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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5일치 소년조선 1면


4월 24·5일, 이 이틀간은 전교조와 한겨레신문에겐 색다른 날이었다.

24일 배달된 한겨레를 비롯한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대부분의 중앙 일간지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신문 대부분이 취재 대상으로 전교조와 특정 언론사를 다뤘다는 점이다. 하지만 주제와 내용은 신문마다 한참 어긋나 있다. 25일엔 아이들이 보는 소년동아·소년조선·소년한국도 이런 이상한 편집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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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신문사 '야합'에 멍드는 동심 / 임경환 기자


같은 소재, 다른 주제

한겨레와 노동일보는 23일 전교조와 참교육학부모회가 공동으로 연 '소년 조선·동아·한국일보 구독 거부선언'을 사회면 박스 머릿기사로 처리했다. 기자회견 사진을 곁들인 이들 신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신문 단체구독 거부 본격화'(한겨레), '어린이신문에 멍드는 동심'(노동일보)

반면, 소년신문을 자매지로 내고 있는 조선·동아·한국일보를 비롯한 중앙·경향·문화·국민일보 등 나머지 신문엔 거부선언 기사가 한 줄도 나지 않았다. 이는 문화방송과 서울방송 등 공중파 방송이 이 선언을 자체 메인 뉴스에서 주요 기사로 다룬 것과는 딴판이다.

방송 특성상 뉴스 재료가 부족한 형편에서도 주요하게 보도한 기사를 신문이 못본 척한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다. 신문은 방송과 달리 많게는 56면이란 폭넓은 지면에 수많은 기사꼭지를 실을 수 있다.

전교조와 한겨레 독자가 유착했다?

대신, 같은 날 이들 신문을 장식한 것은 놀랍게도 전교조와 한겨레신문 독자의 유착 문제. 신문들은 이 내용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회면에 2단 기사(경향신문은 1단)로 썼다. 보도 내용 또한 토씨 몇 개만 빼고는 모두 같았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 역시 모두 출입처가 서울시교육청 기자실이었다. 내용이 엇비슷하니 제목까지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일.

"한겨레신문 보는 학부모에 학교운영위원 출마 권유하라" 전교조 서울지부, 지난달 분회에 공문(조선일보)
"한겨레 구독 학부모 학운위 출마를" 전교조 서울지부, 분회에 공문 보내(동아일보)
"한겨레 구독 학부모에 학운위 출마 권유하라" 전교조 문서 물의(한국일보)
"한겨레 독자 골라 학운위 출마 권유하라" 전교조 공문 물의(중앙)

내용을 살펴보면, 전교조 서울지부가 지난달 학교운영위원회 선거를 앞두고 학교 분회장들에게 '한겨레신문을 구독하는 학부모를 찾아 출마를 권유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는 것.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24·5일치 신문 사설까지 곁들여 '전교조의 이상한 공문'(동아일보 사설 제목)이 '(전교조 방침) 적절치 못했다'(조선일보 사설 제목)고 맹렬히 공격했다.

소년신문 3사 25일 전교조 문제 1면 보도

더욱 놀랄 만한 사실은 어른 신문에 이어 소년신문 3사도 25일치 신문에서 이 내용을 비중 있게 다뤘다는 것이다. 소년조선은 1면 머릿기사로, 소년동아는 준 머릿기사로 다뤘다. 소년한국일보도 같은 내용을 1면 사이드 톱기사로 올렸다. 이 소년신문 보도 내용은 전날 어른 신문 내용을 그대로 받은 것이다.

소년신문 역사상 교사의 잘못을 폭로하는 글이 1면에 실린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보통 학부모가 아이 보는 앞에서 담임 교사를 욕하지 않듯 소년신문도 초등학교 1학년생까지 보는 지면에서 교사 비판을 해오지 않은 게 사실이다.

