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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진이나 갈까?"
"왜요?"
"자네도 이제 출근하려면 며칠 안 남았는데, 새로운 마음가짐도 할 겸, 다산초당이나 한 번 다녀오세."

한 해의 절반이 끝나갈 무렵 셋째인 막내를 키우느라 고생했다며 남편이 내게 건넨 말이다. 직장에서의 20개월간의 공백을 메우려면 마음을 뭔가로 채워야 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고, 편하게 코에 바람도 넣을 수 있는 여행이다 싶어 수락했다.

'남도답사 1번지'라 불리는 강진. 관광안내도가 눈에 띈다. 무위사, 영랑생가, 다산초당,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고려청자도요지, 마량미항, 한정식, 된장, 쌀, 파프리카, 토하젓, 맥우가 대표주자로 안내도에 나와 있다.
▲ 강진군관광안내도 '남도답사 1번지'라 불리는 강진. 관광안내도가 눈에 띈다. 무위사, 영랑생가, 다산초당,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고려청자도요지, 마량미항, 한정식, 된장, 쌀, 파프리카, 토하젓, 맥우가 대표주자로 안내도에 나와 있다.
ⓒ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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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9일 닿은 강진. '남도답사 1번지'라 불리는 곳의 관광안내도가 눈에 들어왔다. 무위사·영랑생가·다산초당·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고려청자도요지·마량미항·한정식·된장·쌀·파프리카·토하젓·맥우가 대표주자로 안내도에 나와 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두충나무 길이 있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처럼 정겹다. 잠시 걷다 보니 나뭇가지에 '정약용 남도 유배길, 문화생태탐방로'라고 매달린 리본이 눈에 들어온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두충나무 길이 있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처럼 정겹다.
▲ 두충나무 길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두충나무 길이 있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처럼 정겹다.
ⓒ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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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즐겨하라

튼실한 닭이 길가 옆에 여러 마리가 퍼덕거린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골집 마당이 저희 집이라며 퍼덕거린다. 황토집이다.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지나간다. 그 뒤에 챙모자와 편한 옷차림을 하신 분이 전통찻집으로 들어가신다. 왠지 시골 분은 아닌 듯하다. 전 강진군수로 찻집과 민박집의 주인이셨다. 다산의 18번째 제자 중 막내분이 고조할아버지라며 <삶따라 자취따라 다산 정약용>이라는 책을 집필하신 저자 윤동환이다.

책에 대한 얘기도 들을 겸 잠시 머물렀다. 덥다며 바닥에 호스로 물을 뿌리려다가 더위에 지친 아들과 큰딸의 손에 시원하게 물을 뿌린 후, 다산에 대한 5분여 간의 설명을 곁들여주셨다. 

"네가 올 줄 알고 정약용 선생님이 기록을 다 해놨어. 첫 번째 올라가면 마당 앞에 이렇게 평평한 바윗돌이 있어. 차 끓이는 부뚜막. 다조가 차 끓여 드시던 곳인데, 설명을 해놨어. '다조는 연못가 초당 앞에 있도다.' 그 다음에 다조에 관한 시. 그렇게 찾아가시고. '약천은 다산초당 모퉁이에 있다.' 또 약천에 관한 시. '다산의 서쪽에 돌병풍이 창연하여 정석 두 글자 새겨놨다, 그렇게 이름 하지 않았으면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비록 하늘이 가리어 이름을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은 뭔 말이냐면. 유배를 당했기 때문에. '그러나 언젠가 빼어날 인물이 날 수 있다 하겠다. 마지막에 이름이 주어지되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님은 이름이 없는 거와 같다.'

그 다음에 또 이렇게 시를 썼어. '연못은 앞바다 거닐다가 아름다운 돌 연못가에 주워났다.' 연못도 다산 사경 중 하나인데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놀랍게 다산께서 위치·형상을 기록해놨기 때문에 이렇게 네가 오늘 왔거든.

이렇게 기록하기를 좋아해. 어느 날 다산초당에 찾아와 안부를 묻기를 '금년에 선생이 거처한 실학의 집대성지인 동암 지붕은 이었느냐?' '이었습니다'라는 대답까지 받아서 썼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없겠지? 그러나 너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연못 속에 잉어 두 마리를 키웠는데 얼마만큼 자랐더냐. 두 자만큼. 잉어가 60센티미터 만큼이나 컸습니다. 이런 식으로 너의 대답, 숨소리까지 다산은 전부 받아서 기록을 해놨어. 

당부 말씀이 '이렇게 기록하기를 좋아해라.' 다시 한 번 너에게 강조할게. 다산은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습관처럼 본능처럼 기록을 해라.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기록해라.' 집에 가면 이 두 마디를 써놓도록 해.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해라'라는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

2013년 모월 모일. 다산초당 방문 기념이라 써놓고 두 마디만 지키면 너희 동네 구청장 이상 인물이 될 수 있어. 왜 그러냐? 아저씨는 평생 두 마디를 지켰더니 강진군수가 되더라. 그러니까 너도 두 마디를 자~알 지켜봐.

그다음 한 가지. 다산이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강진에 유배를 당한 추운 겨울날. 뭐라했냐? '장작불을 피워서 너희 어머니 방이 따뜻한가 차가운가 새벽녘이나 늦은 밤에 어머님 이부자리 밑에 손을 넣어서 어루만져봐라. 만져봐서 너희들이 몸소 불을 때드려야 할 것이며 이런 일은 종들을 시켜서는 안 되고 너희들이 해야 되느니라.' 자식들이 저절로 효심이 나오겠지. 바로 이렇게 해서 '너희들이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어준다면 나는 유배지 강진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지상의 뿌리가 돼 눕는다

그분의 말을 듣고 다산초당에 가는 길이 낯설지 않았다. 오르막이라 유모차를 길가에 세워 놓았다. 막내도 정약용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아빠의 품에 안겨 계단을 올랐다. 잠시 후 계단 대신 나무의 굵직한 뿌리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옆에 나무 안내판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정호승의 '뿌리의 길'이다.

