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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 오후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신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의원실을 나오고 있다.
▲ 신체 압수수색 받은 이석기 의원 지난 8월 29일 오후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신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의원실을 나오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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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내란음모다. 총기 탈취, 기간시설 파괴, 인명 살상이란 말까지 나온다. 무시무시하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게 덧씌워진 혐의다. 가히 충격 그 자체다. 정국을 한순간에 마비시키고,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된 국민적 규탄 분위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진보적인 인사들조차도 섣불리 입을 못 열고 있다.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이라며 몸을 사린다. 벌써 민주당은 촛불 정국에서 한 발 빼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설마'라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번지고 있다. 그런데 웃긴다. '명색이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내란'이라는 어마어마한 짓을 음모했을까'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설마'가 아니다. '아무렴 국가기관이 근거도 없이 그런 주장을 할까'라는 점에서의 '설마'다. 여기에다 다시 덧붙는다. '그 사람, 종북이라는데', '걔네들, 주사파라는데', '진짜 그랬던 거 아냐…….'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2년 전 악몽이 떠올랐다. 아니, 지금도 재판이라는 형식으로 계속되는,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갉아먹고 있는 악몽이다.

2년 전 악몽의 데자뷰

2년 전인 2011년 7월의 어느 날, 신문지상을 뒤덮었던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민족21> 간첩사건이다. "<민족21>의 편집주간과 편집국장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족21>을 통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 당시 언론에 보도된 사건의 요지다.

그때도 이렇게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들이닥친 국정원 수사관들이 우리 집을 압수수색했다. 이유는 '간첩 혐의'였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변명과 반박 한 번 하지 못하고 '간첩'이 되었다.

보수언론에서는 국정원에서 흘려주는 혐의 내용을 사실인양 보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민족21>은 간첩의 소굴로 변모했다. <조선일보>는 <민족21> 사무실 사진을 싣고, 친절한 도표까지 동원해 <민족21>을 '선군정치'의 홍보부대로 돌변시켰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황당하고 착잡했던 것은 주위의 반응이었다. 진보적인 사람들조차 '설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묘했다. '설마 <민족21>이 간첩 활동을 했겠어?'가 아니라 '설마 국정원이 근거도 없이 그러겠어?'가 주였다.

처음에는 225국의 지령을 받았다고 했다. 225국은 주로 간첩 남파, 요인 암살을 전담하는 북한 노동당 대외연락부의 핵심조직이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그러다 다시 왕재산 조직의 지도를 받았다고도 했다. 왕재산 조직의 체계도 아래 <민족21>도 버젓이 올라가 있었다. 급기야는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았다는 말도 나왔다. 정찰총국은 북한의 국방위원회 직할 조직으로 천안함을 폭침한 곳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었다. 도대체 나의 상부조직이 어디인지 내가 다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런 보도들이 반복되는 와중에 발행인인 명진스님이 나를 급히 찾았다. 스님의 첫 마디가 이랬다. "진짜 아니야?" 발행인조차 의심할 수밖에 없을 만큼 국정원과 언론의 보도는 집요했다.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강변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님은 그제야 "그럼 결사적으로 싸워야지" 하셨다. 그리고는 바로 국정원의 주장을 요목조목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준비하셨다.

2011년 8월 4일 <민족21> 발행인인 명진 스님이 서울 장충동 만해NGO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정보원 수사를 비판했다.
 2011년 8월 4일 <민족21> 발행인인 명진 스님이 서울 장충동 만해NGO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정보원 수사를 비판했다.
ⓒ 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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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아내조차 내게 "진짜 아닌 거 맞지?"라고 물었을 정도니 다른 이들은 말해서 무엇하랴. 당시 시민사회운동의 한 간부는 "이참에 털건 털고 가는 게 어떠냐"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을 안영민 편집주간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고, <민족21>은 대대적인 혁신선언으로 살아남아야 하지 않냐는 충고였다.

