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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는 하인에게 말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에게는 세 마리의 말이 있었다. 백마와 황마와 흑마였다. 백마에게 백인, 황마에게 황강, 흑마에게 흑주란 이름을 붙인 것은 그였다.

그는 황강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황강은 혈통이 고급인데다 나이도 10세였다. 그러니 앞으로도 최소 15년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릴 수 있는 말이었다. 황강은 러시아 고원 지방 톰스크 출생인 극동의 명마였다. 녀석은 여섯 자 두 치의 몸체를 가진 늠름한 준마였다. 갈기에서 시작하여 어깻죽지까지 이르는 대춧빛 선이 특히 볼품 있었다. 불근불근한 가슴 근육과 꿋꿋한 다리, 알맞게 벌어진 궁둥이, 약동하는 듯한 비절(飛節), 무엇보다도 그렇게 손색없는 말이 조선에 더 있을 성싶지 않았다.

“나리, 황강은 큰 나리께서 가져가셨습니다.”
“형님이 오셨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김태수는, 형이 가져간 거라면 돌아오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형은 기회가 되는 대로 집에 와 값나가는 물건을 무단으로 가져가곤 했다.
“언제 오셨다 갔느냐?”
“일주일 전입니다.”

일주일이라면 말을 되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형은 돈이 급해서 온 것이었을 테니, 이미 그 말은 일본 관리나 지방 부호에게 팔아 넘겨졌다고 보아야 했다. 김태수는 그러는 형이 안쓰러웠다. 돈이 필요하면 아버지와 담판을 짓든지, 아니면 자기에게라도 말하면 될 터인데, 굳이 그런 방법 밖에 못 쓰는 형은, 그가 보기에 어리석은 위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옹졸한 면 밖에는 닮지 않았다는 말을 들어 온 형이었다. 일본에 가서도 성적이 안 되어 공부를 포기한 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교 신자가 되어 할아버지의 신위에도 절을 올리지 않겠다니, 아버지로서는 가히 화가 날 만도 한 일이었다.

“급히 연락을 취해 보아라. 내가 한 번 뵈었으면 한다고 전해라.”

태수는 할 수만 있다면 황강을 되찾고 싶었다. 그는 자신과 미래를 함께 할 목록 중 하나에 황강을 넣었을 만큼 그 말을 아끼고 있었다.

태수는 백인을 타고 오윤정을 향했다. 백인은 암컷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배가 꽤 불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활터에 가서 그 여인을 만나고 싶었다. 적지 않은 여자를 경험했지만 그 여인만큼 이렇게 지속적으로 그의 마음 한가운데를 장악하고 있는 여자는 없었다. 다만 그는 잘 생긴 황강을 타고 그녀를 보았으면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게 좀 아쉬웠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는 경복궁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좁은 길을 벗어나자 곧 창경궁으로 이어져 나 있는 신작로가 나타났다. 창경궁 동물원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짐승들을 들과 산에서 살게 해야지, 저렇게 우리에 가두어 구경거리로 삼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김태수는 그것을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개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나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은 거의 없었지만 사람을 보는 눈이나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감각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젊은이였다.

김태수는 향원정 앞에서 잠시 말을 세웠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모두 눈앞에 있었다. 흙과 나무와 연못과 다리와 숲과 정자와 구름과 하늘이, 작은 공간 안에 한데 모여 있었다. 그는 조선의 건축물들을 대할 때마다 지극히 평화로운 감정을 체험했다. 그리고 조선의 건축물은 놀랍게도 계절에 따라 새로운 발견거리를 그에게 안겨 주었다.

오윤정 연못에 잎이 지고 있었다. 해는 인왕산 너머로 사라진 지가 오래였다. 아무리 찾아보고 기다려 봐도 그녀의 자취는 없었다. 태수는 백인을 나무에 매어 놓은 채, 연못 가장자리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작은 잎 몇 개가 태수의 어깨에 내려 앉아 있었다. 누구를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움의 단추를 열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이제껏 그는 그리움이나 외로움 따위의 감정을 경험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빈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발밑으로 엷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형에게서는 만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왔다. 형을 생각한다면 만나려고 할 게 아니라 돈을 보내면 된다고 했다. 황강은 이제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 버린 것 같았다. 황강뿐 아니었다. 활터의 여인도 이제 그에게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오윤정 활터에 세 차례나 더 나가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그는 사직단 옆에 있는 황학정 활터에 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이제 그는 그녀를 보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품었다.

보료에서 벌떡 일어난 김태수는 하인을 불러 말을 준비하라고 했다.
“나리, 이제 백인은 타실 수가 없습니다. 수태 열 달이 넘었습니다.”
백인은 만삭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흑주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흑주는 제주산 조랑말이었다. 이제 시골 선비나 아전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탈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서 오윤정에 가고 싶었다. 잠깐 든 낮잠에서 그는 그녀를 보았던 것이었다.

오윤정에 다다르기까지 그는 흑주의 옆구리에 몇 번 채찍을 댔다. 그가 정자 옆 연못에 이르렀을 때였다. 직감대로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활쏘기를 끝냈는지 말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김태수는 급히 말에서 내렸다. 그는 흑주의 고삐를 잡고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말에 오르려다 말고 다가오는 한 사내와 조랑말을 쳐다보았다. 순간 김태수의 발은 얼어붙은 듯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김태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당당함과 고혹스러움만은 아니었다. 안장에 얹어진 그녀의 손길에 고분고분히 긴 머리통을 조아리고 있는 말은 다름 아닌 황강이었다.
“저는 숭교방에 사는 김태수라고 합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충청도 제1 갑부가 한양으로 왔다고 하더니, 여기서 그 상속자를 뵙게 되었군요. 그렇다고 외간 아녀의 이름을 함부로 알려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라고 정중한 어조로 말하더니 말에 오르려고 했다.

그때서야 황강도 태수를 알아 본 듯싶었다. 황강은 그 긴 머리통을 돌려 태수의 옆으로 갖다 댔다. 그녀는 머뭇거리고 있는 김태수의 외모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저에게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으신지요?”
“존함을 안 알려 주신다면 말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말의 이름은 아직 짓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구하신 말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김태수의 얼굴을 보았다.
“가축을 구하는 일은 제가 직접 하지 않아 모릅니다.”
그녀는 날렵한 동작으로 말에 오르더니 힘껏 고삐를 당기며 떠나 버렸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창조적으로 청산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태그:#김태수, #활터의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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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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