촌지문제·울산 교장들의 건축비리 연루 등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 사건도 이런 까닭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소년신문 3사는 약속이나 한 듯 10만 명의 교사들이 참여하는 모임인 전교조를 전면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취재 결과 전교조 서울지부 산하에 있는 한 부서가 이 신문들이 보도한 내용이 담긴 문서를 각 지역 교육청별 대표인 지회장에게 보낸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하지만 보도대로 정식 공문은 아니었으며 '학교운영위원회 기획단'이 분회장 참고자료 형식을 띠어 전자우편으로 보낸 것이었다.

이들 신문의 보도를 본 전교조 소속 일부 간부들은 "문구 가운데 한두 줄이 오해를 살 만하며 부적절하다"고 걱정했다. 전교조 김재석 서울지부장도 "산하 기구에서 아이디어 차원으로 메일을 보낸 것 일뿐"이라면서도 "내용에서 특정 언론을 거론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소년신문 거부선언과 전교조 문서

그런데 왜 대부분의 일간지들은 하필 전교조가 소년신문사를 비판한 다음날 한 목소리를 냈을까. 그것도 학교 안 소년신문 반대를 주도한 전교조와 이를 자세히 보도해온 한겨레신문에 칼을 들었을까. 교육관련 단체 주변에서는 "이날 보도는 오해를 살 만한 전교조 자료만큼이나 오해를 살 만한 기사"라고 보고 있다.

다음은 소년신문 거부 실무책임을 맡은 방대곤 초등 정책국장의 말이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소년신문 거부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날 신문보도를 기대한 게 사실이죠. 그런데 역시나 방송과 달리 신문은 엉뚱한 내용이 나왔네요. 어떻게 때를 맞춰 이런 이상한 기사가 나올 수 있는지 참 상상이 안갑니다."

▲ 4월 25일자 소년동아 1면 기사
이번 기사는 그 내용 전개 방식이 모두 같다. 어조사 몇 개와 기사 분량 정도만 다를 뿐이다. 보통 기사가 닮은 꼴인 경우는 기관에서 받은 보도자료나 연합뉴스를 베낄 때다. 보도자료나 공식회견 자료가 아닌 특별한 자료를 입수해서 가치 있는 기사를 쓸 경우 이를 특종이라고 말한다. 내부 자료를 입수한 어느 한 기자가 있을 텐데 이 기자는 특종의 유혹을 버리고 왜 이 자료를 동료기자들에게 공개했을까.

실제 이번 기사를 작성한 한 기자는 전화통화에서 "기사가 같은 것은 연합뉴스를 베껴 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확인 결과 연합뉴스 기사는 많은 부분에서 22일자로 나온 한국교육신문을 따온 것처럼 보였으며 전교조와 한겨레 부분은 상세하게 거론되지 않았다.

"소년신문사 만드는 언론사 기자가 풀었다"

24일치 주요 일간지 보도 내용을 보면 문제의 전교조 문서를 직접 보지 않고는 작성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울교육청 기자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 곳 사정에 밝은 한 일간지 기자는 24일 다음처럼 자신 있게 말했다.

"소년신문을 만드는 한 언론사 기자가 전교조 문서를 입수하고 문서를 풀었다고 하더군요. 그 자료를 갖고 나머지 기자들까지 같이 쓴 거지요. 이런 걸 풀 기사라고 하는데 이번 기사는 풀 기사였죠."

문서를 처음 입수한 모 신문 기자와 25일 전화인터뷰를 했다.
"제가 처음 문서를 입수한 건 사실입니다. 이날이 23일인데 일부러 소년신문 거부선언한 날과 시기를 맞춘 건 아닙니다. 서울교육청 출입기자들은 제가 기사를 쓰는 도중 알게 되었어요. 이미 22일자 한국교육신문에 난 내용이라 특종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어요. 사실 소년신문 문제는 관심도 없고요."

25일 전교조 서울지부 김호정 수석부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털어놨다.
"신문에서 문제로 삼은 문서는 이미 한 달 전에 배포된 것으로 확인됐어요. 그런데 이 자료를 때마침 소년신문 거부 선언이 있는 날 어떻게 입수했으며 다음날 나온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듭니다."