계단 대신 나무의 굵직한 뿌리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옆에 나무 안내판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정호승의 ‘뿌리의 길’이다.
▲ 정호승님의 '뿌리의 길' 계단 대신 나무의 굵직한 뿌리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옆에 나무 안내판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정호승의 ‘뿌리의 길’이다.
ⓒ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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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라니, 참 멋진 표현이다. 뿌리 덕분에 자외선을 차단하고자 한 손에 양산을 쥐고 올라가면서 미끄럽지는 않았다.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참 멋진 표현이다. 뿌리 덕분에 자외선을 차단하고자 한 손에 양산을 쥐고 올라가면서 미끄럽진 않았다.
▲ 다산초당 오르는 길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참 멋진 표현이다. 뿌리 덕분에 자외선을 차단하고자 한 손에 양산을 쥐고 올라가면서 미끄럽진 않았다.
ⓒ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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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살던 시대에 만약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다산초당이 저만치 보인다. 단체 관광객에게 열심히 설명하시는 해설사가 있길래 얼른 친한 척 무리에 섞였다.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에 잠시 귀기울여 봤다.

다산초당이 저만치 보인다.
▲ 다산초당 오르는 길 다산초당이 저만치 보인다.
ⓒ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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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옹달샘이 있거든요. 그 옹달샘에 물이 항상 고여 있더래요. 약천의 수맥을 잡아서 파니까 솟구치더라는 거죠. 저희도 몇 년 전까지는 저 물을 먹었거든요. 여기서 차 체험을 해요. 중국 가셔서 오늘은 안하시네요. 지금쯤 해설사분들이 하실 건데. 이방에서는 차 체험,  여기서는 예절교육 같은 것을 해요. 

기록을 보면 약천의 물을 길어다가 산에서 솔방울을 따서 불을 피워 차를 마셨데요. 약천, 다조, 다지석가산, 저 위에 정석바위를 다산 사경이라 해요. 이 집은 사실 다산초당이 초가집을 이었는데 제자들도 돌아가시고 선생은 유배가 풀려서 고향으로 가시고 돌보는 이가 없으니까 허물어졌대요. 일제강점기를 지난 1936년대까지 있었대요.

그 자리에다가, 이 주춧돌이 그 주춧돌이겠죠. 해남윤씨들이 백 원 이 백원 모금운동을 해서 1957년도에 이 집을 지은 거예요. 몇 년 전에 문화재 관련 위원이 강진에 오셔가지고 예산을 줄 테니까 다산초당을 복원을 해라. 옛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가 있어요. 1812년에 다산초당을 그리셨거든요. 그 그림을 참고해서 초당을 복원을 해라 했는데, 강진군에서 여론수렴 결과 해남 윤씨도 발끈하고 반대여론이 너무 많았어요. 1년 가도 해가 안 비쳐요. 여기가. 초가를 해 놓으면 일 년도 못가서 썩어버려요. 영랑생가. 그렇게 해 잘 비추는 곳도 지금 유지하기 힘든데….

어쨌든 다산초당, 이 집은 상징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누구 맘대로 하느냐. 이 땅이 개인 사유지예요. 여기는 다른 사람, 저 위에는 또 다른 사람. 그런다 하더라고요. 관광객들이 여러 가지 요구하지만, 맘대로 유적지에 손을 못대요. 600여 권의 책이 정말 사람 혼자서는 불가능하데요. 왜 가능했을까요?  열여덟 분의 제자, 말이 제자지 학자였어요. 너는 뭘 잘해. 철저하게 분업을 시켜서 그 책을 완성하셨다는 거예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 <목민심서>는 여기서 다 완성하시고, <흠흠심서>는 책 꾸러미를 다 갖고 올라가셔서 그 다음해에 완성하시고, <경세유표>는 1817년 유배 끝나기 1년 전에 비밀리에 만드셨어요. 그게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 거예요. 저도 자료를 찾아보면 정약용 선생님은 법률가인가 하면 문장가이고, 건축가이기도 하고, 실학자 예술가예요."

방대한 자료에 나와있는 다산의 업적은 짧은 시간에 감히 다 말하기는 어렵다며 간단한 설명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날이 습한 탓인지 모기가 극성이다. 얘들은 덥고 모기 문다고 짜증을 내고 막내가 칭얼거려 다산초당에 대한 설명은 스마트폰의 사진으로 남겼다. 그 설명의 일부분이다.

다산초당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한 벗 혜장이 있었고 다산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 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 다산초당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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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이틀 전 2013년 여름을 다산초당에서 보낼 수 있음에 신입사원처럼 설레고 두근거린다. 그 분의 두 가지 가르침을 다시 되새김질해본다. 계획만 세워놓고 실천을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기는 좀 어려울 듯하다. 주말에는 늦잠을 자야 제 맛이 아닐련지. 대신 머리보다는 손을 믿어 기록하기를 즐겨할까 한다. 스마트폰과 함께…. 다산이 살던 시대에 만약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스마트폰을 활용하라'라는 말도 남기지 않았을까? 이 기사도 그때 찍은 사진을 활용했으니 말이다. '나의 강진 답사 1번지'인 다산초당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은 스마트폰의 사진처럼 긴 여운이 남는다.


태그:#다산초당,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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