국정원과 보수언론의 양공작전은 <민족21>에 엄청난 후과를 남겼다. 당장 <민족21>의 독자들부터 구독을 중단했다. 취재원들도 우리와의 만남을 꺼렸다. 인터뷰를 하려고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피했다. 얼마 안 되는 광고수입도 종쳤다. 그 덕분에 <민족21>은 창간 이래 최악의 경영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결국 경영난 속에 기자들과 직원들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나 역시 취재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민족21>은 현재까지도 그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건 초기의 대대적인 마녀사냥 내용과 달리 국정원의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그 어디에서도 정찰총국 혹은 225국의 지령은 나오지 않았다. 내 휴대폰과 집 전화, 사무실 전화와 전자우편, 우편물 등 2007년부터 감청해온 모든 통신내용과 컴퓨터, USB 등 저장파일 어디에서도 지령과 보고의 흔적은 없었다.

국정원에 10차례 이상 출두했지만 그들의 시빗거리는 내가 쓴 책과 강연자료를 비롯한 몇몇 문서, 일본의 총련 간부와 사업협의를 위해 주고받은 전자우편에 불과했다. 결국 국정원과 검찰은 애초의 혐의가 대폭 축소된 내용으로 나를 기소했을 뿐이다.

더 웃긴 것은 <민족21> 편집국장이다. 나와 함께 간첩 혐의를 받았던 편집국장은 3~4차례 국정원 출두 후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이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민족21>을 세상과 단절시킨 정찰총국의 지령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상처투성이 몸과 마음뿐이다.

다시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 되는가
     
그래서다. 나는 이석기 의원 사건 또한 이러한 경로를 밟을 게 뻔하다고 본다. 녹취록이다 뭐다 하지만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 태산을 울려 흔들게 한 것은 쥐 한 마리뿐이란 뜻)의 결과가 눈에 선하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내란음모혐의는 증거부족으로 은근 슬쩍 빠지고 결국 남는 것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 鼻懸鈴 :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속담의 한역)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태산명동'이라는 것을. 몇 달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이참에 국정원 댓글 사건도, 대선 부정의혹도 다 덮고, 나아가 국정원 개혁의 목소리도 짓눌러버리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런데 '태산명동'에 현혹된 세상은 훗날의 '서일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용머리만 보던 시선이 뱀꼬리까지는 닿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오직 용머리만 남겨둔다. 그러면서 똑같은 일이 터지면 다시 말한다. '설마'라고.

이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민족21>과 나를 두고 '설마'라고 했던 사람들은 오늘,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두고 다시 '설마'라고 의심한다. 어느 순간 국정원이 흘리고 보수언론이 받아 적는 외눈박이 '팩트'에 더 관심을 가진다. 정작 국정원이 대대적인 '마녀사냥'으로 자신들의 생존권 지키기에 나섰다는 진짜 팩트에는 눈을 돌린다. 이 정권이 대선 부정의혹 규탄 촛불시위를 불끄기 위해 총공세에 나섰다는 진짜 실체는 뒤로 제쳐둔다.

<민족21> 사건 때, 나는 기자들로부터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은 사실이 없냐는 질문공세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가. 혐의를 덧씌운 자들이 근거를 밝혀야 할 문제 아닌가."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수사기관에서는 이웃의 한 사람을 용의자라 붙들고는 "네가 살인을 안 했다는 것을 증명해봐"라고 다그친다. 이게 옳은 처사인가. 살인했다는 증거부터 먼저 명백히 밝히는 게 우선 아닌가.

이런 몰상식이 유독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만 적용된다. 내란음모라. 최소한 총기라도 몇 개 꺼내놓고, 그럴듯하게 만든 계획서라도 펼쳐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진보진영 내에서도 꽤 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을 탓할 마음은 없다. 또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편들 생각도 없다. 다만 충고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 앞서면 이성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이성이 흔들리는 순간 주객이 전도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이다. 우리의 이성은 오직 추악한 댓글로 여론을 호도하고, 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대대적인 역공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역사 이래 최대의 비이성적 집단을 향한 강력한 저항으로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당신도 '이석기'가 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안영민 기자는 <민족21> 편집주간을 지냈다.



태그:#내란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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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지와 민족21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현재는 (사)평화의길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명진TV를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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