 한  이 세 가지 중에서도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라드브루흐의 말처럼 법의 존재는 안정을 추구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법이란 안정적 사회를 위해 정의를 다소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사회의 안정을 법에 맡긴다면, 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법에 의존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보편적인 선'에 더 가까운 말은 '법치주의'보다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법의 지배와 법에 의한 지배라는 말을 배우기도 한참 전인 중학교 윤리 시간, "법은 도덕과 윤리의 최소한"이라는 말을 먼저 배웠다(벤 다이어그램을 그려놓고 그 안에 가장 작은 부분집합 동그라미에 '법'이라고 쓰던 필기노트가 아직도 집에 있다). 법에 의존하는 태도, 법이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잣대라고 여기는 게으름이 만들어낸 사회를 상상해보라. 상상이 잘 되지 않거든, 용산 어드메에 자리 잡으신 분들을 보면 좋은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아우 끔찍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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