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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2명, 장관 21명, 시장·도지사 9명, 합참의장 4명, 육군참모총장 7명, 공군참모총장 4명, 검찰총장 4명, 대법원장 3명, 대법관 10명.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중 관료, 경찰, 군인, 판·검사 출신 인사들의 해방 후 주요 공직 역임 내역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가 29일 오전 발표한 이 명단에는 고등문관 이상 관료 1166명, 경찰 521명, 위관급 이상 장교 216명, 판·검사 201명이 포함돼 있다. 줄잡아 2000여명이 넘는다.

고위직 장악한 친일 인사, 역사의 고비 때마다 등장

이들은 해방 뒤에도 과거 경력을 살려 요직을 차지했다. 관료 출신들은 해방 후에도 행정 요직으로 나아갔고, 경찰·군·법조계 출신도 각각 일제 때 활동했던 분야를 장악했다.

이들은 단순히 고위직을 역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해방공간에서의 테러 기도(친일경찰 노덕술), 백범 김구 암살(친일경찰 출신 군인 전봉덕), 이승만 장기집권의 길을 연 1952년 부산정치파동(만주군 출신 원용덕), 4.19(판사 출신 홍진기),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민복기) 등 현대사의 고비 지점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뒤로 돌리는 데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경찰의 기술은 해방 후 한국 경찰에게 그대로 이식됐고 한국 군대 또한 일본군의 폭력적인 병영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문별로 살펴보면 일제 관료 출신들 중 상당수가 행정부의 장관직을 역임했다. 내무(1명), 재무(2명), 농림(2명), 건설(1명), 보건사회(1명), 체신(2명) 등 부문도 골고루였다.

주요 인사는 내무부·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현석호(일제 때 화순군수), 건설부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직을 맡았던 전예용(일제 때 광주군수), 농림부 장관이었던 임문환(일제 때 용인군수) 등이 있다.

'고문기술자' 고등경찰 약진... 일제 검열관이 국사편찬위원장 맡기도

경찰의 경우 행정 영역보다 더 극적이다. 일제 식민통치의 최선봉에 서 있던 이들은 해방 후에도 대부분 경찰 자리를 유지했고 특히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고등계 형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고등경찰 출신 중 가장 대표적인 인사는 노덕술이다.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5년 8월 당시 평남 보안과장이던 노덕술은 제헌국회의 소장파 의원들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가 적발되는 등 해방 후에도 못된 짓을 서슴치 않았다.

노덕술은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그를 매우 아낀 이승만 대통령이 "공이 많은 노덕술을 처벌하지 말라"고 말하며 반민특위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같은 해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노덕술은 다시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아울러 반민특위에서 사형이 구형됐던 김덕기(평북 경찰부 고등과장 역임, 독립운동가 오동진 체포)와 김태석(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역임, 독립운동가 강우규 체포)도 특위 해체로 인해 부활했다.

전봉덕처럼 일제 때 경찰이었다가 해방 후 군으로 옮긴 경우도 있다. 평북 보안과장 등을 맡았던 전봉덕은 해방 후 육사 1기로 임관한 뒤 1949년 6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언론·출판물을 제멋대로 가위질했던 검열관 출신 경찰이던 김성균은 특이하게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역사학계에서 '해방공간(1945~1948)을 살아간 민중의 최대 불만은 친일 경찰의 존속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친일경찰은 요직을 장악한 뒤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을 가로막는 장애물 노릇을 했다.

일본군 경력은 참모총장·합참의장·국방장관 가는 디딤돌

군을 장악한 것도 일본 육사 및 만주군관학교 출신 등 일본군·만주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국방부 장관 역임자도 5명(행정관료 출신인 현석호가 국방부 장관을 지낸 것까지 포함하면 총 6명)이나 된다.

만주군 헌병 대위 출신인 정일권은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을 거쳐 박정희 정권 때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간도특설대에서 활약한 백선엽(만주군관학교 출신)도 육군참조총장·합참의장을 지냈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정렬(일본 육사 출신)도 국방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역임했고 한국군 '군번 1번'인 이형근(일본 육사 출신)도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을 지냈다.

만주에서의 '독립군 토벌'로 악명높던 김석범(만주군관학교 출신)도 해방 후 해군중장으로 예편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도 관여했을 뿐 아니라 초대 헌병사령관을 역임한 원용덕도 만주군 중좌 출신이다.

한국군을 장악한 일본군·만주군 출신에게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은 자연스런 진급 코스였던 셈이다.

4.19 발포 당시 홍진기 내무장관, 사형->특사->언론계 투신

법조 부문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홍진기, 민복기 등 5명이 일제 때부터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법무부 장관을 맡았다. 검찰총장, 대법원장, 대법관 등 법조계를 좌지우지하는 자리 역임자 중에서 친일 인사로 분류된 이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인물은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의 부친인 홍진기다. 일제 때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하고 전주지법 판사를 지낸 홍진기는 이승만 정권 말기에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학생과 시민에게 총을 발사한 4.19 혁명 당시 내무부 장관도 바로 홍진기다.

발포 명령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이후 징역 9개월형으로 감경됐던 홍진기는 5.16 쿠데타 후 다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된 뒤 특사로 풀려난 홍진기는 이병철 전 삼성회장과 사돈을 맺고 언론계에 투신했다. 생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사후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대법원 판사, 검찰총장, 대법원장, 법무부 장관을 모두 역임한 민복기(일제 때 경성지법 판사)도 주목할 만하다.

민복기는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64년 8월 제 1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난 뒤 서울지검 검사들이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어 양심상 기소할 수 없다"고 나서자 힘으로 이들을 눌렀다. 그는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고, 법조계의 독립성은 박정희 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한편 연구소와 편찬위가 이날 "1차명단이 친일 인사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향후 추가될 예정"이라고 밝힌 데서도 드러나듯 친일 인사들이 각 부문의 요직을 장악해 온 실태는 이날 발표된 범위보다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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