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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불안에 떨고 있는 소심하고 나약한 사람이다. 나의 모든 말하기는 여러분의, 그리고 나의 불안과 불만으로부터 나온다. 이 세계가 우리들의 불안과 불만을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그것을 연료로 삼아 나아가는 한 나 역시 끊임없이 글을 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글이라는 것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 불안과 불만의 실체를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들어가는 말에서)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으면 미끄러질까봐 불안하고, 그 불안이 걸터앉은 삶은 불만이다. 밥상 모서리에 사람들이 앉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불안과 불만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넓고 편평한 삶의 중심지에는 안정과 만족이 보장되지만, 따로 모서리를 특정할 수 없는 둥근 자리라면 몰라도, 중심지가 견고하고 엄연하면 반드시 모서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도형의 원리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보기
▲ 최태섭의 <모서리에서의 사유>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보기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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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문화평론가라는 수식이 붙은 최태섭이 이번에 낸 책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저자의 고백처럼 모서리에 위태롭게 엉덩이를 걸치고 불편한 자세로 써낸 글이다. '딱딱하고 각진 공간' 때문에 안락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모서리를 택한 이유는 이 모서리가 세상이 저자에게 허락한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의 글은 모서리처럼 모난 글이다.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경향신문>, 자음과 모음R, 당비의 생각(온라인), 레디앙, 황해문화, 인물과 사상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 같은 '모서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묶은 책이고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자본주의, 노동, 젠더, 문화적 현상 등이 삐딱하게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 속에 녹아 있는 책이다.

이 책은 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장의 소제목들에 사용된 언어부터 읽는 사람을 당혹케 하고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제 1장은 '검열된 근대화'이다. 검열과 근대화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고, 이 말들이 함께 묶여 사용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제도와 인식 전반의 근대화는 검열이란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불완전한 근대화임을 상기시킨다.

2장은 '문화, 정체성,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지 문화현상에 대해 저자의 독특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으며, 3장의 '우리들의 찌질한 섹스게임'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발언하고, 4장과 5장은 각각 '노동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와 '민주화당한 세계'라는 매우 역설적이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노동과 정치의 속살을 들추어낸다.

최태섭의 사유와 관점을 담아 풀어내는 글을 읽으면 마치 혼곤한 잠에 취해 있다가 찬물로 세수를 한 기분이 든다. 정신이 번쩍 든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에 대한 저자의 시선을 보면, 학교폭력은 한 사회의 구조를 명확하게 반영하는 폭력이라는 것이며, 사회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진실을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는 아무런 고민 없이 '한 줌의 명문대생'을 만들기 위해서만 작동하는 교육체계의 책임이 막중하므로, 학교폭력 문제는 정작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 앞장서 누군가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는 현상으로 본다.

또한 저자가 가장 분노하는 것은 학교폭력이 계속 있어왔고 꾸준히 잔인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여론의 전면으로 소환되어 나온 맥락이라고 했다. 이 선정적인 관심에는 바로 학생인권조례안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관점을 제공한다.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과도하게 전시하여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고, 학생인권조례가 생기면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나? 당연히 겁을 먹고 학생인권조례안을 반대하겠지. 과연 '신의 한 수'인데 이 과정에 아이들의 고통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연민은 없다는 것이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다루면서도, 차별은 단순히 다수자의 무지와 악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권력이 전체의 손쉬운 통치를 위해 사용하는 전략 중의 하나라는 것. 그리고 차별을 받는 자와 차별을 하는 자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는데,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간직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저지르는 차별만큼 현대사의 지독한 아이러니는 없다는 말엔 저절로 공감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수자에 대한 선의가 다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그들의 피해와 무고함을 강조하는 전략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에 의해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종종 수많은 다른 사회적 위치와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을 특정한 소수성과 피해의식에 매몰되도록 만든다. 이뿐만 아니라 선량함과 무해함에 대한 강조는 그들이 약속한 적 없는 기대를 배반했다는 이유로 차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역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낙인과 차별로부터 누군가를 해방시키겠다는 정의롭고 선한 열망이 정작 그 당사자의 삶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본문 62쪽)

