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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밀양은 인구 천 명 이상의 도호부로 도호부사는 박진이었다. 박진은 임진전쟁 3년 전인 1598년(선조 22년)에 심수경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밀양 부사로 임명받았다.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부사 박진은 군(郡) 내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 당시 성을 빠져 나온 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

일본군이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되돌아갔다.

16일 밀양성으로 복귀한 박진은 남은 병력의 수습도 여의치 않았다. 박진이 병사를 모병하는 동안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하였다는 첩보를 접했다.

박진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려면 꼭 통과해 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특히 이 곳을 통과하려면 황산잔도의 험한 길로 지나가야 했다.

작원관의 지세만 잘 이용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천혜 요새였다. 험한 지역에 방어선 구축까지는 좋은 작전이었다. 하지만 박진 부사 자신은 밀양성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일본의 제1군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양산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18일에는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여러 곳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하늘처럼 높아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을 따라 밀양성으로 달렸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군사도 없는 무인지경에 빠져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낙동강을 따라 북진하였다.

고니시가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오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 그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활과 돌로 무장하고 매복했다.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하는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의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다. 최후의 일각까지 조선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를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 당하고, 부사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조선군의 방어선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이 작원관 혈전은 임진전쟁 발발 후 최초의 전투다운 전투였다.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

일본군은 성에 불이 난 다음 날 19일에 산에서 내려와 밀양성을 점령했다. 이들은 밀양성을 지키던 군민 3백여 명을 거의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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