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9 18:11최종 업데이트 22.11.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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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어느 날,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유학할 때였는데 잠이 안 왔어요. 이튿날도, 그다음 날도. 밤 늦은 아르바이트 때문이려니 했는데 그런 날이 계속되었어요. 눈은 퉁퉁 붓고 몸은 무거운데 누우면 정신이 또렸해졌어요. 한두 시간 겨우 눈을 붙인 날은 머리가 깨질 듯하고 눈이 따가웠어요. 2주 정도 흐른 어느 날 쓰러지듯 잠에 빠졌죠."

김은희는 일본에서의 그 날 이후 10여 년이 넘게 불면증과 씨름하는 중이다. 그의 아빠 김병곤은 대학 4학년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가보안법·반공법·내란선동 등으로 기소되었다. 비상군법회의 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그는 "민중을 위해 이 목숨을 바칠 수 있어 영광입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했다.

그는 여섯 번이나 옥고를 치렀고 만 37살 나이에 위암으로 숨을 거뒀다. 그런 남편을 정성껏 돌봤던 박문숙도 2014년 유방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사료관장으로 '4월혁명 사료총집'을 발간하는 일에 매달렸다. 김은희의 아빠 김병곤, 엄마 박문숙도 고단한 삶을 살아내느라 뜬 눈으로 밝힌 밤이 많았을 게다. 
 

김은희의 방학동 사무실에서 그는 불면의 밤을 보내는 가족사를 말했다. ⓒ 민병래


엄마의 구두소리를 듣고서 잠이 들었어요

"어쩌면 불면증은 어린 날, 내게 뿌리 내렸을지도 몰라요. 또각또각 늦은 밤 계단을 서둘러 올라오는 구두소리가 났어요. 엄마는 그때 아빠의 옥바라지를 하며 우리 자매를 키워야 하니 쉴 틈이 없었겠죠. 엄마의 발소리가 들리면 언니와 나는 그제야 졸린 눈을 감았죠. 창문에 드리운 어스름 달빛, 볼을 어루만지는 엄마의 따뜻한 손길. 꿈속의 장면인 듯하면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예요."
 

은희 가족이 철산동 주공아파트에 살던 시절, 아빠 김병곤은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아래 민청련)에 투신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1985년에 김근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속되었다. 이때 죄목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국가모독죄. 서울대학 71학번으로 3학년때 유신반대 교내시위를 주도하여 첫 번째 구속된 이래 다섯 번째 감옥 행이었다.


82년생 희진, 84년생 은희 두 딸을 돌보며 엄마 박문숙은 춘천교도소로 남편의 면회를 다니랴 번역과 악세사리 판매로 생계를 꾸리랴 힘든 날을 보냈다. '열무 30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를 걱정하는 아이마냥 은희는 잠을 못 이뤘다.

아빠랑 찍은 단 하나의 사진

"철산동 아파트 단지 입구에 가게가 늘어서 있고 그 뒤로 뒷산을 올라갈 수 있어요. 어느 날 엄마랑 언니랑 함께 올라갔어요. 아카시아 잎을 들고서 한잎 한잎 따는 가위바위보 놀이를 했어요. 언니와 제가 이겨서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셨죠. 그때 남긴 사진이 아빠와 찍은 단 하나의 사진이에요."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서울대에 복학한 김병곤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네 번째 구속되었다가 그해 10월 석방된다. 다음 해인 1981년 그는 박문숙과 결혼을 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했다. 미국 국방부에 텐트를 납품하던 배진산업, 꼬박꼬박 월급을 탔지만 어려운 후배를 돕거나 운동자금을 대느라 아내에겐 빈 봉투를 내밀 때가 많았다. 은희가 태어난 1984년 그는 "사랑하는 딸들에게 독재를 대물림해줄 수 없다"며 운동일선에 복귀해 민청련의 상임위원장을 맡는다.

민청련에 대한 탄압으로 다섯 번째 구속이 된 그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뤄진 시국사범 석방조치로 1987년 7월 감옥 문을 열고 나온다. 춘천교도소에서 상한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운동일선에 복귀한 그는 민청련의 부의장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아래 민통련)의 정책실차장을 맡는다. 헌정사상 처음 직선으로 치러지는 12월의 대통령선거 승리를 위해 그는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나랏일'에 바쁜 아빠는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시간을 갖는 데 인색했다. 
 

