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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학생의 경력 쌓기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른바 '스펙'이라 불리는 요건들을 갖추기 위해 졸업을 늦추면서 서른이 다 되도록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생들이 스펙을 쌓기 위해 사교육 시장에 지출하는 연간 비용이 무려 2조원에 달한다는 통계치가 발표되었다.

새삼 놀랍지도 않다. 스펙 쌓기는 더 이상 졸업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해도 방학에 토익 점수를 올리고 영어 회화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학원에 다녔고, 이력서에 나의 성실성을 드러내 줄 봉사 활동을 꾸준히 했다. 학교에서 대외활동 없이 미련하게 공부만 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대기업의 리더십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은 필수다. 학기 중에는 더 바쁘다. 이번 학기에는 21학점, 9과목을 수강했다.

매주 레포트 과제를 1개씩만 내주는 교수님은 천사 같은 분이다. 몇 번씩 모여서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대본, 퍼포먼스를 맞춰 보아야 하는 조별 발표 과제는 말 그대로 피를 말린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영어 발표다. 저번 주에는 기말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과제들이 모두 겹쳤다. 제출해야 할 레포트가 14개, 영어 발표가 2개, 한국어 발표가 1개 있었다.

욕심에 차지 않는 모자란 보고서를 쓰면서도 철야를 세 번이나 해야 했다. 그렇지만 매주 목요일 친구들과 진행하는 어깨동무 모임은 미룰 수 없다. 내년부터 전공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적분과 통계학 원론 공부를 모두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달력을 보니 대학생이 되고 난 뒤, 주말에 쉬어본 적이 딱 다섯 번뿐이었다.

시험기간에 병원에 실려가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고3때도 몰랐던 부정맥을 대학에 와서 발견하게 된 친구도 있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겨우 자리를 잡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간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들어온 대학의 캠퍼스는 그저 고등학교 생활의 연장선이었다. 아니, 그 보다 더 힘들고, 더 고독하고, 더 치열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 MT는 고사하고, 친구들과 우정을 다지고 회포를 풀 술자리 한 번 갖기 힘들다. 다들 나 이상으로 바쁜 삶을 살고 있어 서로 시간을 맞추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내년 11월로 입대 날짜가 확정 되었을 때, 나는 정당하게 2년 동안 이 전쟁터를 떠날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이것이 오늘날 09학번 신입생의 모습이다.

더 고독하고 더 치열해진 대학가

서울 중앙대 캠퍼스 학과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재학생(왼쪽), 서울 경희대 캠퍼스 로비 소파에서 잠시 잠을 청하고 있는 재학생.
 서울 중앙대 캠퍼스 학과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재학생(왼쪽), 서울 경희대 캠퍼스 로비 소파에서 잠시 잠을 청하고 있는 재학생.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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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이런 우리를 보고 말한다.

"요즘 대학생들, 거 낭만을 몰라. 사회 나가서 고생도 해보고, 캠퍼스 잔디밭에 누워 인생 고민도 해보고 해야지."

우리에게 낭만을 앗아간 당신들이 우리에게 낭만을 논하다니, 나는 힘이 빠진다. 하루에 22시간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는 악덕 업주가 그들에게 자유를 가지라고 역설하는 꼴이다. 그래, 우리에게 낭만은 너무나 먼 단어다. 하지만 우리는 낭만을 안 누리는 게 아니고, 못 누리는 거다. 누려본 적이 없으니까.

점차 참가자 수가 많아지는 입시 전쟁과 철저하게 분리된 사회 서열을 구성한 것은 어른들이었다. 공부, 공부, 공부를 외치며 우리의 다른 재능들은 철저하게 짓밟은 어른들 덕에 전 사회의 소년 소녀가 그들의 푸른 멘스를, 푸른 몽정을 숨막히는 입시 전쟁 속에서 숨기고 억눌러야 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공부한다. 더 이상 대학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회계사, 검사, 변호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매년 수 백, 수 천명씩 쏟아져 나오는 '사'들은 희소성을 잃고 유명 로펌이나 법인에 들어가기 위해 또 다시 공부한다. 아, 유명 대학 학생이 되도, '사'가 되도 힘들다는데, 그것도 안 되면 어떡해.

고등학생은 유명 대학에 가기 위해, 중학생은 외고에 가기 위해, 초등학생은 국제 중에 가기 위해, 유치원 생은 유명 사립 초교에 가기 위해, 갓난 아기는 영어 유치원에서 뒤처지지 않게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한다.

