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교과서나 참고서 혹은 소설책을 제외하고 내가 맨 처음 접한 사회과학 서적은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였다. 그 책을 내 품에 안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2년. 꼭 사야겠다고 작심했던 책은 아니었다. 운동보다는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에 빠져 핑크 플로이드의 '어나더 브릭 인 더 월'의 가사가 교과서 한 쪽에 실린 조지훈의 '승무'보다 더 훌륭하다고 설파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자살'이라는 금기어를 대놓고 제목으로 삼은 이 책은 내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자장면은 아이들도 먹을 수 있지만 짬뽕은 어른들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인줄 알고 연합고사를 치르고 기세도 드높게 "여기! 짬뽕이요!"라고 시켰던 나였으니, '자살'이라는 극단적 단어가 담긴 책을 품에 안기까지는 책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수십 번 고민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을 손에 넣고 싶었던 나의 또 다른 선택은 '물타기'였다. 참고서 한 권과 이외수의 소설책 한 권, 그리고 그 당시에도 비닐로 싸여져 있던 <영화 속 에로티시즘>(책 제목은 솔직히 생각나지 않지만 실비아 크리스탈의 그 멋진 가슴을 감상할 수 있는 화보가 담긴 에로티시즘 영화에 대한 책이었다. 이 책은 영화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많은 참고가 되었다. ㅎㅎ)이었다. 고백컨데, <영화 속 에로티시즘>은 <자살의 연구>라는 책을 사면서 눈길을 돌리기 위한 밑밥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책을 사들고 광화문에서 미도파 백화점(당시에는 롯데백화점 정류장을 그렇게 불렀다)에서 41번 버스를 타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마크로네시아에 속해 있는 괌이나 사이판의 석양을 최고로 치지만 당시만 해도 성산대교에서 맞이하는 석양이 최고인줄 알았고, 그 석양마저 잠시 잊은 채 읽은 책이 <자살의 연구>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교복을 갈아 입지 못한채 읽어내렸다.

충격은 대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살'에 관한 사례 연구와 심리 분석을 통해 자살을 예방하고자 하는 내용(솔직히 다시 읽기 겁난다)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뜻을 거슬러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비롯한 자살에 관한 명제는 수줍은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삼투압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그때부터인지도 모른다.

1991년 1월 27일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작은 영화잡지의 연예기자가 되었고, 지금까지 '딴따라 기자'로 남아 있다. 도끼 자루 썩는지 모르고 10년, 20년이 흘러갔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자살'이라는 단어를 내게 던진 것은 '취재원 최진실'이었다. 남의 일이 아니었고, 어쩌면 최진실이 자살에 이르는데, 미필적 무관심 혹은 방조했다는 자책감이 아직까지도 무겁게 짊어지고 있다.

1991년 1월 작은 전문지의 수습기자로 시작된 내 연예기자의 여정은 '최진실'이 출발점이었다. 데스크는 '무조건 해내라'는 식으로 '최진실 인터뷰'를 내게 던졌고, 수습 딱지를 떼기 위해선 어쨌든 성사시켜야만 했다. 당사자는 물론 매니저의 연락처를 수소문하기도 어려웠다. 선배들은 전화번호 하나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난 한 선배의 책상 속에 고이 모셔져 있던 최진실 관련 연락처를 도둑질했다. 그 덕에 난 전화 섭외에 성공을 했고, 무사히 수습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2008년 10월 2일까지 이어졌다. 최진실이 홀연히 우리 곁을 사라질 때까지….

