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압록강을 건너는 정화

신의주에 내린 정화는 다시 세창 양복점을 찾아갔다. 국내 진입보다 국내에서 빠져나갈 때가 더 위험하다고 했다. 이세창 씨는 무사히 돌아온 정화를 환한 웃음으로 반겨 주었다. 이세창씨는 다시 정화 걱정을 하며 강을 건널 방도를 골똘히 생각했다. 압록강 철교는 검문 검색이 철저하여 건널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밤을 이용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세창 씨는 정화를 극진히 대접했다. 두 번째 만난 그는 누이동생 대하듯 정감이 넘치고 자상했다. 그의 태도에는 사랑과 동시에 경하가 있었다. 그는 정화를 이제 대단한 독립투사처럼 대우했다. 정화는 그런 대접을 받는 자신이 쑥스러웠다.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이세창 씨 같은 사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군자금을 예상보다 적게 걷었다고 말하며 허리에서 전대를 풀었다.

“별 걸 다 개지고 걱정하누나. 뜻대로만 될 거이면 당초에 왜 나라가 망가뜨려졌갔어? 맘 놓으라요. 그만한 것도 대단한 거야요.”

그들은 밤이 되자 압록강 하류 방향으로 갔다. 강변에 이른 그들은 신발을 벗어 들고 삼십 리 강변길을 반대로 거슬러 걸었다. 바닥은 진흙 아니면 자갈이었다. 정화는 김영세를 이따금씩 떠올렸다. 그러다가 미끄러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길이었다. 그녀는 이세창 씨의 꽁무니를 바짝 따라 붙었다. 숨이 차고 힘겨웠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말없이 걸었다. 안전을 위해서인지 이세창 씨도 한 마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세 시간쯤 걸었을 때, 이세창 씨가 준비시켜 놓은 거룻배 하나가 어둠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창 씨는 다사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고 강 건너 최석순의 집에까지 그녀를 데려다 주려고 했다. 정화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히 미안하기도 했다.

“이제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습니다.”
“잠자코 있으라. 자 가자우요.”

정화는 강물 소리가 그렇게 사람을 공포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인지를 처음 알았다. 어둠 속 어디선가 일본 경찰이 배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물소리가 크게 날 때마다 어깨와 발을 움츠렸다. 그러나 물소리는 좌우편에서 불쑥불쑥 일었다. 그녀는 뒷덜미가 서늘하고 딱딱하게 굳어질 정도로 무서움을 느꼈다.

배가 압록강 대안에 닿았을 때, 그녀는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이세창이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체면을 분별할 기운도 없어 이세창에게 몸을 기댔다. 만약 이세창이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최석순의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석순 내외는 새벽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그들은 대견해 하며 기뻐했다. 정화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다음 날 이세창을 보낼 때에도 그녀는 눈물을 머금었다. 그녀는 최석순의 집에서 이틀간 머물렀다가 상해 행  배를 탔다.

며칠 후 예관 신규식은 전대를 풀어 놓는 정화에게 극진한 경의를 표했다. 시아버지는 군자금에 앞서 살아서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남편은 놀라운 일을 만났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녀를 보았다.

김영세의 시국관

정화를 떠나보낸 김영세는 서울로 올라와 책을 보며 겨울을 보냈다. 그는 한국의 개화· 계몽주의자들을 연구하느라고 긴 겨울을 다 써 버렸다. 이듬 해 그는 어느 잡지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동아일보에 입사한 조카 김문수에게 말했다.

“조선이 망한 것에는 개화· 계몽주의자들의 책임이 제일 크다. 그들의 과오는 친일파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친일파들은 백성들이 배척하므로 오히려 그들의 영향력은 적지만 개화· 계몽주의자들은 다수 백성의 지지 내지는 존경을 받아 오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선의 역사를 움직일 수가 있었다. 결국 조선은 망했다. 그런데 무서운 점은 망한 지금도 그런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네가 언론인이 되었으니 그런 것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문사가 되기를 바란다.”

김문수는 삼촌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나중에 내 글이 완성되면 보아라.”
“알겠습니다.”