이런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낭만'은 너무 황홀한 나머지 범접할 수 없는 개념이다. 낭만은 기본적으로 이상적인 감상에 젖어 들어갈 시간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치를 결코 누려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지금은 학점과 스펙을 쌓을 시간도 없고, 신입 사원 때는 영업 실적을 채우기에 급급할 것이며, 좀 더 지나서는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게 죽도록 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알고도 치열한 경쟁의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첫째는 경쟁이 없는 삶을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뜬 구름과 같은 낭만을 좇는 것보다 경쟁에서 생존하는 것이 우리의 성공을 좀 더 확실하게 보장해 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 현실을 바라본다. 대입 전부터 진로를 세웠고, 1학년부터 고시 준비를 하고, 어학 연수 계획을 세운다. 아플 정도로 치밀하고, 계산적이고, 정확하다. 물 샐 틈 없이 짜인 계획에 낭만을 즐길 여유는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지면 위에 고백한다. 지쳤다. 힘들다. 외롭다. 떠나고 싶다. 변하고 싶다. 학교가 아닌 새로운 공간에서, 경쟁상대가 아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경쟁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서로를 짓밟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 지난 9개월 동안 나는 매일 푸념했다. 무엇이 나를 이 시간까지 학교에 갇혀있게 만들었는가?

대학시절의 낭만? 그게 뭔데?

16일 새벽 3시경, 서울 한국외대 도서관 열람실 풍경. 늦은 시각임에도 여전히 열람실에는 많은 학생들로 가득하다.
 16일 새벽 3시경, 서울 한국외대 도서관 열람실 풍경. 늦은 시각임에도 여전히 열람실에는 많은 학생들로 가득하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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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고뇌했다. 어떻게 해야 이 눈물 나고 숨막히는 경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푸념과, 그 고뇌 끝에 내리는 결론은 결국 이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성공하자는 것이다. 결국 나는 거대한 사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를 다그친다.

'이런 약한 생각을 해서는 내가 원하는 학점을, 경력을, 이력서를, 경쟁력을 갖출 수 없어. 내 인생은 무너질 거야.'

그리고 다시 계획을 정비한다. 더욱 숨막히고, 더욱 고통스럽게, 스스로를 더 옭아맨다. 그러다 <오마이뉴스>에서 한 댓글을 보게 되었다.

"우리 7080세대는 사회의 20이 불합리함을 겪으면 80이 20을 위해 거리로 나섰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의 80이 불합리함을 겪어도 모두가 20에 들어가려고 아등바등 하기만 한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시원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허를 찔렸다. 그래, 왜 우리는 이토록 치열하고 숨막히는 경쟁구조를 비난하면서도,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고 서로를 짓밟는 데만 몰두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왜 우리도 생각 없이 공부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우리도 문제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첫 번째 문제는 우리 세대 간의 대화가 단절되어있는 데서 기인한다. 우리는 모두 지치고, 힘들고, 외롭다. 그렇지만 이 곳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줄 친구가 더 이상 없다. 저들은 나의 경쟁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아픔은 곧 저들의 기회가 된다. 설사 저들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더라도, 약점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써 경쟁사회에서 도태되는 나를 폄하하고 짓밟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Ferdinand Tönnies)는 그의 저서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Gemeinschaft und Gesellschaft(1887))에서 게마인 샤프트(Gemeinschaft)를 대인관계가 단순하고 솔직한 자생적 의지(wesenwille)에 의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으로 보았고, 게젤 샤프트(Gesellschaft)를 합리적 의지(Küwille)에 의해 서로의 이익과 능률에 따라 비인격적 인간관계가 형성된 집단으로 보았다.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많은 사회 집단이 게젤 샤프트가 되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학교만은 전인적 교육의 장소로 남아있었다.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부대끼며 인간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성장하는 사회적으로 거의 유일한 게마인 샤프트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사회가 심화될수록 교내의 일차적, 전인적 관계는 사라져갔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경쟁 사회에 침식당한 학교에 '친구'란 없다. 모두가 나의 경쟁자일 뿐이다.

