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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4월 27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 전투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전투 결과가 알려지자 한양 인심은 흉흉해져 갔다. 이미 선조는 서행할 뜻을 갖고 있었다. 대전 밖에서 서성대고 있던 대신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사복시의 잡직 김응수(金應壽)가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집무하는 곳에 이르러 영상 이산해(李山海)와 귓속말을 주고받고 하며 내왕이 잦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의심을 품었다. 당시 영상 이산해가 사복시 제조를 맡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손바닥에 '입마영강문내(立馬永康門; 말을 영강문 안에 세웠다)’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좌상 류성룡에게 내 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헌부와 사간원은 영상 이산해가 나라를 어지럽힌 죄로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했으나 국왕은 듣지 않았다. 종친들은 합문 밖에서 통곡하며 한성의 방어를 포기하고 서행하려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은 더욱 분통해 하며 여러 대신과 한성의 고수를 강청했다.

27일 밤늦게까지 있었던 대신들의 어전회의에서는 한양을 떠남은 물론 멀리 요동으로까지 건너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선조도 서행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영상 이산해가 찬성의 뜻을 표시하자 국왕은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일본군의 한양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한성의 수비를 논의한 결과 우상(右相)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고 이전(李扱)을 좌위대장(左衛大將), 변언수(邊彦琇)를 우위대장, 신각(申恪)을 중위대장(中衛大將)에 삼고 상산군 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에, 칠계군(漆溪君) 윤탁연(尹卓然)을 부(副)로 삼았으며, 전판서(前判書) 김명원(金命元)을 기복(起復)하여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한강수어(漢江守禦)의 책임을 맡겼다.

경기감사(京畿監司)에 명하여 민군(民軍)에서 징발하여 천탄(淺灘)을 파내어 일본군이 한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막도록 했다.

그런데 한양성곽의 방어는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왜냐하면 한양성은 세종 때 증축되어 전체 길이가 9995보(27km)가 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평균 40척(12m 정도)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여덟 개 성문(숭례, 숙정, 흥인, 돈의, 혜화, 창의, 광희, 소덕)과 적과 싸울 수 있는 성가퀴는 4664개소로 각 성가퀴에 활을 쏘는 사수 1명, 조수 1명, 예비병 1명 등 3명씩의 군사를 배치해도 모두 1만4000명의 병력이 필요했다.

이양원은 수성대장으로 임명받았지만 한성의 방어가 막연했다. 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병조에서 초발한 군사는 4500명뿐이다. 한성은 성첩이 만이며 궁가(弓家)가 7200명으로 비록 1궁가에 1명으로 잡아도 반을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니 속히 증모해 달라.'

수성대장은 성의 백성에게 각자 자기가 있는 곳을 지키도록 하고 백성에게 명하여 집집마다 목방패(木防牌)를 내오도록 했다.

이때 외방에 있는 군사가 모여들지 않자, 한성을 뒤져서 군사를 모으려 하였으나 이미 도망하고 없었다. 또한 모여 있는 군사들도 오합지졸로 성을 넘어 도망갈 궁리만 했다.

엄히 성문을 지키며 인심을 안심시키고자 몰래 도망하여 성을 빠져나가는 자를 참수하여 군기의 본보기로 삼았다. 도원수는 백방으로 노력하려 하였으나 때가 늦었다.

또한 집집마다 갑작스럽게 방패목(防牌木)을 내오라는 일도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한양에 주둔한 군사들도 병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하급 관리와 더불어 간계를 써서 뇌물을 받고 마구 풀어주어 싸울만한 병력도 없었다.

이 무렵 일본군 제1군 장수 고니시는 이일이 상주에서 패전할 때 그 진중에 있던 왜역관 경응성(景應星)이 붙잡혔다. 그에게 히데요시의 서계와 고니시 유키나가 자신이 예조에 보내는 공문을 보냈다.

"동래에서 울산군수를 잡아 서계를 전송하였는데 이제 이르기까지 보고를 해오지 아니한다.”

조선이 강화의 뜻이 있다면 예조판서 또는 전임 선위사였던 이덕형(李德馨)을 28일에 충주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면 응당 논의하여 처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덕형 자신도 가기를 원하여 예조에 명하여 선사사(宣謝使)라는 명칭을 띠고 답서를 휴대하고 경응성을 데리고 가게 했다.

도중에서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덕형은 가지 않고 경응성에게 가서 탐지토록 지시했다.

그는 가토에게 살해되어 중로에서 행재소(行在所)로 향하게 되었다. 4월 28일 일본군의 전진을 지연시키려던 기도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국왕 선조에게 상소가 빗발치고 있었다.

"짚신은 궁중에서 금지되어 소용하는 바가 아니요, 백금(白金)은 왜적을 방어하는 물품이 아니옵니다. 패전의 급보가 긴박함을 알려오는데, 당장 그런 물건을 사드리라 하시옵니까! 어찌 전하께서는 망국의 행동을 하시옵니까!”

상소를 본 선조는 유홍(兪泓)을 불러 서행 결심을 하지 않은 양 태연히 위로하여 말했다.

"과인이 이 곳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는가. 이 짚신을 사들이라 한 것은 아군의 군수품으로 정병(征兵)에 조달하자는 것이요, 백금을 사들인 것은 난이 일어나기 전에 사들인 것으로 지금 사들였다는 말은 꾸며서 한 말들이니 경은 의심하지 마오.”

