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래는 어떤 식으로든 그 노래를 탄생시킨 사회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괴로움이 노래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 중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과 고귀함이 동시에 치열하게 발현되는 공간은 바로 전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기획을 통해서 노래를 통해서 전쟁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따끔한 질책과 반론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말]
"사발 그릇 깨어지면 두세 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 한 덩어리 된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 주오."

대략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어느 시기, 강원도 정선지방의 누군가가 처음 부르기 시작한 이 노래는 6000여 수에 이른다는 아리랑 중 한 곡입니다. 사실 아리랑의 노랫말이 6000가지나 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긴 세월을 구전으로 전해오면서도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 왔다는 사실은 아리랑이 단순한 민요 이상의 그 무엇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30년 넘게 아리랑을 연구해 온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연갑 선생은 "그렇게도 많은 한문으로 지어진 이 땅의 문집(文集)·지지(地誌)·족보(族譜) 어디에도 단 한 줄도 기록해 놓지 않은 것을 순전히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슴과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온 민중의 참말(眞言)"이라고 아리랑을 설명했습니다.

30년 넘게 아리랑 연구에만 매달려 온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아리랑과 한국전쟁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30년 넘게 아리랑 연구에만 매달려 온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아리랑과 한국전쟁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 김도균

관련사진보기


한민족 뿌리내린 곳마다 불렸던 아리랑

사랑가, 저항가, 때로는 고단한 노동을 위로하는 노동요이기도 했던 아리랑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중앙아시아와 남미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이 뿌리를 내린 곳이라면 어디서든 불리어진 노래입니다. 징용으로 끌려갔던 일본과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강제이주 끝에 짐을 풀어 놓았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황량한 벌판에서 동포들은 아리랑을 부르면서 고단한 삶을 달랬습니다.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한 것이 아리랑의 숙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노래는 국경과 민족을 넘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70년 전 위안부로 끌려왔던 어느 조선 처녀로부터 배웠다는 아리랑을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흥얼거리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열아홉의 나이로 한국전에서 싸웠던 어느 터키 참전용사의 기억 속에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구슬픈 선율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조인식.
▲ 정전협정 조인식 1953년 7월 27일 오전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조인식.
ⓒ wikimedia

관련사진보기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전 세계의 시선은 판문점으로 쏠려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후 3년 1개월, 날수로는 1129일 동안 지속된 전쟁을 중단하는 정전협정을 맺기에 이른 것이죠. 다음날 나온 <경향신문> 1면은 협정 서명식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3개 국어별로 인쇄된 휴전협정 조문 각 3통씩, 총 9통의 협정문서에 공산 측 대표 남일이 먼저 탁상에 준비된 펜을 들어 서명하였다. 이어 해리슨 중장의 서명이 있었다. 정전구획선을 획정한 지도를 건네면서 판문점에서의 조인은 12분 만에 끝났다. 말없이 서명을 마친 양측 대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각기 동·서 양쪽 출구로 나갔다."

정전협정 조인식에서 양측 군악대가 연주했던 곡은?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악수도, 눈인사도 없이 헤어진 양측 대표단이 각자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서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순간, 양측의 군악대가 연주한 곡은 바로 '아리랑'이었습니다. 사전에 어떠한 약속도 없었지만 그 중요하고 엄숙한 순간, 양측 모두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사실은 아리랑이 민족 전체의 노래임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까지 벌인 두 나라가 아리랑을 연주하는 모습은 아리랑이 사상과 이념을 아우르고 화해와 안식을 부르는 음악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정전협정 체결에 따라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진행된 포로교환 현장에서도 '아리랑'은 양측 군악대의 단골 연주곡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전쟁기간 중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귀순을 유도하는 선무용으로 쓰였던 것이죠. 이른바 소리로 만들어진 총탄이란 뜻의 '음탄(音彈)'이었습니다. 민족의 비극과 함께했던 아리랑의 슬픈 운명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소리로 만들어진 총탄이란 뜻의 '음탄(音彈)... 심리전 활용도

김연갑 선생이 발굴한 1951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백%' 기사입니다.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김 선생은 "죽음을 목전에 둔 전쟁터에서 이런 가슴 시린 아리랑은 필시 적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총탄의 기능을 했음직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상대편에게도 적용됐습니다. 중국 측에서 펴낸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에 실린 중국군 군가 '빨지산아리랑'은 밀양아리랑의 곡조에 '백두산봉우리에 공화국깃발 날리고 제주도한라산에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는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민족의 지치고 아픈 마음을 달래 주었던 아리랑이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전쟁의 논리 앞에 무기가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씁쓸해지는 대목입니다.

