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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오전 0시 조금 지난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마음이 심히 복잡했다. 장준하와 박정희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누구의 삶을 따라야 하는지. 장준하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킬 것인가? 장준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 둘의 삶은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귀국, 마음이 복잡했다

광복군 장준하는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과 함께 그렇게 바라던 고국으로 환국했다. 그는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면서부터 해방이 되고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할 때까지는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데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53년 3월 잡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1958년 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글로 필화사건을 맞았다. 탄압에 맞서 다음 해 2월호는 권두언을 백지 상태로 발간해 친일파를 등에 업고 독재를 일삼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사상계>는 1960년 6월호로 10만 부를 발행하는 등 최고의 잡지가 되었다. 장준하는 1962년에는 막사이사이상 언론학 부분의 수상자가 되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또 독재를 하자 그는 박정희를 비판했다. 서슬 퍼런 군사 정부 아래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굴욕적인 한일 회담의 저지를 위해 투쟁했다. 1966년에 박정희를 '밀수 왕초'라 비판하고, 베트남 파병 때는 "존슨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다"라고 발언하여 구속되었다.

또한 '이 나라 국민 모두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박정희는 왜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며 남로당 빨갱이 전력으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박정희 정권은 <사상계>의 경영을 악화시켰고 결국 <사상계>는 1967년 폐간되었다. <사상계>를 창간한 1953년부터 1966년까지 장준하는 민주화를 위한 민주 언론운동가라 할 수 있다.

장준하는 구속 중인 1967년 옥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장준하는 국방 위원에 자원하여 이후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와 알게 된다. 김재규는 장준하의 청렴한 의정 활동에 크게 감동하여 장준하가 죽은 후 그의 가족을 돌보았다고 한다. 장준하는 1968년 베트남 파병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이에 대해 신랄하게 따졌다. 1973년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고,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됐으나 병세가 심해져 그 해 1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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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1975년 1월 박정희에게 장문의 공개 서한을 보내고 중대한 결심을 한다. 임시 정부 태극기를 이화여대에 기증하고 부인과 천주교 혼례 의식을 거행한 장준하는 부모와 김구 그리고 이범석의 묘소를 참배하는 등 신변 정리를 했다. 그러다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를 당했다. 정부는 자세한 조사도 없이 실족사라고 주장했지만 38년이 지난 2013년 3월에서야 비로소 민간 보고서이긴 하나 타살임을 입증했다. 장준하는 1967년부터 1975년 사망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반독재 민권운동가로 온 몸을 다 바쳤다.

장준하와 박정희, 그 삶의 비교

장준하는 1918년 8월 평안북도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박정희는 1917년 11월 경상북도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둘의 나이 차이는 한 살로 박정희가 9개월 먼저 태어났다. 장준하의 아버지는 목사로 항일 정신이 뚜렷해 일본의 감시를 받았으나 박정희의 아버지는 조선조 후기 무반 출신으로 가난한 빈농이었다.

박정희는 1932년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대구 사범학교에 입학했고, 장준하는 1933년 대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34년 신성 중학교로 전학 갔다. 1937년 장준하는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된 교장 석방을 위한 동맹 시위를 하여 처음으로 유치장 경험을 했다.

장준하는 1938년 정주의 신안 소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1941년 일본 토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도쿄의 일본 신학교로 전학했다. 1943년 위안부로 끌려갈 위기에 놓인 제자와 아버지의 항일로 위기에 놓인 집안을 구하기 위해 결혼을 하고 학도병에 지원했다.

한편, 박정희는 집안의 강권에 못 이겨 1935년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1937년 문경 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나이가 많아 입학이 허락되지 않자 만주 군관학교 앞으로 일본 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로 쓴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가 만주의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1940년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42년 3월 만주 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사로 편입해 1944년 4월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했다.

박정희는 1944년 7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만주군 보병 제8단의 소대장을 지낸다. 이 시절 그는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을 역임하면서 중위로 진급했다. 일본이 패전하자 북경에 있는 광복군에 들어간 그는 1946년 5월 천진을 출발해 부산으로 초라하게 귀국한다.

반면 장준하는 앞서 소개한대로 1944년 7월7일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린취안에서 한국광복군 특별 훈련반에 입소하여 중국 중앙군 장교가 된다. 어렵고 험한 여정을 이겨내고 1945년 1월31일 중경 임시정부에 마침내 도착했으며 2월에 광복군 소위로 임관한다. 시안에서 한반도 진입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다가 아쉽게 국내 진공을 못하고 해방을 맞는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다.

해방 후 박정희는 1946년 9월 조선 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고 12월 첫 부임지인 춘천 제8연대에 배치된다. 여기서 그는 남로당에 가입한다. 후일 그의 장교 자력표에는 춘천 시절이 빠져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나중에 집권하면서 자신의 군사 재판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폐기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8년 11월 박정희는 군 수사 당국에 공산주의자로 체포된다. 그는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지명한 거물로 군내 좌익의 조직을 처음으로 자세히 제공했다. 그러자 친일파들과 만주군관학교 선배들의 구명 노력으로 그는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고 재심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같은 만주 군관학교 출신인 백선엽의 배려로 육본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 한국 전쟁이 나자 1950년 6월에 현역으로 복귀했다. 12월엔 육영수와 재혼했다. 김일성은 박정희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장준하는 해방 정국에서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했고 이범석의 조선 민족청년당에 잠시 참여했다. 1949년에 한국 신학대학에 편입해 같은 해에 졸업했다. 1953년 4월에 잡지 <사상계>를 창간했고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다.

