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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력언론 <뉴욕타임스>는 한 일본인의 죽음을 1월 17일자 인터넷판 머릿기사로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는 일본 언론으로부터 '최후의 황군'이라고 불리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장교였다.

1974년 3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오노다 히로.
 1974년 3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오노다 히로.
ⓒ 뉴욕타임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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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3월 13일 하네다 공항 활주로에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모여들었다. 양복차림의 외소한 일본인이 필리핀발 일본 항공기 트랩에 나타났다.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흔들며 그의 귀환을 환영했고,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그의 이름은 오노다 히로(당시 52세)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 필리핀 루뱅 섬에 파견된 일본군 방첩장교였다. 22세의 나이로 필리핀 전선으로 떠난 그는 30여년이 지나서야 고국으로 귀환했다. 전쟁은 29년 전에 이미 끝난 터였다. 일본 언론은 그를 '최후의 황군'이라고 불렀다.

<뉴욕타임스>는 1월 17일자 기사 (Hiroo Onoda, Soldier Who Hid in Jungle for Decades, Dies at 91)에서 일본정부의 발표를 빌어 "1월 16일 오노다 히로가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의 나이로 숨졌다"고 전했다.

그가 30년 가까이 정글에 남아있던 이유는 '임무'와 '명령' 때문이었다. 1945년 종전을 앞두고 그에게 내려진 임무는 적의 후방교란이었고 마지막 명령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라는 일명 '옥쇄'였다. 대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오노다 히로는 명령에 충실했다. 함께 활동하던 동료 2명이 죽고 그는 필리핀의 정글에 홀로 남았다. 그는 일왕의 항복소식은 필리핀 정글 속에 있던 그에게 닿지 않았다. 일왕에 대한 충성심과 임무수행에 대한 강한 의지로 그는 그렇게 정글 속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바나나와 코코넛 열매가 그의 주식이었다. 여전히 필리핀을 대일본 제국의 적국이라 여기고 필리핀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후방교란의 임무도 수행했다. 그의 생존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1972년 무렵이었다. 가족들이 필리핀 루방섬 정글로 날아가 확성기로 전쟁이 끝났으니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그의 형 오노다 토시로는 "지금 돌아와도 네가 비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설득했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노다 히로는 기자회견과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 가족의 귀환호소를 무시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이 저를 투항시키기 위해 형과 가족들을 데려온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족들 옆에는 무장한 필리핀 병사들이 있었으니까요"

1974년 그의 실종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탐험가 스즈키 노리코는 루방섬에서 그의 자취를 더듬어 오노다와 조우하는데 성공했다. 스즈키는 그에게 일본으로의 귀환을 권했지만, 그는 "상관의 명령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며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태평양전쟁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다니구치(당시 14방면군 참모부 소령)가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다니구치가 루방섬의 정글 속에서 오노다에게 복귀명령을 내리는 촌극을 벌이고서야 오노다는 일본으로 귀환을 결정했다.   

1974년 당시 30여 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환 오노다의 소식을 접한 세계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그가 수많은 세월을 정글에서 허비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유독 일본열도는 열광했다. 일본인 다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십 년의 고난을 견딘 오노다에게서 충직한 사무라이를 떠올렸다.

전후 성장으로 경제대국으로 도약했지만 전쟁패배의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일본인들에게 오노다 히루는 정신적 자존감을 세워준 영웅이었다. 마이니치신문은 당시 사설에서 "오노다는 일본인들에게 인생에 있어서 물질적인 측면과 맹목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고 평가했다. 오노다의 29년간의 충직한 정글투쟁을 통해 일본의 정신적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를 중심으로 우익정치권 역시 그를 통해 일본국민들에게 천황제와 국가주의를 선전했다. 오노다 히로는 그렇게 일본의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태그:#오노다 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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