또한 저자가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문제는 '된장녀'를 통해 드러나는 남성들의 성 인식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사유를 아주 쉽게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된장녀란 고등교육과 자본주의 소비시장의 발달 속에서 '주체화' 되어가는 여성을 말한다. 자유로운 욕망을 분출하는 된장녀와 동시에 성범죄란 개념도 강화되어 여성에 대한 물리적 접근이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 남성들은 좌절과 수모를 겪는다. 이런 감정들이 된장녀에 대한 가열찬 비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2007년 원더걸스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걸그룹들의 성공은 한국 남성들의 오랜 로망 중의 하나인 '영계 판타지'와 맞물려있다고 했다. 그리고 걸그룹들의 섹스 어필은 더욱 강해지고, 그 덕에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같은 혹은 다른 걸그룹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세대 통합이 기묘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말은 실소를 머금게 한다.

게다가 2010년 5월에 폐지된 TV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서 그 유명한 '루저' 발언에, 곳곳에서 스스로를 루저라고 선언하는 남자들이 등장하고, 루저 발언을 성토하는 각종 인터넷 성전에 대해서도 저자는 딴죽을 건다. 딴죽의 이유는 남성들의 그와 같은 격렬한 반응이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여성의 외모에 대한 남성들의 품평과 판단 기준의 놀라운 발전이 일상적으로 행하여져 왔기 때문에. 꿀벅지를 감별해내는 남자들의 능력, 가슴 크기와 모양에 대한 오래된 담론들, 성형 여부를 판독하는 매의 눈은 여성의 몸을 언제나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재판하므로, 키 180센티미터 아래는 루저라는 한 여성의 발언 하나에 열을 올리는 건 참으로 궁색한 풍경이라고 했다.  

또한 최태섭이 건드리는 노동에 대한 사유도 보라. '노동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소제목을 단 이 글은 노동은 반드시 죽어야 할 것처럼 몰아세우는 자본에 대한 고발이다. 자신들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사회와 개개인에게 떠넘기는데 성공한, 뻔뻔한 한국의 자본주의, 고용주들이 언제나 필요한 것보다 적은 수의 사람을 뽑고 있다는 사실, 한국 사회 전체를 돈으로 관리하려는 삼성, 이미 기업 이상이 되어 법이나 최종심급으로 통하는 삼성, 그 어떤 파업도 대중으로부터 허가받지 못한 노동, 노동은 있지만 노동자는 없는 사회, 노동자라고 하면 외면당하는 사회.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도 무기력하다.(본문 196쪽)

국가와 자본과 용역과 경찰과 군대와 국제질서에 포위당하여 우리는 항복해야 하는가. 용산과 쌍용은 국가와 자본의 선전포고라고. 소유의 더 많은 집중, 온갖 독과점들, 중산층을 몰아내고 그 곳에 '양극화'를 채워 넣고 사회통합을 포기하는 세상을 펼쳐 보인다.

그러니 정녕 우리는 항복해야 하는가. 18대 대선이 끝나고 찾아온 광범위한 환멸을 두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살이 환멸에 대한 극단적 대응이라면, 다른 한쪽에는 모든 연민과 공감과 감각들을 닫아걸고 괴물이 되는 길이 존재한다. 게다가 어느 쪽이든 그 파괴적인 결과들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결국 뭣도 없는 우리들이다. 그저 사람으로 살아남는 것이 우리 시대에는 이토록 어려운 과업이다. 전시도 아니지만,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저 살아만 있어 달라는 말을 전한다. 모두들 부디 살아있으라.(본문 294-295쪽)

아직도 18대 대선이 가져다준 환멸은 이어지고, 그 환멸이 줄어들기는커녕 정치권력과 사회의 퇴행은 차라리 슬프기까지 한데,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나에게도 안락하고 편평한 자리에서 내려오기를 권한다. 나는 여전히 흐리멍텅하다. 그리고 잠시만 방심해도 인식의 날은 무뎌지는데, 최태섭의 글은 이러한 내 인식을 벼리는 숫돌과 같았다. 나는 반성한다.

덧붙이는 글 | <모서리에서의 사유>, 최태섭, 알마, 2013년 10월 7일, 1만 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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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섭 지음, 알마(2013)


태그:#모서리의 사유, #학교폭력, #소수자, #노동에 대한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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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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