방학 때 내게 수학과 영어 과외를 받았던 초등학생 동선이는 이미 나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었다. 종합 학원은 물론이고, 일본어, 한자, 컴퓨터, 피아노, 태권도 학원을 매일 엄마의 철저한 감시 아래 전전하고 있었다. 동선이는 한 문제를 틀릴 때 마다, 등수가 내려갈 때 마다 창 밖으로 떨어져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필기한 노트를 도난 당할까 사물함도 쓰지 못한다는 초등학교 교실에 친구는 이미 없었다. 막 한글을 뗀 사촌 동생들도 영어 유치원의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학습지를 하고 학원을 다니며 경쟁력을 기르고 있다.

유일한 게마인 샤프트를 상실한 우리는, 이제 게젤 샤프트에서 존재한다는 전인적 대인관계가 무엇인지 느낄 수 조차 없다. '학교 친구'란 말은 이제 '직장 동료'와 같이 그저 같은 직업이라는 굴레 속에 함께 묶여있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관계를 칭할 뿐이다. 내 손전화에서 대학 친구들은 '직장' 폴더로 분류되어있다. 우리는 경쟁자의 고민을 들어주고 힘을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 소리는 네 '친구'더러 하라고 한다. '대학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전인관계가 사라진 사회, 그 속의 우리

두 번째 문제는 세대 간 대화의 부재이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회를 바꾸려면 우리가 사회에서 발언권을 가져야 하고, 사회적 발언권을 가지려면 우리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7080세대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통해 사회 주도층이 되었고, 피와 땀을 흘려 사회를 바꿨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사회에 외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개혁했다.

문제는 그들의 진보적 성향이 보수적 고정관념이 되도록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여전히 말없이 그들을 따르는 어린 아이일 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회는 기존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대화를 통해 조화를 이룰 때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침묵을 지킴으로써 기존의 세대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한 것이다.

가령 여성 문제가 그러하다. 나는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2005)을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사회' 부분이 그러하였는데, 한 학우의 말대로 2005년도에 쓰여졌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여성과 아줌마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지 않음도 물론이다. 남성과 여성은 다른 것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임을 안다. 반장도, 회장도 여자 친구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여성의 리더십이 21세기 다원성의 가치를 더욱 잘 구현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도전에 등장한 남성 중심적 사회 구조와 그것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면서도, 예로 나온 사례들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차별 문제까지 언급되고 있는 우리 세대에서, 저자가 제시한 무자비한 성차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저자가 속한 '7080'세대의 사회에서 동시대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는 말없이 방관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한 세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견과 사상을 사회에 외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불합리한 것은 집에서 혼자 불평만 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앞으로 나서서 말하고, 설득하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인 결의를 통해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첫 단계인 말하기조차 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세대 간 소통의 부재 속에서 우리의 이해할 수 없는 불만과 행동은 그들에게 어린 아이들의 엄살과 어리광일 뿐이다.

문제는 세대간 단절, 대화를 하자

위의 두 가지 문제점에서, 사회의 경쟁 구조는 원인이자 결과이다. 즉 세대 내 대화의 단절과 세대 간 소통의 단절과 경쟁 구조의 고착화는 끊임없는 악순환 속에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경쟁자로 보고 공격하고, 헐뜯고, 짓밟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상처받은 마음을 7080세대인 부모님께 보이면, 그들은 나약한 우리를 다그치고 더욱 열심히 경쟁하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마음을 닫고 더 이상 소통을 위한 노력을 차단하고 다시 경쟁자로 가득한 전쟁터로 뛰어 들어간다. 세대 전반의 연대 없이, 혼자서는 더 이상 그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는 이런 경쟁 사회구조를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이고 숭고한 희생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이 숭고한 희생으로 각 사회 개체들이 경쟁력을 기르면, 그들은 경쟁력 있는 사회를 구성하게 되고, 이는 우리 사회를 무한한 부로 이끌어 결과적으로 경쟁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들의 한계들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주장하는 'GDP $30000'의 경제 부국이 무한한 부의 풍요로 우리를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본주의의 경쟁 구조는 기본적으로 한정된 부와 재화를 누군가가 더 많이 갖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말은 즉, 보다 풍요해지는 사회 구성원이 생기면 누군가는 그만큼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모델인 꿈의 나라 미국은 가장 잘 사는 사람이 많은 나라이면서도, 빈곤층의 생활이 가장 처참한 나라이기도 하다. 경쟁 구조에서 승자가 된 이들은 이제 그들이 경쟁에 참여할 기회조차 차단하고 있다. 끊임없이 분화되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패자가 설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패자는 '패자만의 리그'에서 끊임없이 하찮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비참하게 경쟁할 뿐이다.

