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부평삼변의 맏형 변영만은 성균관에서 수학 후 190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했다. 1889년생이니 그의 나이 17세 무렵이다. 법관양성소는 나라의 사법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법부(法部)직할 교육기관이다. 법관양성소는 입소 나이를 제한하고 있다. 20세 미만과 35세 이상은 들어오지 못하게 세칙으로 정해 놨다.

▲ 그 무렵 법관양성소 입학허가증(1903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17살인 그가 어떻게 법관양성소에 입학할 수 있었는가. 전해지는 말로는 나이를 속였다고 한다. 주민등록 관리가 허술했던지 아니면 모종의 보이지 않는 손, 즉 '빽'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한다. 다만 그가 나이를 부풀렸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후일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일제가 그의 반일활동 일거수일투족을 적어 총독부로 보고한 정보보고서에는 본래 나이보다 많게 기재돼 있었다. 이는 법관양성소 입학 나이를 20세로 계산했을 때 가능한 나이다.

어린 나이에 그는 한문작문, 국문작문, 조선역사 및 지지대요(地誌大要, 지리) 등의 입학시험을 거쳐 법관양성소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도 주눅 들기는커녕 재기를 발휘해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의 천재'라고 불릴 만 했다.

어린 나이 불구하고 법관양성소 하계시험서 102명 중 3등

1905년 7월에 치른 여름시험 성적을 보면 평균 93점으로 102명 중 공동 3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입학하자마자 치른 시험으로 추론된다. 변영만은 그해 12월에 졸업시험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법관양성소 교육과정은 6개월이었다. 따라서 역산하면 7월 시험은 입학 직후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 법관양성소 졸업시험 성적표. 변영만은 8등으로 졸업했다.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법관양성소에서 그는 후일 그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칠만한 사건을 접한다. 이 해는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돼 11월 18일 발표됐다. 당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의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시키며 찬성, 소위 을사오적이 된다.

이에 수많은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궁내부특진관 조병세, 판돈녕사사 조병식, 군부협판 이한영, 규장각학사 이용태, 정이품 박기양, 정삼품 안종화 등이다. 이들 중에는 법관양성소 교관 정명섭도 끼어 있었는데, 상소는 '조약(당시표현은 한일협상조약) 무효화와 매국적신의 처벌'을 요구한 강도 높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명섭은 1895년 사립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근대 법률제도 도입된 초기부터 법조계에서만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재판소 주사, 판임관, 검사, 법관양성소 교수·교관 등을 역임했다. 수많은 대신들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골지고 뚝심 있는 교관이었다.

스승 정명섭, 을사늑약 매국적신 처벌 상소올린 강골

이런 그가 어린 변영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분명한 것은 교관과 학생 모두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이를 뒷받침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법관양성소 학생들은 더 이상 학문을 해나갈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대부분 학교에 나오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법관양성소는 기능이 유명무실해지자 급히 학생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법관양성소 이면우 소장이 법무대신에게 보고한 자료를 보면 당시의 절박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나라의 진흥이 인재양성에 있고 인재양성은 학교확장에 있는바 본 소는 이미 법률전문학교로 중요한 곳입니다.(중략)조약체결이후~ 네 개 반 70여명의 학생이 대부분 돌아갔고 남아 있는 자가 불과 수십 명이오니~ 이들을 불러서 공부하게 해야 합니다(후략)"

학생들이 왜 학교를 등지고 가버렸을까. 일제의 공작이 있었을까 아니면 학생들 스스로 앞날을 불투명하게 여겨 등진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을사늑약에 대한 저항의 표시를 분명히 한 것인가.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특히 일제가 탄압해서 수많은 인원이 법관양성소를 등지고 떠났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불과 반년(우등일 경우 3개월)이면 사법관리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눈앞에 두고 쉽게 박차고 나오기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동은 일종의 집단 저항이었던 것으로 귀결된다. 예비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을까 판단해 볼 수 있다.

이런 학풍과 반일사상을 뚜렷한 교관 아래서 17세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변영로는 분명히 반일, 항일, 배일 정신을 받아들여 싹틔웠을 것이다. 이는 그가 1907~1909년 사이에 발표한 10여 편의 애국계몽적 논설과 2권의 제국주의 비판서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법관양성소의 6개월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12월 졸업시험에서도 그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 당당하게 전체 8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는 법관양성소의 4회 졸업생이 된다.

국권을 모조리 빼앗긴 을사늑약의 해 1905년, 법관양성소에서 변영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권을 앞세운 열강의 침탈 속에 격동하는 대한제국처럼, 그 역시 수많은 날을 고뇌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허상을 벗겨낼 날 선 칼을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법관양성소

우리나라의 근대법학 교육기관의 효시다. 1895년에 조선조 고종이 반포한 칙령 49호인 '법관양성소 규정'에 따라 설치됐다. 기존 전통 법학과는 사뭇 다른 서구 법학을 수용, 전문적인 근대 법학 교육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사법제도는 같은 해 공포·시행된 ‘재판소구성법’에 의해 행정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사법부 독립의 기틀이 마련된다. 법관양성소는 이 제도와 맞물려 근대 사법 제도의 서막을 열었다.

법관 양성소는 법학 통론을 비롯, 민법, 상법, 형법, 소송법, 국제법 등의 과목으로 1895년 5월 17일 첫 강의를 시작한다. 법관양성소의 개관은 사립학교에서 전문법학 교육을 강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국립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는 뒤에 법령에 의하여 1909년에 법학교, 1911년에 경성전수학교, 1922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 1926년에 경성제대법문학부가 개설되어 기존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병존하다가 8.15 광복 후인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승계 발전되어 오늘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이어졌다.
-서울대법대 동창회자료 발췌

덧붙이는 글 | 당분간 산강재 변영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