이 사진이 희진, 은희 자매가 아빠와 찍은 단 하나의 사진 광명시 철산리 주공 아파트 뒷산이다. ⓒ 김은희제공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 병문안을 갔어요

"아빠에 대한 또 하나의 희미한 기억은 병원에 계실 때였어요. 주말에 언니랑 면회를 갔어요. 병실에 들어가면 한쪽 침대에 아빠가 누워있고 침대 하나는 비어있었어요. 거기서 언니랑 비디오를 봤어요.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개월을 다녔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빠의 모습은 제게 남아 있지 않아요.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벽, 알콜냄새 가득한 복도만 기억나요. 아빠를 외면하고 싶었나 봐요. 아니면 지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선거날, 구로구청 투표소에서 '부정투표함'이 발견되었을 때 민통련의 대선 상황실장으로 부정선거 감시에 공을 들이던 김병곤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분노한 시민 5천여 명이 이미 구로구청 마당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개표가 속속 이뤄지며 노태우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구로구청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농성장"이 되었고 김병곤은 농성지도부에 합류하여 상황실장이 되었다.

그 날 밤부터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경찰이 버스 60대를 동원 구로구청을 에워쌌다. 다음 날인 17일은 언제라도 농성장을 덮칠 분위기였다. 출소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춘천교도소 징벌방에서 당한 고통으로 몸이 쇠약했던 그에게 아내와 동지들은 경찰이 들어오기 전 몸을 피하라고 간청했다. 김병곤이 현장을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그러면 "오늘 밤은 집에 가서 쉬고 내일 새벽에 합류하라"고 했지만 그는 이마저 외면하고 외려 주변 사람에게 눈을 붙이라고 권유했다.

18일 새벽 6시 30분 다연발 최루탄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쇠파이프를 든 백골단이 악다구니를 지르며 구로구청 마당을 가로질러 청사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어 헬리콥터로 옥상으로도 경찰이 쏟아져 내려왔다. 김병곤이 관악경찰서로 연행되었을 때 최루탄을 뒤집어쓴 온몸에는 물집이 일어나고 두드러기가 번졌다.
  

구로항쟁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1988년 4월 28일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 그는 여섯번째 구속되었다. ⓒ 최경환


김병곤은 구속되어 영등포교도소에 갇혔다. 김병곤의 몸에 이상이 감지된 건 1988년 2월. 어렵사리 고대병원에서 외부검진을 받아보니 진행성 위암 3기, 암덩이는 무섭게 커져 있었다. 김병곤은 가석방으로 출소해 서울대 병원에서 1차 수술을 받고 암덩이를 잘라냈다. 잘 회복되는 것 같았는데 1988년 7월 장유착이 왔고 암은 재발해 복막으로 퍼지고 말았다.

김병곤은 시흥의 신천연합병원으로 옮겼다. 두 해 동안 힘겹게 싸웠지만 1990년 가을에는 늑막염과 패혈증까지 덮쳐 병세가 더욱 나빠졌다. 임종을 며칠 앞두고 그의 눈, 코, 입에서는 썩은 피가 흘러나오고 뼈만 남은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동지 김희택은 피를 나눈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수혈을 했다. 12월 6일 새벽 김병곤은 38살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아내 박문숙과 동지들의 피울음이 병실에 가득했다.

엄마는 의연히 병실을 지켰어요

"엄마는 365일 아빠의 병실을 지켰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할 때 놀란 게 병상일지였어요. 밥은 몇 숟가락 먹었는지, 무슨 주사를 몇 시에 맞았는지가 자세히 적혀있는 수첩이 여러 권 있었어요. 엄마에겐 아빠가 모든 고난을 이겨낸 것처럼 반드시 병마를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김병곤이 박문숙을 만난 건 1977년 명동의 향린교회. 김병곤은 명동의 구두닦이를 모아 교회에서 야학을 열었다. <어는 돌멩이의 외침>을 쓴 유동우, 동일방직 해고자 석정남이 교사였고 김병곤이 교장을 맡았다. 이때 박문숙도 교사로 합류했다. 야학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김병곤이 동일방직 노동자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다가 구속되었을 때 박문숙이 면회를 다니면서 연인이 되었다.

박문숙은 김병곤에게 한없이 따사로운 천사였다. 간이침대에서 선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김병곤의 숨소리부터 살폈다. 항암제를 맞으며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이 빠졌지만 매일 까실하게 자라나는 수염을 깍아주고 앙상한 그의 몸을 물수건으로 씻겼다. 거즈와 붕대를 몸소 갈며 남편이 회복하는 날을 기다린 박문숙이었다.
 