이처럼 경쟁은 사회 전체의 파이를 크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경쟁은 오히려 더 심화되고 복잡화되며, 삶의 풍요를 누리는 이들의 비율은 점차 감소하게 된다. 수십 년 전세계를 커다란 경쟁의 장으로 만들었던 자본주의는 그 외에도 인간 소외, 차별, 환경 파괴와 같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 이상 경쟁을 통한 발전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은 해답이 될 수 없으며, 또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세대 내, 세대 간 소통과 대화를 통해 무한 경쟁의 악순환을 끊고 우리를 끊임없이 좀먹고 있는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눈팅을 그만 두고 로그인을 해야

일어나자. 우리의 생각을 말하자. 우리도 나름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나름의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말해야 한다. 우리가 숱한 날 눈물 흘리며 속으로 삭혀왔던 아픔들,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짓밟고 또 짓밟아야 했던 슬픔들, 그리고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들을, 이제는 말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래 어린 아이로 남아있었다. 어른들의 문제로 치부하며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유아기를 무한정 유예시킬 뿐이다. 눈팅을 그만 두고 로그인을 하자. 우리의 생각을 말하자. '어른들이나 가는 곳'에 이제 우리가 들어가서, 성인으로서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을 사회에 쏟아내자. 더욱이 우리를 직접적으로 좀먹고 있는 경쟁구조의 문제라면, 우리는 사회가 우리가 느끼는 아픔의 크기를 알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저항을 보여야 할 것이다.

네덜란드 학생들은 오후 4시까지 학교에 있을 것을 강제한다고 전국 규모의 시위를 벌이는데, 왜 16시간씩 방학도 없이 365일 학교에 있는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가. 숭고한 희생자와 같이 청소년기를 학교에 갖다 바친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는 학교 밖에 모르는 사회적 바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과거 친구, 부모라는 단어가 주던 따스한 온기를 잃어 버렸다. 우리는 한때 그들에게 삶의 동반자였고, 사회 변화를 이끌던 선구자였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친구였던 이들에게 밟고 밟히는 경쟁자가 되었고, 과거의 부모였던 이들에게 그들이 힘들게 일군 사회에 이유 없는 나약한 투정을 하는 어린 아이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어른들이 알아서 해줄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학교에 너무 오랜 시간 갇혀있어서 적성을 탐구하고 사회를 경험할 시간이 없다면, 그것을 사회에 말하고, 요구하고, 필요할 때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움직임을 조직해야 한다. 치열한 입시 경쟁 구조가 불만이라면, 그것을 해소할 해결방안을 마련해 사회에 외쳐야 한다.

대학 진학 중심의 공교육 구조를 다양화하여 각자의 적성을 탐구하고 진로를 계획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어야 하므로, 야간 학습을 폐지하고 직업 탐구를 하는 시간과, 지역 사회 내에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체험하는 시간을 늘리자고 하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사회에 말해야 한다.

우리가 소리내면, 그들은 들어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에 전할 의견을 합의하에 도출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펼치고, 수렴할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연령대별 청소년을 위한 각 사회 주제별 게시판을 갖춘 인터넷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지역과 계층에 대한 제한 없어 모든 구성원이 시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연예, 오락, 취미, 중고 거래 장터, 생활 등 흥미로운 게시판도 만들어 사이트로 청소년들을 유인하면, 보다 활발하고 다양한 의견의 공유가 가능할 것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공론화되는 의견이 생기면,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는 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또래아이들의 생각을 추가하면 우리의 생각과 요구를 가장 정직하게 반영한 의견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합의된 의견을 사회에 말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더 이상 침묵하고 기다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지, 무엇이 우리의 자유와 창의성을 좀먹게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한 마음이 되어 외쳐야 한다. 필요하다면 집단 행동도 불사함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보여주자.

우리는 그들의 딸이고, 아들이다. 또한 그들 역시 우리가 하고 있는 20대의 고뇌를 거쳤던 이들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세대 간의 대화를 시작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 우리를 환영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침묵했고, 숭고하고 또한 미련한 희생을 해왔다.

그들은 우리를 가두었지만, 또한 기꺼이 우리를 열어주고 안아줄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다. 우리의 생각을 말하고, 행동하자. 우리 다음 세대가 당신들의 짐을 덜어줄 준비가 되었음을,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새 시대의 이념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자. 일어나자, 대학생이여.


태그:#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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