민족과 국경을 넘은 아리랑

그런데 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은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20여 개국에 달하는 이국의 참전 병사들에게 아리랑은 '코리아'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은 이 땅의 민중들이 흥얼거리는 아리랑을 들었고, 그들 부대에 배속되어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던 한국 병사들에게 이 노래를 배웠습니다. 또 유엔군 병사들이 귀국 기념품으로 사갔던 스카프에는 '지옥으로부터의 귀환(Returned from Hell)'이라는 문구 외에 우리 민요 아리랑의 악보와 가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서로 친해졌다. 언어소통도 어느 정도 해결되니 자연히 서로 대화가 쉬워졌다. 한 친구는 나에게 군에 오기 전 무얼 했느냐고 물어서 티쳐(Teacher)라고 했더니 무엇을 가르쳤냐고 물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특히 음악을 많이 가르쳤다'고 했더니 한국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애국가를 가르쳐 봤더니 어렵다고 해서 아리랑을 불렀더니 아주 흥미를 가지고 따라 부르더니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부르며 미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리랑만 부르면 흥이 났다. 그리스 군인도 우리와 같이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도 아리랑을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불렀다." (미 제 3사단 15연대 정찰소대에 배속됐던 김시한 선생의 회고)

급기야 아리랑은 미 제 7보병사단의 공식 사단가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 7사단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부대는 1945년 9월 한국점령군의 일원으로 인천을 통해 들어와 3년 동안 주둔했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 미군부대로 잔류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 7사단은 인천 상륙작전의 주력부대 중 하나로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되죠.

서울 수복에 일익을 담당했던 이 부대는 1950년 10월 28일 함경남도 이원에 상륙, 산수와 갑산을 지나 혜산진까지 진출합니다. 미 7사단은 압록강까지 도달했던 유일한 미군 부대였지만,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군의 1차 공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사단의 잔존병력은 그 해 12월 20일 흥남에서 부산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아리랑이 미 7사단의 공식행진곡이 된 사연

전쟁이 끝나고 1956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 이임 인사차 경무대를 방문했던 W. 캘러웨이 7사단장에게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전통 자수 방식으로 아리랑 악보와 가사를 수놓은 페넌트를 선물하는데요, 이렇게 미 7사단에 전달된 아리랑은 일반명령 63호로 그 해 5월 26일부터 공식 행진곡(Official marching song)이 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미군은 아리랑의 선율에 이전 사단가로 사용되던 '대검가'(Bayonet)의 가사를 그대로 이식했다는 점입니다. 미 7사단의 별칭이 바로 '대검 사단'(the Bayonet)이었는데, "너의 대검을 높이 들어라"로 시작되는 대검가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원곡의 정서와는 사뭇 달라졌습니다만, 사단의 주요 행사 때마다 늘 연주되었습니다.

미 7사단이 1956년부터 공식 행진곡으로 사용한 아리랑의 악보.
▲ 미 7사단 아리랑 악보 미 7사단이 1956년부터 공식 행진곡으로 사용한 아리랑의 악보.
ⓒ 미 육군 제 7사단

관련사진보기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은 주한미군 감축계획에 따라 1971년 3월 본토로 철수하게 됩니다. 1971년 3월 27일자 <매일경제>는 미 7사단의 철수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날 고별식은 30명의 의장대가 사열, 미 7사단의 사단가가 아리랑 곡조로 불려지는 가운데 대검이 그려진 사단기가 내려짐으로써 끝나고 사단장 '무어' 소장과 사단기는 이날 하오 김포공항을 출발 미 본국으로 떠났다."
(여담입니다만, 이 기사에 나오는 '무어' 소장은 헐리우드 영화 '위 워 솔져스'에서 멜 깁슨이 연기했던 할 무어 중령과 동일인입니다.)