1961년 장면 정권에서 장준하가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하고 있을 때 그 해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1963년 박정희는 민간에게 권력을 이양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하더니 1972년 10월에 유신 체제를 선포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1974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이 발생하여 무고한 젊은이들을 사형시키고 1975년 5월에는 긴급 조치 9호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응해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해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으며 한일 협정을 반대했다. 1966년에는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대회' 연설로 구속됐으나 다음해 6월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옥중 당선되었다. 1973년 12월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고, 1974년 1월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구속됐으나 지병으로 형 집행이 정지돼 풀려났다. 다음해인 1975년 8월17일 의문사를 당했다.

박정희의 업적으로 유일하게 자부되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역시 그만의 작품이 아니다.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을 참아낸 수많은 노동자의 땀과 눈물의 덕과 그리고 남다른 민중들의 교육열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적절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억압과 분신 자살이 이어졌다.

일본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는 비록 대통령이 되어 권력은 잡았지만 광복군 대위 출신인 재야 민주지도자 장준하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은폐하고 싶은 사실들을 권력의 위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줄기차게 비판하는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눈엣가시 그 자체였을 것이다. 눈엣가시는 뽑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그들의 눈에 이것이 안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1979년 8월에 YH노조가 신민당사를 점거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10월에는  부마항쟁이 발생했다. 장준하는 1975년에 아직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죽임을 당했지만 박정희는 그로부터 4년 뒤에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누구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장준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평생을 민족과 민중을 위한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해방 후에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그의 온 몸을 다 바쳤다.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기독교 집안답게 성경의 말씀이었다. 그는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돌베개를 인용하여 자서전인 <돌베개>를 출판했다. 15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그러나 그는 제 명대로 살지 못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전셋집을 전전할 정도로 가난해 자녀들을 제대로 공부도 시키지 못했다. 유족들은 가난과 당국의 감시로 쫓기며 살아야 했다. 죽은 지 3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민간 조사이나마 밝혀졌을 뿐, 유족들의 어려운 삶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가해자라 할 수 있는 현 정부의 수반은 일절 그에 대한 언급이 없고 정부 차원의 조사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언제쯤 하느님의 말씀대로 다시 그를 이리로 데려올 수 있을까?

박정희의 일생은 변신의 연속이었다. 그는 빈농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직업인 교사가 되었다. 일본인 교장 꼴 보기 싫다고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찾아간 곳은 조국의 해방을 위한 광복군이 아니라 일본에 충성하는 만주군관학교였다.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했지만 그는 탈출은커녕 황군 장교로 매우 성실히 복무했다. 일본이 패전하자 잠시 광복군이 되어 귀국하고 해방 후에는 육군 장교로 변신했다. 그러나 곧 공산주의자가 되어 군부대의 남로당 프락치가 되었다. 그러나 숙군 수사 때 체포되어 궁지에 몰리자 알고 있는 남로당 동지들의 명단을 모두 팔아 목숨을 부지했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군에 복귀한 그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으나 집권욕에 눈이 멀어 함께 한 쿠데타 동지들을 또한 토사구팽 시켰다. 권력의 민간 이양을 약속했으나 10월 유신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전력을 지우기 위해 절대 반공을 내세우며 철권통치를 했다.

그러한 박정희를 지금도 일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구국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 그의 자녀는 육영수의 소생만 1남 2녀이다. 그들은 평생을 호의호식 했으며 그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단 한 번도 연좌제에 걸려 고통을 겪은 적이 없다. 부모의 비참한 죽음에 연민을 느낀 많은 사람들의 지지는 그의 장녀가 대통령이 되는데 일조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의 가족과 자식들은 대부분 가난에 찌들었고 사상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친일파의 가족과 자식들은 대를 이어 호의호식했다. 독립군은 가산을 털어 독립자금을 대느라 가난했고 쫓겼기에 자식들 교육을 시키지 못 했다. 그러나 친일파의 자식들은 친일의 대가로 부를 얻었으며 자식들 교육을 잘 시켜 대를 이어 부와 권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결과는 단 한 번도 해방 후에 친일파에 대항해서 독립군들이 권력을 잡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겼다. 친일파는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어찌 완전한 해방이 되었다 할 수 있는가?

평생을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결과와 평생을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온 결과가 이렇게 다른데, 우리는 어떻게 자식들에게 민족을 위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삶을 살라고 교육할 수 있겠는가?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온 수구적인 세력이 마치 민족을 위한 보수주의인 양 탈을 쓰고 이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바로 장준하와 박정희가 대한민국에서 독립군과 친일파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도 장준하 죽음의 원인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한국문화신문에도 투고



태그:#장준하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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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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