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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전 11시 10분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맞은편. '기륭전자 노동자 단식 55일째 "사람을 살리자"'라는 현수막을 펼쳐든 50여 명이 모였다. '기륭문제 해결과 연행자 석방을 촉구하는 인권시민단체 기자회견' 자리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나는 무더운 날씨였다. 모인 이들은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1000일 넘는 기륭싸움, 국회는 할 일을 다하라' '한나라당은 상위 1%만의 정책 중단하고 비정규문제 해결하라' '목숨을 건 기륭노동자의 외침을 들어라! 기륭투쟁 승리!'라는 손팻말을 들고 결의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노동자들을 외면했던 미안함과 마음아픔"으로 이 자리에 섰다는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의 말에는 물기가 섞여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이는 기륭전자 조합원들도 함께 현수막을 들고 서 있었다. 박행란·최은미·오석순 조합원이었다. 기륭전자의 해고노동자들이 복직투쟁을 시작한 지 이날로 1077일. 긴 투쟁을 '끝장내겠다'는 각오로 단식을 시작한 지 55일째다. 회사 옥상에 쳐 놓은 천막 옆에는 죽음을 각오한 검은 관이 놓여 있다고 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헛헛한 약속

 

'기륭전자 비정규 여성 노동자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기륭전자 공대위)'는 지난 7월 10일 국회 한나라당 원내 대표실을 점거한 끝에 홍준표 원내대표와 만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홍 원내대표는 노사간의 성실교섭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고, 합의내용이 이행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회사는 합의서를 작성한 지 하루 만에 회사 내 정규직 상당수가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교섭할 수 없다며 성실교섭 약속을 뒤집었고, 23일 사측이 내놓은 합의서에는 기륭전자가 아닌 제 3의 회사로의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간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외쳐온 기륭전자 공대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공대위는 홍 원내대표의 약속을 떠올렸다. '언제든 다시 찾아오라'던 약속만 믿고 다시 면담을 요구하며 국회에서 농성을 벌이던 지난 3일 새벽, 5명이 연행됐다. 현재 단식중이던 조합원 두 명은 병원에서 치료중이고, 공대위 관계자 3명은 금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인권시민단체·민주노동당 "사람을 살리자"

 

보다 못한 인권시민단체와 이정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발 벗고 나섰다. 기자회견장 뒷편 국회 건물 앞에는 이정희 의원이 단식을 시작한 천막이 보였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은 "권력의 말, 정당대표의 말이 쉽게 깨지는 척박한 정당정치에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김정대 예수회 신부 또한 "원치 않는 죽음 앞에 분노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책임 있는 자들이 빨리 나서 해결하라"며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죽는 것 빼고 다 해봤다"는 최은미 기륭전자 조합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최씨는 "단식은 길어지고 동지는 죽어가고 있다"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화하려고 찾아간 것인데 무참히 연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다음은 없다"며,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이 투쟁의 희망이나 미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이해삼 민주노동당 비정규 본부장은 "민노당이 기륭투쟁에 올인하겠다"며 "이번 주 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위험한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정진우 서울제일교회 목사는 "정치권에 목매지 말고 여론전을 효과적으로 병행해야 한다"고 말하며 "홍준표 원내대표가 큰 정치적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면담 신청 문서라도 받아달라"

 

기자회견이 정리된 12시 50분쯤, 기륭전자 노조원들과 공대위는 다시 국회를 찾았다. 홍준표 의원에게 제 3차 면담을 신청하기 위해서다. 기륭전자 노조원들을 알아보는 탓에 국회 출입은 까다로웠다. 실랑이 끝에 연결된 홍 원내대표 의원실에서는 "의원총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면담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공대위는 물러서지 않고 "문서라도 받아달라"고 했다.

 

잠시 뒤 홍 원내대표를 대신해 내려온 의원실 이건용씨는 "홍 원내대표에게 보고하겠다"면서도, "당에도 공식적으로 민원 요청하라"고 권했다. 기륭 문제가 홍 원내대표에게 집중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의 표현이었다.

 

오석순 기륭전자 분회장은 "약속해놓고 안 받아 주는 건 왜인가"라고 따져 물으며 "관 놓고 55일째 단식중이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건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행란 조합원도 "죽기 전에 면담 결과를 달라"며 성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최은미씨의 소원은 '콩국수'

 

"지금부터 삶과 죽음의 기로를 눈앞에 둔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단식으로 동행한다"며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이날부터 단식을 선언한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의 천막에는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우리도 관심이 많다"며 "더워서 어쩌냐"며 이 의원을 걱정했다. 이에 이 의원은 "기륭 농성장은 더 덥다"고 말하며 "그 곳도 꼭 한 번 방문해 주시라"면서 손을 맞잡았다.

 

기륭전자 노조원들도 천막을 방문했다. 최은미 노조원은 이정희 의원을 꼭 안으며 "의원님 고생 안하게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고생하셔서 어쩌냐"며 이 의원의 단식을 걱정해줬다. 오석순 분회장도 "우리 단식이 끝나야 의원님 단식도 끝날 텐데"라고 말하며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승리하는 날 두 턱은 내야겠다"며 너스레를 떨며 웃는 이들 얼굴은 오랜 단식으로 핏기가 없었다. 양 팔은 링거주사를 꼽았던 자국으로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조합원들은 또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날 오후 3시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의 동조단식이 예정되어 있단다. 앞으로 바람을 묻자, "기륭으로 가고 싶은 거지 다른 데 못 가, 그건 대한민국에 살지 말라는 거나 똑같아"라고 말하던 박행란 조합원과 "시원한 콩국수 먹었으면 좋겠다"고 해맑게 말하던 최은미 조합원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들은 최장기 투쟁 기록을 하루하루 갈아치우고 있었다. '여성 비정규직'의 상징이 된 기륭전자 조합원들. 대한민국은 이들의 어깨 위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라는 커다란 짐을 얹었다. 이 힘든 싸움의 끝이 단식으로 하루하루 말라가는 그들처럼 아득해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장일호 기자는 <오마이뉴스> 8기 대학생 인턴기자 입니다. 


태그:#기륭전자, #비정규직, #이정희, #홍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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