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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에는 약탈적인 자본주의 문명과 그 문명에 대항하여 싸우는 원시 생명들이 나온다.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는 나비족이 그들이다. 이 영화는 물질과 정신, 문명과 반문명, 폭력과 평화 등의 대립적인 구도를 통해 재미를 더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나비족이 깃들어 있는 거대한 나무였다.

이 나무는 그냥 식물로서 나무가 아니다. 그 나무는 영혼이며, 생명이며, 문화이고, 안식처였다. 신화와 전설을 생산되는 곳이고, 종족을 하나로 엮어내는 어머니였으며, 아름다움과 사랑의 근원이었다. 물질 세력이 나비족을 몰아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그 생명의 나무를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나무는 생명과 영혼의 중추였다.

나무의 시학, 나무의 생태학
▲ 우석영의 <수목인간> 나무의 시학, 나무의 생태학
ⓒ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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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영화 <아바타>를 생각나게 하는 책, 우석영의 <수목인간>은 나무의 시학, 나무의 생태학이라는 부제가 어울릴 만큼 시적이고 생태적인 아름다움으로 차 있으며, 인간과 나무의 깊은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인 의미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은 우리 인간과 나무의 관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를 전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화석연료 시대'라 부른다면, 인류사의 거의 전 기간은 기실 '목재연료 시대', 또는 '수목 시대'였는데도, 어느새 나무를 잊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나무의 심성을 회복하자는 간절함이 있다.

우리 모두는 나무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수목인간'

저자는 아주 단순하게,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집과 방을 데우고, 방 안의 불을 밝히고, 음식을 해 먹고, 지식을 만들어 전수하고, 문명된 삶을 이어올 수 있었겠는가를 자문한다. 그렇다면 나무가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나무와 같은 녹엽식물의 출현과 진화가 없었다면 인간의 출현과 생존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진화사적 사실로 인해 저자는 인간을 '수목인간'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사회에서 인류의 생물학적 생존, 물질적 생존, 정신적 생존, 이 세 겹의 생존의 매트릭스에 그토록 강력하게, 오래 결합되어온 생물이 이 지구상에 나무 말고 또 있을까. (…)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나무와 여타 녹엽식물이 있었기에 출현할 수 있었고, 그 생물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사적으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류가 수목 시대를 살아왔다는 점에서, 정신사적으로 오랜 세월 나무는 인간에게 삶의 거울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을 '수목인간'이라고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누구든 인간은 날 때부터 지금까지 수목인간이었고, 수목인간이고, 수목인간일 것이다. (본문 17쪽)

그러나 이미 수목 시대를 멀리 벗어나 철의 시대를 넘어, 원자력 시대로 나아가는 형국에 웬 나무 타령이냐는 질문은 당연히 따라온다. 저자는 이 '나무타령'을 통해 '새로운 삶'의 메시지를 남기려고 한다. 이 '새로운 삶'이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법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 나무의 평화

저자는 새로운 삶이란 지극히 소박한 것이라고 하며, 이는 곧 평화를 이루는 삶이라고 말하는데, 평화라는 말은 폭넓은 뜻을 품고 있지만 이 말의 핵심에는 '가해하지 않음'이란 개념이 있다고 했다. 이 '가해하지 않음'을 저자는 나무에게서 발견한다. 나무는 고착 생물로서 다른 생명을 방해하거나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가해하지 않음의 평화를 실현한다. 또한 가해하지 않음에서 그치지 않고, 뭇 생명을 품고 살리며 고양시켜준다는 면에서 도리어 높은 단계를 평화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수목인간이 수목을 잊어버리고 있는가, 인간의 삶에서 수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데, 왜 아무렇지도 않게 잃어버리고 사는가. 그러면서 일상 현실 속에서 끝없이 '가해'하며 살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저자는 시종 추구하면서, 매우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이유 세 가지를 든다.

우선, 오늘날의 법인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 착취뿐 아니라 자연생태계에 대한 대대적이고 체계적인 가해를 동력으로 삼고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법인 자본주의 체제 내의 생산은 폐기물이 자연에게 타격을 주지 않는 길을 고려하지 않는 생산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현대인 모두 소비자로서 이런 식의 체제와 생산에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체제, 생산, 소비는 가짜 평화, 자발적 장님의 평화, 근시안의 평화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런 가짜 평화와 결별하는 것이 새로운 삶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나무와 이어지는 삶을 말한다. 나무는 나무 자신을 관찰하고 관심을 가지며 함께 이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모종의 삶의 예지를, 철학적 묵상의 시간을 선사해주므로.

