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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선인이 되어 나타난 김영세

삼촌 김영세가 아리랑고개에 있는 조카 김문수의 집에 나타난 것은 약속한 일정보다 3일이 지난 후였다. 3일 동안 외출도 하지 못하고 삼촌을 기다렸던 김문수는 반가움과 안도감이 겹쳐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몸집보다 훨씬 커 보이는 잿빛 두루마기를 입은 김영세는 조카를 보고는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삼촌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종로경찰서에 3일 동안 체류하고 오는 길이다.”

김영세가 학교에서 광화문 철거 대책을 써 내라는 과제를 내자 대부분 학생이 글을 써서 제출했다. 학생들의 글을 읽은 김영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고보생들까지도 한국 계몽주의 지식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이 못나서 당하는 일이나 우리는 힘을 길러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 식의 주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떤 학생은 ‘구식 건물이 헐어지고 신식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시대의 추세’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영세는 시골 학생들의 저수준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눈에 띄는 글 하나가 발견되었다. 서당촌에서 어렵게 학교에 다니는 오영식이라는 학생이 쓴 글이었다. 오영식은 갑오년 동학운동 때 아버지를 잃었다고 했다. 오영식의 글은, ‘서울 광화문에 가서 우리의 반대 의사를 알리자’고 했다. 그것은 김영세가 보기에 가장 실질적인 대책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그런 제의가 있었음을 알리고 함께 서울에 갈 학생의 지원을 받았는데 겨우 다섯 명이 신청했다.

김영세는 다섯 학생의 여비를 대고 서울에 올라와 광화문 앞에서 행인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며 구호를 외쳤다. 얼마 후에 일본 경찰과 신문 기자가 달려왔다. 그는 신문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한 기자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경찰서에 잡혀 간 학생들은 귀향 조치되었고 주동 겸 인솔 교사인 김영세만 남아 3일 간 조사를 받다가 석방된 것이었다.

“흐흐. 나도 이제부터 후테이센징,,, 즉 불령선인이 되었다. 그리고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더구나.”
“고생하셨군요. 시장하실 테니 제가 얼른 밥을 짓겠습니다.”
“아니다. 가 볼 데가 있다. 아무래도 서울에 와 직장을 구해야 할까 보다.”

김영세는 교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김 선생, 그런 일로 서울 가려거든 우리 학교에 다시 오실 생각은 말고 가시오.”

삼촌과 조카는 함께 아리랑 고개를 내려왔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덕수궁 돌담에 붙어 있는 포장마차 선술집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오후에 김영세가 일을 보는 동안 김문수는 음악 다방 휘가로에 가 보았다. 아마도 삼촌은 취직 문제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았다. 김문수는 휘가로에 가면 혹시 조순호를 만날는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조순호는커녕 나민혜도 없었다. 처음 듣는 요란한 서양 노래만 홀을 울리고 있었다.

김문수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

김영세는 큰 사발의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많이 걸었더니 목이 타는구나. 너도 마셔라.”
김문수는 삼촌보다 더 빨리 마셨다.
삼촌이 조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제 성인이 다 되었구나.”

그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대화를 주로 했다. 김영세는 조카에게 한국 지식인의 허상을 말해 주었다. 그런 삼촌의 말은 김문수를 더욱 고뇌하도록 만들었다. 김문수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심각하게 모색해 오던 중이기 때문이었다. 삼촌의 말대로라면 국내에서 나라를 위한 일을 찾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잔 하나로 불을 밝히고 있는 포장마차 안은 매우 어두웠다. 그나마도 등유가 다 되어 가는지 심지의 불은 갈수록 엷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날이 차가워졌기 때문인지 술손님은 그들 둘뿐이었다. 삼촌은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문수 아버지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네 아버님은 사회주의자셨어.”
김영세는 지금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사회주의 역시 독립의 방안은 아니라고 말했다.