물론 전교조가 원인제공자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신문편집 구조상 취재기자들보다는 데스크 시각이 지면에 반영되는 것은 상식이다. 23일 오후 5시, 대부분의 신문사 데스크 책상엔 소년신문 거부선언 기사와 문제의 전교조 문서 기사가 함께 놓여 있었을 것이다. 연합뉴스 또한 소년신문 거부 선언 기사를 작성했지만 데스크가 본 기사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 확인됐다.

데스크의 이심전심?

데스크는 이 두 개의 기사 가운데 소년신문 관련 기사는 버렸으며 전교조 문서 기사만 선택한 것이다. 선택결과로만 보면 한국 대부분의 신문사 데스크의 '이심전심'이 작용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서울교육청을 출입하는 한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요? 어차피 데스크가 기사를 선택하고 편집한 건데…. 우린 기사를 보낸 것뿐이죠."

왜 데스크의 책상엔 전교조와 특정 언론사를 다룬 두 개의 엇갈린 기사가 같은 날 올라왔을까. 어떤 생각으로 데스크는 이날 두 개의 기사 가운데 한 기사를 죽이고 또 다른 한 기사를 살리는 일을 했을까.

문제의 문서 작성 한 교사의 항변
"제대로 된 선거로 야무진 학운위원 세우고 싶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문서는 어떤 내용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석에서 언급해도 오해를 받을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분회장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띤 한 장으로 된 문서는 "건전한 의식을 가진 학부모를 찾아서 (출마를) 권유해달라"면서 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한겨레신문 독자를 찾아 권유하는 방법, 작년 담임 교사에게 물어 건전한 의식을 가진 학부모를 찾는 방법, 학부모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방법.'

하지만 '이런 문서를 궁여지책으로 작성한 배경엔 열악한 학교운영위원회 선출 환경도 작용했다'는 게 이 문서를 직접 작성한 이들의 볼멘소리다.

사실 올해 치른 학교운영위원회 선거는 대부분 무투표 당선이었다. 이는 서울 남부교육청 소속 ㅇ초와 강서교육청 소속 ㅅ초등학교 등 10여 개 학교를 뽑아 조사한 결과 교원위원은 물론, 학부모위원까지 선거를 통해 선출한 경우는 두 학교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 교사와 학부모들은 '의무만 있고 권한이 적은 학운위 참여'를 보이콧하고 있다는 얘기다.

'운영위원을 하겠다'는 후보가 나서지 않는 형편에서 학교장의 추천은 바로 무투표 내정이 되기 십상이다. 반면 전교조가 '건전한 교사와 학부모를 후보'로 내세우는 일은 '자기 사람 심기'가 아니라 '자기 사람 출마'를 뜻할 뿐이다. 판단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교사와 학부모 전체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출마자를 만드는 것은 곧 경선을 의미하는 셈이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90년대 중반부터 학운위 설치운동을 강력하게 펼친 바 있는 전교조 교사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 문서 작성은 이런 고심 속에서 나온 궁여지책'이라는 게 문서를 직접 만든 이들의 항변이다.

문제의 문서를 작성한 서울 모 중학교 교사는 24일 "신문을 보면 전교조의 학교운영위원회 관련 사업이 마치 교육위원 당선을 위해서 부당하게 선거에 개입하는 것인 양 호도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우리는 오래 전부터 올바른 학교운영위원회 구성과 활동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문제가 된 문서도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안건 내용이 교장의 부탁을 받은 학부모와 지역위원에 의해서 왜곡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고, 회의에 참석해서 한 마디 발언도 하지 않는 학부모위원도 있는 게 일반 현상"이라면서 "허수아비 학운위원이 아니라 야무진 학운위원이 세워지지 않는 한 학교운영위원회는 허깨비이자 교육주체들에게 실망만을 주는 기구로 전락하리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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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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