물론 나무는 단순히 자족하며 휴식하고 평화로이 사는 식물만은 아니다. 나무의 자족, 휴식, 평화는 곧 나무의 노동, 생존 투쟁과도 같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노동, 생존 투쟁은 타 생명에, 몸 바깥의 생화학적 질서에 해를 가하는 활동이 아니라, 도리어 지구 생물의 99퍼센트가 의존하고 있는 산소를 만들어내고 지구의 물-탄소 사이클에 개입하며 기후를 조절한다는 점에서 언제라도 제 몸 바깥의 생화학적 체계에 기여하는 평화 활동이다. 그런 뜻에서 나무의 노동과 생존 투쟁은 언제나 살림의 노동과 생존 투쟁이고, 나무가 자기 아닌 자연과 맺는 관계는 본질적으로 생태 평화의 관계인 거다.(본문 106-107쪽)

나무 자체가 이미 시적이고 평화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시인들과 시들이 담겨있다. 근대 산업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대하는 사유가 '유용성'의 측면에서만 강조되고, 자연이 주는 그 풍부하고 즐거운 생명과 영성을 도외시하게 만든 사유, 굳어 뻣뻣해진 사유와 패러다임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적 사유와 시적 상상력임을 저자는 증언한다.

나무 자체가 이미 시적이다. 파블로 네루다, 쉼보르스카, 타고르, 웬델 베리, 주디스 라이트 등의 외국 시인과 정현종, 오규원, 조정권, 이수익, 허만하, 정진규, 신대철, 고진하 등 국내 시인들의 빛나는 시편들 속에서 나무를 읽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나무를 가까이하며, "평화의 기술을 배우려고", "모든 이가 승자가 되는 생명을 우리 혼에 넣으려고"(타고르) 하는 나무 자체가 이미 평화이다.

나무들은
난 그대로가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정현종 '나무에 깃들여' (본문 67쪽)

광합성, 식물의 기적

이 책을 통해 나무를 읽으면서 배운 또 하나의 사실은 나무의 주된 노동은 광합성이고, 그러므로 나무의 주된 활동 기관은 뿌리가 아닌 잎이라는 사실이다. 나무는 뿌리로부터 위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잎으로부터 아래로 자란다고 했다.

이는 우리의 인식을 유쾌하게 허문다. 나무 하면 뿌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게 우리의 인식인데, 가지와 꽃, 열매에 비해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잎이 나무의 '실질적 뿌리'라고 하니 말이다. 2001년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열렸던 12차 세계 광합성 회의에서 제출한 광합성의 정의를 보자.

광합성 : 매일같이 우리들에게 빵과 와인을, 우리가 들이쉬는 산소를 주고,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생명들을 참 간단하게도 지탱시키는 식물의 기적.(본문 170쪽)

아, 광합성에 관한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정의가 또 어디 있을까. 생태학자 데이비드 스즈키는 "광합성으로 인해 지구상 생명체는 햇빛의 형태로 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포획할 수 있었다." 말하여, 감탄을 자아내는 이 광합성의 정의가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생명 파괴를 불러온 사고 장애 다섯 가지

저자는 <수목인간>을 통해 인간과 나무의 무분리성, 영적이고 시적인 관계, 수준 높은 문명 창출의 근원, 지구 환경을 지키는 생태학적 가치 등을 두루 전하면서, 현재 나무와 숲이 파괴되어 가는 실상도 알린다. 기후변화 시대의 나무와 숲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나무와 숲은 파괴는 누가 왜 감행하고 있는지도 밝힌다. '생태적 자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위기도 보여준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커다란 경제 기계의 나사처럼 되었다고 지적하며, 생태 위기가 가속화되는 이유로 네 가지의 사고 장애를 제시했다. 그 첫번째가 과학기술이 생태 위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과학기술 제일주의'이고, 두번째가 경제 성장은 인간 복지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절대 가치라는 무서운 이데올로기, '성장주의'이다.

세번째는 인간은 자연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는 '인간 예외주의', 그리고 네번째는 자신의 생명이 다른 생명, 환경들과 이어져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분리 착각'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선택한 행위를 옳은 행위로서 정당화하려는 '정당화 사고습성'을 덧붙일 수 있겠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사회적 반대가 미미했던 것도,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도, 박근혜 정부가 밀양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 발전 송전탑 공사를 강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고가 사람들의 마음과 문화의 심층에 고착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했다. '새로운 삶'의 선택이 회복이고 회심(回心)이며 평화인 이유이다.

나무의 둥치는 둥글다. 그러고 보니, 둥치가 네모이거나 세모인 나무는 없었다. 집 뒤의 400년 묵은 은행나무를 아이들과 손을 잡고 둥글게 안은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나무와 함께 둥글게 하나 되었다. 저자도 책을 맺으며 둥글게 하나 됨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둥근 품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나무, 둥글다는 건 모가 없다는 말이다. 모가 난 사물은 타자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화의 핵심가치는 '가해하지 않음'이라는 점에서, 둥긂은 평화의 꼴이다. 품이란 두 팔을 벌려 안을 때의 가슴을 뜻한다. 품는다는 건 안는다는 것, 포옹한다는 것, 품음은 감싸줌, 덮어줌, 따뜻이 해줌, 돌봄, 사랑함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무는 평화가 약동하고 사랑이 선언되는, 둥근 품의 꼴을 한, 생명의 현장이다.(책을 맺으며 263쪽)

덧붙이는 글 | <수목인간>, 우석영, 책세상, 2013년 12월 10일, 1만 3천 원



수목인간 - 나무의 시학, 나무의 생태학

우석영 지음, 책세상(2013)


태그:#수목인간, #나무의 시학, #나무의 생태학, #광합성, #사고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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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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