지난 2007년 미 육군 합창단이 발표한 'Songs of the Soldiers'에는 우리말로 부르는 아리랑이 포함되어 있다.
▲ 아리랑이 수록된 미 육군 합창단 앨범 지난 2007년 미 육군 합창단이 발표한 'Songs of the Soldiers'에는 우리말로 부르는 아리랑이 포함되어 있다.
ⓒ 김도균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콜로라도주 포트 카슨에 전투 병력은 없는 행정부대로만 존재하는 미 7사단 측에 여러 차례 이메일을 통해 '대검가' 음원을 부탁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부대 해체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만 할 뿐입니다. 대신 지난 2007년 미 육군 합창단(U.S. Army Chorus)이 낸 '군인의 노래들'(Songs of the Soldier)에 수록된 아리랑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 병사가 부르는 아리랑을 한 번 감상해 보시죠.

아디동 블루스를 아시나요?

전쟁 기간 중 위문공연을 위해 한국을 찾았던 뮤지션들도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데 한 몫을 톡톡히 했습니다. 특히 재즈계의 전설 오스카 페티포드(1922~1960)의 역할이 컸습니다. 1951년 10월초 일본 위문공연을 마치고 잠시 인천에 기착했던 그는 우연히 아리랑을 접하고 직접 편곡, 연주해 재즈 전문 레이블인 '로열 루츠(ROYAL ROOST)'사를 통해 1952년 SP 음반으로 발매했습니다. 그런데 아리랑을 세계화한 첫 재즈 작품이라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곡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아리랑(Arirang) 블루스'가 아닌 '아디동(Ahdeedong) 블루스'였습니다.



그 사연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페티포드가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인천에 머물렀던 시간은 겨우 한 시간 남짓이었는데, 화장실을 쓰던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한국인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는 아리랑을 듣고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볼일을 마치고 나온 페티포드는 자신이 들은 멜로디에 대해 통역병에게 물었고, "아무 때나 부르는 한국의 민요"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결정적으로 '아리랑'을 '아디동'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죠.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아디동 블루스'가 탄생을 했는데요, 이 음반작업에는 첼로의 페티포드, 베이스의 찰스 밍거스, 드럼의 스미스, 피아노의 테일러 등 일류 연주가들이 참여해 지금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고전적 재즈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피트 시거,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승화시키다

아리랑의 가장 극적인 변용은 바로 현대 포크 음악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는 피트 시거(1919~)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포크송 그룹인 '위버스'를 결성해서 현대 민요를 융성시켰던 피트 시거는 1964년 아리랑을 그 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발표했는데,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했던 그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싱어 송 라이터였던 피트 시거는 벤조(Banjo) 반주로 아리랑을 부르기 전에 자신의 코멘트를 음반에 수록했습니다.



"한국인이 부르는 노래 중에 '아리랑'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러온 노래지만, 일본 식민지 시기에는 부르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내 생각엔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하고 서로 나뉘어 살고 있지만, 두 나라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아리랑을 알지 못했을 지도 모를 피트 시거의 코멘트는 정말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피트 시거의 아리랑에 대해 김연갑 선생은 "전쟁을 통해서 이 땅을 떠나갔던 아리랑이 반전(反戰)이라는 최고의 가치로 승화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은 또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또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이 수많은 아리랑을 아리랑이게끔 하는 정신은 "저항(抵抗)과 대동(大同), 상생(相生)의 가치"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는 이런 보편적 정신이 바로 아리랑을 우리 민족뿐 아니라 세계인의 아리랑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 선생은 지난 1990년 남북이 아리랑을 단일팀 단가로 합의했던 사실을 들어 "민족 정서와 민족의 핏줄이 이어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전쟁 중 '음탄'이었던 아리랑이 평화와 통일의 전주곡으로 변화해 온 것은 희망의 증거라는 것이지요. 정전협정 체결 60년, 남과 북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가 바로 '아리랑의 힘'이라는 김 선생의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및 자료
김연갑(1988). 아리랑 그 맛, 멋, 그리고···. 서울: 집문당.
김연갑(1994). 팔도아리랑 기행 1. 서울: 집문당.
박양호(2010). 한국전쟁과 시, 군가, 삐라. 서울: 도서출판 화남.
양희원(1988). 군대문화의 뿌리. 서울: 도서출판 한원(1988).
7th Infantry Division (United States). Retrieved July 27, 2013, from http://en.wikipedia.org/wiki/7th_Infantry_Division_(United_States).



태그:#아리랑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