그러나 4월 28일 선조는 예전에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있었던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과 황해감사를 지냈던 최흥원(崔興源)이 각자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따랐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 도순찰사에 임명했다. 먼저 그들이 가서 백성을 위로하고 잘 다스리도록 해 서행의 차비를 갖추었다.

대간 및 대신, 종실들은 사직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다. 또 유생들도 상소를 울렸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날 대신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왕세자를 세워 인심을 동요되지 않기를 청했다. 선조는 이 청을 받아들여 둘째 왕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백관은 예를 갖추어 모여서 축하의 예를 올렸다. 또 이날 백관에 명하여 주립으로 만든 군복을 입도록 했다.

4월 29일 저녁에 신립의 충주 패보가 조선 조정에 전해졌다. 설왕설래하던 선조의 서행도 급진전되었다. 그날 밤으로 선조는 동상(東廂)에 나가 서행의 계를 의결했다. 대신들은 어쩔 수 없어 반대하지 않았다.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는 거처를 평양으로 옮겨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후일을 도모하시옵소서.”

그런데 장령 권협 등이 임금 뵙기를 청하더니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아뢰었다.

"바라옵건대 한성을 끝까지 지켜야 하옵나이다."

그때 유성룡이 말했다.

"아무리 위급한 순간이라도 군신간의 예의가 이럴 수는 없소. 할 말이 있다면 물러가 장계를 올리시오.”

그러나 권협은 물러서지 않고 아뢰었다.

"좌상께서 이럴 줄은 몰랐소이다. 한양을 버리는 게 옳은 일이나이까?"

다시 류성룡이 다그쳐 말했다.

"권협의 말은 진실로 충성스러우나, 단 사세가 부득불 그렇지 못하오이다."

류성룡은 이어 말했다.

"왕자들을 여러 지방에 파견해 호소하여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시고 세자는 전하의 행차를 따르도록 하시옵소서!"

이에 선조도 응해 명을 내렸다.

이에 장자(長子) 임해군(臨海君)에 명하여 함경도로 김귀영(金貴榮) 윤탁연(尹卓然)을 따라 가게 했다.

셋째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그 아들 전승지(前承旨) 황혁(黃赫), 동지 이기를 따르도록 하였다. 황혁을 따르게 한 것은 그의 딸이 순화군(順和君)의 부인이었던 때문이다. 또 이기는 강원도 원주에 살았던 까닭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강원도에 이르러 신병(身病)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이 강원도로 들어오자 순화군도 북으로 향하여 임해군과 동행했다. 김귀영, 황정욱에 명하여 협동해서 호행토록 하였다.

국왕이 서행하기에 앞서 좌상 유성룡이 도체찰사로서 아직 나아가지 않은 채, 일본군이 다가오자 선조는 한성에 머물러 지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은 동료인 노직(盧稷)에게 말했다.

"어가를 떠나기로 한 명이 떨어졌고, 궐내는 이미 비어 있어서 성을 나서면 따르는 자들이 반드시 적을 것이다. 만약 서행이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면 변방에 이르러 강 하나를 끼고 명나라와 접할 것이오.

명나라를 잘 요리해서 일 처리를 할 대신은 지금 조정에서는 류성룡 만한 사람이 없소이다. 임금이 성을 나간다면 도성은 반드시 지킬 수 없을 것이니, 류상(柳相)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패적지신(敗績之臣)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왕을 호위를 한다면 반드시 이익 됨이 많을 것이오.”

승정원 노직은 바로 선조에게 계청하여 허락을 받아내었다.

류성룡 대신 이양원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서 수도방어에 총책임을 맡겼다. 앞서 이양원은 수성대장(守城大將)의 직임을 받았으나 곧 유도대장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선조의 서행이 결정되자 궐 안의 벼술아치의 종들이 소란을 부리며 퇴출하더니 조금 있다가 대궐을 지키던 장정(衛士)들도 모두 흩어지고 시각을 알리던 북소리도 단절되었다.

밤이 깊어 순변사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다.

"왜적이 금명간에 한양에 다다를 것입니다."

장계가 들어오고 시간이 좀 지나서 선조는 사관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版)을 받들고 앞장 서 가도록 했다.

선조는 전투 복장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 나섰으며, 왕세자 광해군은 왕의 뒤를 따랐고, 왕자 신성군(信城君) 후(珝)와 정원군(定遠君) 부가 세자의 뒤를 따라 돈의문을 나와 한성을 떠났다. 왕비는 교자를 타고 인화문을 나섰고 시녀 수십 명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달이 없는 밤인데다가 비가 내려 더욱 캄캄하여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오직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길을 인도하자 왕비는 그의 이름을 물으며 위로했다.

궁을 떠날 때에 종묘각실의 인보(印寶) 외에 의장(儀裝)은 모두 버려두고 나왔으며, 문소전(文昭殿) 위판(位版)은 수관(守官)이 매치(埋置)하고 도주했다.

일행이 사현(沙峴; 지금의 홍제동 부근)에 이르렀는데 날이 밝아왔다. 그들은 머리를 돌려 성중을 바라보다 남대문 내의 큰 창고에 불이 일어나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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