김병곤 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 인삿말하는 박문숙 김병곤과 박문숙은 1981년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 김은희 제공

   

병실에서 김병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그는 1990년 12월 6일 숨을 거뒀다. ⓒ 김은희제공


엄마가 유방암으로 눈을 감은 게 2014년이어요

"원망스럽게도 암덩이는 엄마에게도 닥쳤어요. 유방암이었죠, 2012년 가슴을 도려내는 1차 수술을 했는데 1년 만에 재발을 했어요. 2013년은 제가 일본에서 '마을재생'에 관한 공부로 석사를 마쳤을 때였어요. 그 무렵 엔화가 제일 비쌌죠. 한때 1700원까지 갔으니.

엄마는 젊어서 아빠의 옥바라지에 청춘을 보냈고 나이 들어서는 딸 둘이 대학원까지 공부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모든 걸 바치셨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일을 할 때라 월급이 있었으나 벅찼을 거예요. 일본에서 취업하고 싶었지만 서둘러 돌아왔어요.

암에 걸렸을 때 엄마가 일을 놓았어야 했는데... 1차 수술을 받기 전까지 사료관장 일을 하셨어요. 나중에 엄마 유품을 정리해보니 아빠 상을 치를 때 받은 방명록, 조의금 봉투를 다 보관하고 계셨어요. 엄마는 주변에서 베풀어준 사랑에 어떻게든 보답하려 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어려워도 어렵다고 하지 않고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요."


박문숙이 몸에 이상을 감지한 것은 2007~2008년 무렵. 국립암센터에서 조직검사를 한 그는 딸들에게 아무 일 없고 괜찮다고 했다. 그때 그의 몸에는 암이 또아리를 틀었던 모양이다. 박문숙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사료관장으로서 '4월혁명 사료총집'에 누구보다 큰 애착을 가졌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료집발간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는 사료관장의 업무만이 아니라 민청학련 재심,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명예회복과 국가폭력에 대한 보상 문제에도 발 벗고 나섰다. 유가협가족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돌봤다. '민주화운동의 맏언니'라는 호칭이 그에게 결코 과하지 않았다.

자매에게 남은 건 홍제동 방 두 칸의 전세보증금

"엄마가 돌아가시고 저희에게 남은 건 홍제동 두 칸짜리 방의 보증금이 전부였어요. 어려서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철산동 주공단지에서만 1219동에서 238동, 111동에서 1016동, 1218동에서 호수를 달리해서 다시 1016동으로. 내 집이 없으니 기한이 되면 이사 가고 또 이사간 거겠죠. 나중에 주민등록초본을 보고 놀랐어요. 안양으로 가서도 비산동, 호계동, 평촌동, 석수동까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때는 아빠를 원망했어요. 아빠가 돌아가신 날 이모들 몇 명이 기다리다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저를 안고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나요.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옷을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갔어요.

어른들이 모두 울고 있어서 저도 같이 울었어요. 아빠를 생각하면 우리 가족을 좀 지켜주지, 엄마를 좀 지켜주면 안 됐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이제는 제가 아빠가 돌아가실 때 나이를 넘어서고 보니 아빠의 매 순간 결정이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돼요. 너무 늦었지만, 마음속 깊이 아빠에 대한 지지를 보내요."


1979년 광주교도소에 있을때 김병곤은 자치반장이었다. 그때 광주교도소 특별사동의 한쪽 켠에는 북에서 온 공작원과 남로당원 37명이, 반대편에는 이영희선생을 비롯 긴급조치와 학생운동 관련 인사34명이 있었다. 그는 수십 년간 면회 한 번 온 적 없고 돈 한 푼 없는 장기수를 위해 감옥 내 빈부 차이를 없앴다. 영치금을 한데 모아 물품을 구입하고 장기수에게 비타민을 선물했다.

박정희 정권과 싸웠으나 반공이 신념인 목사도 설득해 모든 양심수의 단합을 이뤄냈다. 교도소와 싸워 운동시간을 늘리고 하늘을 못 보게 창문을 가리던 널빤지를 뜯어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어 있던 이영희선생은 젊은 김병곤의 큰 품을 칭찬했다.