“나를 독선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내가 얻어가고 있는 결론은 네 상상을 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말씀해 주시지요.”
“개화· 계몽주의는 구한말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라가 망한 직접적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제국주의의 침략 때문이다. 동의하지?”
“그렇습니다. 선비가 길을 가다가 강도에게 몽둥이로 맞아 다쳤는데 그것이 선비 탓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맞는 말이다. 그런데 개화· 계몽주의자들은 우리 조상이 못나서 망한 거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 물론 국력이 쇠약해져서 망한 것인데, 국력 쇠약의 이유는 내부적인 데에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쇠약하게 만든 자들이 바로 개화· 계몽주의자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기들이 나라를 기울게 해 놓고 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꼴이란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나중에 내 글을 읽어 보아라.”
“알겠습니다.”

“나는 국력 쇠퇴의 책임을 일부 실학파에서부터 찾을 수 있었다. 다산을 비롯해서....”
“정약용 말씀입니까?”
“그렇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삼촌.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나중에 내 글을 읽으면 안다.”
“알겠습니다.”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알고 있지?”
“압니다.”
“그의 역사관이 조선적이었을까?”
“아니라는 근거도 되겠군요.”
“청나라에서 조선에 파견하는 사신을 칙사라 불렀다.”

김영세는 칙사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칙사들은 대포, 시계, 망원경, 천체학, 기하학을 조선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한 편으로 전해 준 것이 가톨릭이었다. 종교와 문화는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다산이 서양 문물을 먼저 섭취하여 천주교 신자가 된 건지 아니면 천주교 신자가 되고 나서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다산은 서양 과학에 남다른 흥미와 소질을 보인 소장 관료였다. 그가 천주교를 만난 것은 벼슬길에 오르는 시점과 거의 같았다.

다산은 유용한 인물이었을까?

“나는 다산이 개화· 계몽주의자의 시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해야 한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김영세는 다산은 서양 과학 기술의 합리성에 도취되면서 문명진화론으로 빠져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조선의 사회 제도나 역사, 풍습, 풍속 등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문면진화론에 빠진 그는 풍습과 풍속 같은 것도 개혁을 통해 혁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때 다산은 20대의 청년이었다. 이런 그를 가상하게 본 것은 당대의 왕 정조였다. 다산보다 열 살 많았던 정조는 다산 이상의 교양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과학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인식도 다산에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산에게 수원성 축조를 맡긴 것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응용한 건축술은 2년 7개월 만에 아름답고 단단한 수원성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산은 더욱 서양 과학을 신봉하게 되었고 그것을 응용하는 데 성공한 자기 자신에게 자족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는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국왕이 직접 관장한 공사치고 공기가 단축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으며 정작 그 수원성이 지리상 쓸모가 별로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의욕적으로 일했던 그가 나중에 유배 가서는 ‘조선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며 조선을 총체적으로 부인하게 된다. 유배 중 역저라고 알려져 있는 <경세유표>의 집필 동기를 보면, ‘묵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라고 되어 있다.

김영세는 다산에 대한 평가를 계속 이어 갔다.

“이런 주장은 ‘우리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본다. 다산은 중국 고전과 경학과 경세학 분야는 많은 독서를 했겠지만 정작 조선의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황사영백서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황사영 사건이란 신유박해 당시 충청도 산중에 숨어 있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하얀 비단에 비밀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는 북경에 머물고 있는 천주교 실력자인 포르투칼 구베어에게 보내려 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 부흥을 위해 재정 원조를 요구하면서, 조선을 개교(改敎)시키려면 대포와 선박 1,000척, 병사 5, 6만을 가지고 위협하면 된다고 했다.

“자고로 매국노라는 자들은 꼭 외국에 돈을 비밀로 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날카로운 발견이십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래도 다산은 선의의 계몽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나쁜 우리 것이 좋은 서양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에게는 덜 나쁘다’는 역사의식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떻든 그는 작금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민족개조론의 원조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과는 시차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순조와 철종 시대가 있었잖습니까? 따라서 다산의 서구 취향이 오늘에까지 이어졌다는 말씀은 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중간에 김옥균이라는 사람이 있다.”

김영세는 내친 김에 김옥균 이야기를 문수에게 들려주었다.(계속)

덧붙이는 글 | 묻혀진 식민지 역사를 발굴하여 재현하고, 왜곡된 역사 해석을 바로잡으며, 극일에 성공한 인물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림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다산정약용, #황사영백서사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