일경에게 쫒기는 여성

그때였다. 몸집이 작은 젊은 아낙네가 포장을 들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김영세 옆으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가슴에 작은 보퉁이를 안고 있었다. 용모로 보아 이런 시간에 선술집의 포장을 들치고 들어와야 할 여인은 결코 아니었다. 어두운 중에도 김영세는 그녀의 옆모습에서 지체 높은 집안의 여인만이 발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밖의 동정을 주의 깊게 탐색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졸고 있는 포장집 주인은 소리 없이 들어온 여인을 아직 보지 못했다.

밖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가 포장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얼굴을 돌려 김영세를 보더니 조그만 소리로 그러나 다급하게 말했다.
“절 숨겨 주실 수는 없는지요?”
김영세는 할 말을 잊고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일본 경찰한테 쫓기고 있어요.”

김문수는 안타깝고 초초했다. 그는 삼촌의 큰 두루마기를 생각했다. 게다가 그것은 어두운 잿빛이기도 했다. 그는 삼촌의 두루마기 자락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에게 동시에 말했다.
“여기가 좋을 것 같네요.”

몸집이 자그마한 여인은 몸을 옹그려 김영세의 두루마기 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김영세의 가랑이 사이에 앉아 몸을 붙였다. 김문수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전혀 표시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삼촌의 사타구니 방향을 향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대로 앉아 계세요. 움직이시지 말고요.”
삼촌의 두루마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삼촌 한 잔 더 하지지요.”
“그러자구나.”
그때 일본 형사인 듯한 사람이 거칠게 포장을 들쳤다.
“이봐! 주인, 뭐하고 있어?”

손님들의 움직임이 있어 잠을 깼던 주인은 난데없이 들이닥친 형사에게 겁을 먹었는지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러자 형사는 김영세와 김문수를 힐끗 보았다.
“혹시 젊은 아낙 하나 보지 못했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장집 주인도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혹시 오면 잘 구슬려 붙잡아 둬. 내가 다시 올 테니까.”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여인의 가슴은 김영세의 무릎에 밀착되어 있었고 그녀의 두 손과 얼굴은 김영세의 사타구니에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김영세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김영세는 여자를 안아 본 적이 없는 청년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다른 이유로 긴장해가고 있었다. 반면에 그녀는 오히려 포근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세 사람은 아리랑고개에 있는 김문수의 집으로 가서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두 청년을 대번에 신뢰하게 되어 자기의 이름이 정정화라는 것과 상해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왔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그녀는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라고 말했다.

그 밤 이후로 김영세의 가슴에는 정화라는 자그만 여인이 크게 자리 잡았다. 정화 역시 김영세에게 남편을 통해서는 느껴 보지 못한 이성적 직관을 강렬하면서도 아련하게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 눈빛으로조차 나타내지 않았다.

김영세는 상해로 간다는 정화에게 말했다.
“부인, 아무래도 서울역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날 아침 정화와 김영세는 개화산 너머에 잘록한 지형으로 나 있는 ‘큰고개’를 넘고 있었다. 공암진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였다. 공암진은 행주나루와 마주보는 남쪽 나루였다. 정화는 영세의 권유대로 서울역을 피해 일산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기로 한 것이었다.

김영세가 먼저 걷고 정화는 두세 걸음 뒤쳐져서 걸었다. 그게 그 당시 부부의 외출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내외하는 부부 같아 보였다.

그들이 탄 나룻배는 개화산을 뒤로 하고 출발했다. 강 건너에 있는 행주산이 마주 보였다. 강물은 차갑고 깨끗해 보였다. 김영세는 북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잔뜩 움츠리고 있는 정화의 어깨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작은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얼마 후 일산역 기차 차창 밑에서 영세는 정화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부인은 위대하십니다. 부디 안전히...”
김영세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혹시라도 다시 경성에 오게 된다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기차가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김영세는 급히 두루마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만년필이었다. 그는 차창으로 손을 뻗어 만년필을 정화에게 내밀었다. 영문을 몰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정화는 얼른 손을 내려 만년필을 받아 꼭 쥐었다. 기차는 움직였고 두 사람의 거리는 이내 멀어져갔다.

얼마 후 김영세의 귀에 아련히 들리는 기적 소리가 성큼 멀어진 기차와의 거리를 실감나게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묻힌 식민지 역사를 발굴하여 재현하면서 극일에 성공한 인물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태그:#불령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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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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