김병곤은 결혼 후 첫 징역을 살 때인 85년, 면회 온 박문숙에게 이 학생은 영치금이 없고, 저 학생은 내복이 없으니 넣어주라고 부탁했다. 두 딸의 우윳값도 빠듯한 박문숙은 어떻게든 돈을 구해 어려운 학생을 돌봤다. 부부가 바라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양지바른 곳에 모시니 맘이 편해요

"아빠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었으나 아빠의 동지, 친구, 선후배들이 해마다 빠지지 않고 찾아왔어요. 겨울이고 응달이라 추모제 때마다 미안했어요. 이젠 눈물이 마를 때도 되었고 잊힐 만도 한데 기억해주는 분들이 너무 고마워요. 마침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양지 바른쪽 묘지터가 나와서 합장했어요. 아빠, 엄마의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 문익환 목사님, 김근태 아저씨. 이범영 삼촌의 묘소가 있어서 더 푸근해요.

엄마는 자기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어요. 지금 엄마가 있던 병실로 돌아간다면 엄마의 아픔을 들어주고 엄마의 등을 어루만져 줄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삭히기만 했어요. 엄마도 많은 날을 하얗게 새웠겠죠. 10여 년 넘게 제가 안고 있는 이 불면의 밤은 엄마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언니나 나나 외면만 했던 우리의 상처를 글로 풀어내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빠는 구로구청에서 경찰이 들어오는 날 말할 수 없는 고뇌가 있었다고 회고했어요. 아내와 두 딸을 두고 다시 갇힐 것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겠죠. 우리 가족에게는 불면의 밤이 숙명이었나봐요."
 

<못 다한 이야기>

① 정금채, 임상택, 박석운, 장상환, 주대환, 이범영, 김희택, 정은교 등 주로 서울대 학생운동 선후배가 1983년부터 철산리 주공아파트 단지에 이웃해 살면서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② 박문숙은 김병곤 못지 않은 투사였다. 1986년 김병곤이 춘천교도소에서 소내 민주화투쟁을 하다 징벌방에 갇혔을 때, 박문숙은 면회를 요구하며 한겨울에 교도소 앞마당에 이불을 펴고 농성을 시작했다. 김병곤은 당시 극심한 형벌을 당했다. 그는 비녀꽂기로 온몸이 결박된 상태에서 두드려 맞았다. 손발을 뒤로 묶인 채 개처럼 밥을 먹고 대소변을 봐야 했다. 폭행으로 장 출혈이 있어 몸 아래로 피가 새어 나왔다.

박문숙은 싸움이 길어지자 춘천의 인권사랑방에 농성장을 만들었다. 같이 징벌을 당한 양심수의 가족을 모으고 카톨릭농민회와 강원대생의 지원을 받아 금치 중단을 이뤄냈다. 그는 오희창교도소장과 보안과장 등을 춘천지검에 고소했다. 결과는 단 한 줄 '혐의없음'이었다. 그는 다시 재정신청을 했다. 이마저도 기각이었다.

김병곤이 춘천교도소에서 당한 비녀꽂기는 "손목에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포승줄로 손목을 꽁꽁 묶은 다음, 묶은 두손을 머리 뒤로 젖혀 빼내어 허리 뒤쪽에 감아놓은 포승에다 연결해서 잡아 당긴뒤 위로 올라간 양팔과 뒷머리 사이에 긴 곤봉을 끼워놓는 형벌"이다. <김병곤평전>(실천문학사, 188쪽에서 인용)

③ (사)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는 올해 네 번째 '민주화운동,그 기억과 희망나누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희망나누기사업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과 유자녀를 지원하고 있으며, 올해는 11월 30일까지 추전을 받고 있다. 김병곤님의 따님 김희진, 김은희님은 2020년 1월의 첫 번째 희망나누기에서 생활지원 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김희진, 김은희 두 분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에게 먼저 지원이 되어야 함에도 이를 받게 되어 송구하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④ 김은희는 일본에서 공부한 '마을재생'의 전공을 살려 서울시의 마을만들기 사업에 시민운동가로 결합해 일을 했다. 지금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 둘과 함께 '지구도 방학이 필요해'라는 환경기업을 만들어 방학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냈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은 아니지만 '기후위기'에 맞서는 사업을 해보려 한다. 우선 주목하는 것은 판촉물, 시중에서 유통되는 판촉물은 지나친 포장도 문제고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이는 공공에서 발주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재생이 되면서 쓰레기가 적게 나오는 판촉물을 설계하고 민간과 공공에 이를 알리고 운동 일선이 아니라도 이처럼 다양한 삶의 공간에서 펼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김병곤 평전

김현서 지음, 실천문학사(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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