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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나 싶었던 날이 왔다. 지난 5월 19일,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간혹 피아노나 태권도를 가긴 했지만 그 외 교과목 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대신 3년간 매달 30만 원씩 부어온 적금이 원금 1080만 원이 되어 만기된 날이다.

아이를 키우는 내내 살림살이는 빠듯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학원비는 가계부에서 우선 순위가 낮은 항목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국어, 영어, 수학의 기본 뼈대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수학은 부모가 수포자였기 때문에 아이가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하면 보내줄 생각이었다.

국어는 책을 매일 30분씩 읽고 엄마에게 읽은 책을 요약해서 말해보게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매달 적금에 넣은 30만 원이라는 돈은 영어 학원비가 될 돈을 모은 것이다. 인간이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말려도 어떻게든 하고야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버는 빠듯한 돈을, 아이를 매일 매달 학원에 보내는 데 쓰는 대신 온가족이 함께 미국 여행을 가는데 쓰고 싶었다.

3년간 매달 학원에 가서 배우는 양이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미국에 가서 직접 현지인들과 얘기도 해보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여주면 아이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한 번 보고 싶었다.

내가 기대한 것은 잠들어 있는 누군가에게 요정이 다가가 마법의 입김을 훅 불어넣는 장면이었다. 미국에서 보고 들은 것이 그렇게 아이의 마음 속에 어떤 열망으로 심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매달 적금을 부었다.

대신 초등학교 교과목에 영어가 들어오는 학년부터 매일 집에서 영어 문장의 패턴을 두 페이지씩 읽고 기본 문형에 주어, 목적어, 동사를 바꿔서 다르게 표현해보는 연습을 시켰다. 길어도 30분이 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매일 했다.

아이들에게도 엄마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너희가 매일 학원 가서 공부하게 하는 데 쓰지 않는 대신 우리 가족이 미국 여행을 가는데 쓰자고 얘기해주곤 했다. 그러니 학원에 가지 않고도 공부를 하는 것이 너희가 해야 할 몫이라고. 손오공이 원기옥을 모으듯 그렇게 돈과 영어가 조금씩 쌓였고 마침내 그것을 쓸 시점이 온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필수 코스
 자유의 여신상은 필수 코스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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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적금이 만기되었으니 원래는 여름방학에 가려고 했다. 목적지는 고모님이 계시는 뉴욕. 미국에 오면 언제든 숙박을 책임져 주신다고 오래 전부터 말씀하셨던 고모님 댁에서 묵을 요량으로 잡은 계획이었다. 항공권을 알아보니 1인당 300만 원이었다. 비행기표값만으로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을 써야했다. 방학에는 안 되겠구나. 포기.

그렇다면 다음은 중3인 첫째의 기말 시험이 끝나는 날 아니면 겨울방학 기간이 남은 선택지였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은 아무리 사교육을 안 시키고 날로 키우는 나지만 고등학교 학업을 위해 놓쳐서는 안 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뉴욕 사시는 고모님도 뉴욕은 겨울에 해도 빨리지고 추워서 여행하기에 별로 좋지 않다고 하셔서 첫째의 시험이 끝나는 10월 말로 정했다.

여행 기간은 2주. 아이들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체험학습으로 인정해주는 최대일수가 10일이었다. 금요일에 시험을 마치면 토요일 오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2주일 후 토요일 오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면 일요일 늦은 오후에 도착하는 여정이 확정되었다.
 
JFK 공항에 착륙하기 전
 JFK 공항에 착륙하기 전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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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권을 사고나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2주 동안 뉴욕에만 있기는 너무 기니 다른 곳으로 여행도 갈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일단 자세한 교통편이나 비용 등등은 생각하지 말고 브레인스토밍처럼 생각나는 것들을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드라마 도깨비로 유명했던 퀘벡, MIT, 하버드대가 있는 대학도시인 보스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가 나왔다.

놀랐던 건 노는 게 제일 좋고, 해야할 일은 하루가 끝나기 직전에 잔소리를 해야 할까 말까 하는 둘째가 MIT 공대 캠퍼스를 가보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알고보니 유튜브에서 명문대의 괴짜들에 대한 영상을 보고 그 영상에 나온 공간에 가보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그래도 아이가 가고싶어 하는 곳이니 얼른 보스턴 여행을 확정했다.

또 한 번의 미니 여행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로 했다. 백악관이 있고 스파이더맨에 나온 홀쭉하고 길게 생긴 워싱턴 기념탑이 있으며 스미소니언 우주항공 박물관을 비롯한 수많은 박물관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였다.

2주간의 여행 기간 동안 두 아이들은 각자의 능력만큼 알아듣고 말도 해 본 후 각자의 영어 실력만큼 느꼈다. 첫째는 한국에서 배운 영어가 본토에서 통한다고 신기해했고 현지인들의 빠른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다.

어느 정도 영어로 말하고 알아 듣는 첫째에게 미술관에 가면 작품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답을 알아오라는 첫 미션을 주었다. 그 후로는 화장실 찾기, 길 묻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가 현지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의 미숙한 영어에 가장 큰 인내심을 발휘할 곳은 물건을 사려고 할 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패스트푸트점에 가면 골라야하는 게 많은 첫 주문은 엄마아빠가 하더라도 추가로 먹고 싶은 것 한두 가지는 스스로 사보게 했다.

중학교 1학년인 둘째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많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체험학습 보고서에 썼다. '앞으로는 영어를 좀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론인 건가?' 하고 물으니 '그렇겠죠?'라고 답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영어가 앞에 있으면 그림인 듯 읽을 생각을 하지 않던 둘째가 영어 단어를 정보를 담은 글자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곧 고등학교에 진학할 첫째는 이번 미국여행에서 처음 만났지만 2주 동안 같이 지내며 친해진 친척 언니에게 고등학교에서 진 빼지 마라, 대학에서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 대학은 성적은 당연하고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는 학생을 뽑는다, 같은 조언을 듣고 한국 대학 입시를 넘어서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 지금도 자기네들끼리 만든 단톡방에서 영어로 톡을 주고받으면서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작문해보는 경험이 잦아졌다.

매일 늦잠을 자던 둘째는 시차부적응의 결과로 초저녁에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학교도 일찍 간다. 지각을 하거나 엄마의 호통에 밀려 학교에 가다가 여유롭게 학교를 가니 좋았던지 일찍 일어나서 즐기는 고즈넉한 시간이 좋았던지 수능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다며 하던 게임을 일찍 접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기 싫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던 할 일도 학교 갔다 와서 친구와 놀다가 들어왔을 때 "할 일을 해야지?" 하고 옆구리를 툭 건드려주면 비교적 빠르게 수긍을 한다.

2주간의 여행이 아이들에게 불어넣어준 마법의 입김이 어떤 결과로 피어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뭔가가 심어진 것은 분명한 듯하다. 안 쓰길 잘 한 돈은 사교육비였고 쓰길 잘 한 돈은 그렇게 모아 떠난 가족여행 경비였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여행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뉴욕여행, #사교육비모아, #영어학원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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