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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제가 되려면 서품을 받기 직전 재산 포기 각서를 쓴다. 한 푼의 재산도 남기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하느님의 길을 실천하는 데 돈이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신부가 말한다. "내 배가 부르면 남 배고픈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죠."

 

신부들에게 가난은 정신적 허세가 아니다. 약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한 제도적인 조치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방법론인 셈이다.

 

자수성가한 이명박 대통령 

 

현실은 자신의 물적 조건 안에서 구성된다. 회식자리에서 누군가 자진해 삼겹살을 굽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삼겹살을 굽는 사람은 고기 한 점도 못 먹고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데, 구운 삼겹살을 받아먹던 사람들은 "이제 고기 그만 시키자, 배부른데" 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처 고기 굽는 사람 생각을 못해서이지 특별한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하나 같이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서민들이 만족할 만큼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었던 건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다만, 다만 없는 자의 설움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 서민을 위한 정책인지 몰랐을 공산이 크다. 물론 열에 한 명은 가난을 체험했고 서민의 아픔을 볼 줄 아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명박이 그런 사람이다.  자수성가한 CEO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가난에 대한 체험과 경영 노하우가 서민을 위한 경제 살리기로 승화될 거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하지만 그런 기대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람에게 가난의 경험은 부의 분배를 자극하기보다 부의 독점을 고집하는 거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쟁의 장소인 시장은 제로섬의 관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부자와 빈자의 이해관계는 명백히 엇갈린다. 그래서 정치적 입장 또한 명백히 엇갈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이 서민의 아픔을 이해하고, 이해하지 않고는 그리 중요한 '정치적 사실'이 아니다. 설령 그들이 서민을 이해한다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이명박은 부를 가진 사람을 위한 정책을 펴야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종부세 완화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의 면면에서 보듯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후보들의 경제정책은 부자를 위한 정책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가난에 대한 이해 때문에, 혹은 달콤한 말에 속아 그들이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이라는 막연한 바람에 기대어 투표한다. 정치권력자의 선의에 기대어 자신의 미래를 기획하는 이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행동은 명백한 비극이다.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상처만 얻을 것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비극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위선의 수사학

 

기득권이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도덕성은 ‘나의 재산을 줄여서 남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늘려주는 것’에 있다. 정치인의 진정한 도덕성은 서민들의 삶을 위한 정책을 펴는데 따르는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 비용이란 기득권의 반발로 초래되는 다양한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인은 이 핵심적인 의무는 피해간다. 생색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생색나는 기부나 헌금 등을 통해 자신의 도덕성을 한껏 과시하려 한다. 우리 사회 정치 지도자들은 서민의 삶을 책임질 의사도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진정 서민을 위하는 정책은 자신의 부를 축적할 기회비용을 완전히 포기해야 실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일종의 수사학이다. 텅 빈 실천을 메우려는 휘황찬란한 위선의 수사학. 그 속에서 말은 얼마나 공허하고, 사회는 얼마나 냉혹한가.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을 넘어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배반하는 정치 지도자를 옹호하는 수사학에 불과하다. 부자가 빈자를 위해 스스로 움직여 줄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나누고 배려할 줄 아는 부자를 꿈꿀 바에야 부를 실질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 정책을 고민하고, 그런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이 훨씬 현실적인 방법이다. 눈을 부릅떠야 한다. 정치인들의 서민생활 대책이라고 내놓는 감세론이 정작 누구를 이롭게 할지를 따져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겹게 반복되는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어설픈 열망을 버리고, 서늘한 현실감각을 되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태그:#노블레스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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