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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2007년 세밑을 흔들고 있다. 하나는 5년마다 되풀이 되는 대통령 선거요,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뇌물 스캔들’이다. 언론에서는 시간과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뉴스들을 생산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기자들은 물 만난 물고기이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이다. 무협지보다 스릴 넘치는 두 사건으로 눈을 떼기 힘들다. 그래서 질문해 본다. 한 채널은 대통령 선거, 다른 채널은 삼성 뇌물 사건만 방영된다. 그런데 당신은 오직 한 채널만 볼 수 있다. 이럴 때 당신의 선택은?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삼성 채널’로 고정할 것이다. “선택은 취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라고 영화 <선택>은 말한다. 대통령 선거 채널을 ‘버린’ 이유는 삼성의 이번 사건이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동의하시는가?

 

두말할 나위 없이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가지는 권한은 개인은 물론 헌법기관 그 어느 곳보다 막강하다. 권력의 최고의 정점이며 지존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 아니 국가의 미래는 좌지우지된다. 대통령 선거가 초미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삼성 뇌물’ 사건이 동시에 터졌다. 매우 불행하게도 나의 생물학적 CPU는 이 둘을 동시에 수용하기에는 그 용량이 벅차다. 그래서 하나를 버렸다.

 

‘삼성 뇌물 사건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풀면 그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대한민국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이 발칙한 생각을 들게 한 것은 김용철 변호사가 말한 ‘거악’이다. 기실 삼성이야 모든 대한민국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전자, 아파트, 금융(보험 카드)까지 확실히 “삼성이 만들면 다르다.” 특히 소비자의 입장에서 내가 가장 큰 감동을 받는 것은 맹인안내견과 삼성직원들의 대 고객 서비스이다. 설치에서 AS까지 어찌나 친절한지, 그리고 맹인안내견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봉사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거악’이라고 칭하는 데 동의한다. ‘거(巨)’라면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실체이다. 건들 수가 없다. 애니콜이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악을 건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용철 변호사가 증거를 남겨 놓고 숨기다가 훗날을 도모한 것도 그로부터 출발한다. 악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건희 이재용의 탈법증여 의혹, 노조탄압은 끼지도 못한다. 이런 범법행위를 우리 사회가 묵인하고, 왜곡하도록 만든 것, 그게 악의 실체이다.

 

사안에 따라 외면하는 언론은 사회적 공기가 아니다. 한 기업에 작아지는 검찰은 사정기관이 아니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재경부 공무원은 공복이 아니다.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국세청,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국회의원, 심지어 청와대까지도 우리나라 끗발 있는 곳에 드리워진 그들의 발자취로 우리 사회는 마비가 되었다. 이게 악이다. 그래서 모종의 커넥션을 형성하여 아무나 쉽게 범접할 수 없도록 만든 것 이게 ‘거악’이다.

 

이제 사카린을 밀수했을 때처럼 제대로 보도하고 제대로 단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공업용인데 통관절차에 하자가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고 믿어버리는, 진실이 묻혀 버리는 현실이 ‘거악’의 종착역이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이윤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들이 많다. 이 나라 엘리트들을 그 얄팍한 돈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면 대한민국에서 과연 희망을 갈구할 수 있을까.

 

내가 ‘대통령 채널’을 버리는 이유는 이러한 현상들을 고착화시키는 범인들이 비단 삼성과 이를 본받는 기업뿐만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정치인, 언론인, 공무원 등 오피니언 리더들마저도 ‘삼성의 관리 대상’에 못 낀 데 따른 만연된 소외감에 나는 소름이 돋았고, 이는 대통령으로서도 풀 수 없는 ‘거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 대통령이야 잘못하면 5년 뒤 갈아치우면 된다. 그렇지만 이번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음지에서 일어나는 악의 연결고리를 끊을 절호의 기회이다. 대통령직 같이 몇 년 뒤 보장이 없다. 이 절박함으로 나는 ‘삼성 뇌물 채널’을 선택하였다. 삼성의 기술력을, 삼성의 직원들을 매도하는 게 아니다. 태평로에 자리 잡은 음습한 비서실 구조조정본부에 햇볕을 비추어야 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뇌물 공여가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삼성 소인이 찍힌 돈다발을 받은 엘리트들을 단죄하지 않고서는 본질이란 문에 들어갈 수 없다. 경제정의와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현재 유력한 대통령 후보나 정당마저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노파심도 그런 채널 선택에 한 몫을 했다.


태그:#삼성비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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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는 질서보다 우선한다"는 홍세화님의 글을 좋아하는 회사원입니다. "모근 국민이 기자"라는 오마이뉴스의 모토에 공감하면서도 글을 쓴다는 것, 더구나 남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알기에 기자로 등록하기가 망설여집니다. 되도록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변잡기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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