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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일각에서조차 권력에 눈이 먼 '이중인격'의 소유자라고 혹평까지 받고 있다."

1992년 12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의 당사자인 김기춘 당시 전 법무부장관을 소개하면서 이같이 전했다. 대선을 앞둔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불러 모아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 지원방안을 논의한 이 사건 때문에 김 전 장관이 비난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평검사부터 검찰총장, 법무장관에 이르기까지 권력지향적인 그의 행적은 이력을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지난 5일 김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발탁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유신 당시 박정희 정권을 적극 지원하는 등 '정치검사'로 활약하며 출세의 길을 열었고, 이러한 이력 덕분에 박근혜 정부 참모진으로 발탁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유신헌법 기초작업 참여한 김기춘 "민주주의 토착화시키는 시발점"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이는 김기춘 신임 비서실장.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이는 김기춘 신임 비서실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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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 출신인 김 실장은 1960년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사법 고등고시 12회에 합격해 광주·부산·서울지검 검사로 근무했다. 1972년 법무부 법무실 검사였던 그는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내용의 유신헌법 제정 기초 작업에 실무자로 참여했다. 김 실장은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핵심조항이 담긴 유신헌법 초안 작업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기사: "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

유신헌법 홍보에도 적극 나섰다. 김 실장은 같은해 12월 대검찰청이 발행한 <검찰> 48호에 '유신헌법 해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 3권 분립을 무력화한 유신헌법의 실체를 감추며 박 전 대통령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확정을 보게 됐다."

유신헌법 등 법률개정작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법무부 과장으로 특진된 김 실장은 이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는 이러한 이력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주위에서 말한다."

신직수는 인민혁명당 사건(아래 인혁당 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검찰총장이었던 1964년에는 1차 인혁당 사건을 지휘했고, 10년 뒤 중정부장으로 승진한 뒤에는 유신헌법에 따라 8명을 처형한 2차 인혁당 사건을 진두지휘했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꼽히는 인혁당 사건의 핵심 관계자 중 한 명이 신직수이고, 그러한 인물을 보좌한 게 바로 김 실장인 셈이다.

문세광 사건 후 중정 대공수사국장-청와대 법률비서관-법무부 검찰국장

지난 2004년 3월12일 당시 김기춘 국회법사위원장(가운데)과 김용균 한나라당 법사위 간사(오른쪽), 함승희 민주당 법사위 간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하고 있다.
▲ 김기춘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 노무현 대통령 탄핵 주도 당시 모습 지난 2004년 3월12일 당시 김기춘 국회법사위원장(가운데)과 김용균 한나라당 법사위 간사(오른쪽), 함승희 민주당 법사위 간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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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실장은 같은 해 8월 박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씨 살해범인 문세광 조사를 맡았다. 이때 완벽하게 자백을 얻어내는 개가를 올려 박 전 대통령의 눈에 들었고, 이 때문에 대공수사를 주로 맡는 중앙정보부 5국장(언론에서는 대공수사국장으로 소개)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후문이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중정5국 수장을 맡은 김 실장은 정권과 관련된 여러 공안사건을 담당하며 공안통으로 실력을 쌓아갔다. 1990~199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남산의 부장들'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도 나온다.

"1974년 중정 5국(국장 김기춘)은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세계>라는 잡지에 박 전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는 내용이 실렸다는 이유로 소스를 추적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박정희 정권에서 보안사령부의 권한을 축소한 사건 역시 이때 김 실장이 맡았다고 한다. 1977년 10월 전방 사단 대대장이 월북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당시 중앙정보부는 월북을 한 유아무개 중령이 사단 보안부대장에게 약점을 잡혀 겁을 먹은 바람에 월북을 했다고 밝혀냈다. 이에 진노한 박 전 대통령이 신직수 중정부장에게 보안사령부의 권한을 축소하라고 지시했고, 김 실장이 실무를 집행했다.

김 실장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1979년에는 청와대 법률 비서관을 지냈는데, 이 때 박근혜 대통령과 조우한 것으로 알려졌다. 2년 뒤에는 법무부 검찰국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직을 전전했다. 보안사령부를 위축 시킨 사건을 맡았다는 이유로 권력 실세들에게 밉보인 게 요직에서 쫓겨난 원인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박철언 전 의원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김 실장이 당시 자신에게 구명 로비를 펼친 끝에 겨우 면직 위기를 면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1988년 12월 초대 임기제 검찰총장으로 발탁돼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온 김 실장은 법무부장관까지 오르게 됐다. 임기를 마친 그는 1992년 12월 11일 14대 대선을 사흘 앞두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를 돕기 위한 '초원복집 사건'을 공모했지만 무혐의 처리됐다. 1995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된 이래 3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국회 법사위원장이었던 2003년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섰다. 지금은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그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다.


태그:#김기춘, #박근혜, #청와대, #유신, #신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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