연예기자 김대오에게 붙은 별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최진실과 술 먹고 조성민 결혼을 낙종한 기자" 그리고 "최진실이 죽기 전 함께 술먹은 기자"다.
첫 번째 사연은 당시 <미디어오늘>에 실릴 정도로 큰 낙종이었지만 나름 해명할 수 있는 사연이 있기에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최진실이 죽기 전에 함께 술 먹은 기자'는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낙인이다. 이 말 속엔 '사람이 죽을 때 너는 뭘 했느냐'는 날카로운 질책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광고 촬영장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일로 슬퍼하던 최진실을 위로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7명. 이른바 '최진실 측근들', 나를 포함한 그들 모두가 평생 짊어져야할 멍에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말이 있다. 취재원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야 한다는게 기자의 덕목이지만 20여 년간 연예기자로 살아오면서 '먼 것보다는 친한 게 낫다'는 지론이 굳어졌다. 연예기자의 속성상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리고 상업적이든 '연예인의 사생활'을 다뤄야만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좋게 해석하자면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정치부 기자들이 꺼려하는 '허리 아래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난 최진실과는 많이 친했다. 결혼 낙종을 하고 난 후 "우씨! 네가 책임진다고 기사 쓰지 말라고 해놓고, 조성민이 일본 야구 특파원들에게 풀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네가 널 다시 보면 기자, 아니 사람이 아니다!"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한 동안 안 본 적도 있다.

그래도 지난 세월 최고의 뉴스메이커이자 트러블메이커였던 최진실을 커버할 수 있는 '최진실 담당기자' 나 김대오다. 어쩌면 지금도 그 타이틀을 벗어던질 수 없기에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최진실이 하늘로 떠난 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핵심은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다. "그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줄 걸"하는 후회부터 "수면제와 우울증 약을 줄일 수 있도록 야단을 더 쳤어야 하는데"하는 후회까지, 백만 가지의 후회를 하며 살았고, 지금도 이 후회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진실이 떠나기 하루 전 그 술자리에서 했던 그 말, "오빠, 나 오드리 햅번처럼 은퇴하고 아프리카에서 봉사할까?"하는 이야기가 떠올랐고, 때늦은 일이지만 그 희망을 친구로서 대신하고 싶었다. 뜻한 곳에 길이 있다고 아프리카의 검은 심장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차드로 봉사를 떠나게 됐다. 그러나 그곳은 허무하게도 젊음을 하늘로 던진 박용하가 세우려했던 요나스쿨이었다. 박용하는 그곳에 봉사활동을 다녀오고 보름도 지나지 않아 자살을 했다. 자살한 친구의 희망을 하늘로 놓아주려고 떠난 곳이 똑같이 자살한 박용하가 희망을 사막에 심으려 했던 곳이라니!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희망을 봤다. 마을 주민들과 박용하가 세운 학교에 다니게 될 어린이들은 박용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 족장이 "박용하는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봉사를 함께 떠난 일행들은 현지 주민들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던 터라 "박용하가 죽었고 우리가 대신 왔다"고 답했다. 족장은 "너희 나라에 전쟁이 났느냐? 전염병이 돌았느냐"고 되물었다. 함께 간 일행들을 대표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자, 족장은 한참 동안 우리를 뚫어지게 보더니 "왜?"라고 간단하게 물었다. 통역을 해주던 현지 봉사단체 지부장은 "저 '왜'는 우리의 '왜'와 다르다. 여기에는 자살이 없다"고 덧붙였다. 일행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박용하가 왜 죽었는지, 최진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한참동안 사바나 들판을 응시하던 족장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너희 나라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들은 저렇게 눈이 멀고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녀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없다. 저 들판에 있는 나무를 봐라. 저 나무는 몇 해 전 번개를 맞아 가지가 잘려나갔다. 그래도 푸르게 멋지게 살아있지 않느냐? 그게 바로 생명이다."

주술을 그다지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 최진실이 힘겨워 하는 내게 삶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곳을 다녀온 후 연예기자에게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소명 하나를 지니게 되었다. 바로 '생명'이다. 가십이 넘쳐나는 연예기사이지만 행간에 담을 수만 있다면 '생명 존중'과 '자살 방지'를 담아가고 있다. 그것이 어쩌면 영원한 취재원 최진실의 영원한 담당기자 김대오의 소명이지 않을까 싶다.




태그:#최진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