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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계기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4년 후 예상을 깨고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인민에게 이양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선언은 오히려 그에게 '인간 이상의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와 로마의 제1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칭호를 받게 되는 결과로 돌아온다.

이로써 사가들이 말하는 원수정(元首政·프린키파투스)이라는 정치체제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그의 양부 카이사르의 실패(공화정을 급격히 폐하려다 암살된 것)를 피하려고 공화정의 형태라는 포장지를 교묘하게 두른 위장된 신체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모험을 한 것은 로마시민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상대의 패를 완전히 읽고 자신의 카드를 던졌던 것이다. 자기가 권력을 내놓겠다고 하면 시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당신 밖에는 로마를 구할 이가 없으니 대권을 받아 주소서' 할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분야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여하튼 권력을 양도하겠다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절대적 권력이었다. 먼저 로마의 광대한 속주 중 로마 군단이 배치된 속주가 그의 직할로 들어왔다. 그가 직접 통제하는 속주는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이집트로 로마제국 영토 중 알짜배기가 거의 거기에 해당한다. 이로써 로마군단 대부분이 그의 절대적 권력 하에 들어왔고, 속주의 관리(총독) 임명권을 장악했다.

역사상 가장 간교한 권력자,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다'

그 후에도 그의 정치적 실험은 계속된다. 기원전 23년 그는 또 한 번의 정치 도박을 한다. 그가 계속 맡아 오던 집정관을 돌연히 사퇴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 그때까지도 여전히 저항세력으로 남아 있던 공화파의 견제를 받는 것을 무마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그 결과로 돌아온 것도 더 큰 권력이었다.

그가 이러한 정치적 용단을 내리자 원로원은 그에게 종신 호민관의 권한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호민관이 아니면서도 호민관의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그 후 몇 년에 걸쳐(기원전 22~19년) 로마시민들이 그를 집정관으로 선출했음에도 그는 거절했다. 그러자 로마시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로마의 독재 관직이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그것마저 사양했다.

그러나 기원전 19년의 경우는 달랐다. 그 해 로마에서 소요가 일어나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달려와 종신 집정관을 부여했다. 이제 그는 정식 집정관이 아니면서도 집정관의 명령권(consulare imperium)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막강한 권력 하나씩을 얻었다. 기원전 18년에는 원로원에 남아 있는 마지막 반대파마저 일시에 제거함으로써 (원로원 의원 800명 중 200명 축출) 원로원을 완전히 그의 신체제 프린키파투스의 순응기관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원로원은 존재하나 그 기능은 상실되었다.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프린키파투스 체제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형식적으로는 로마의 제1 시민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이었고, 황제였다. 그는 임페라토르(최고사령관)로서 로마의 모든 군대를 통제했으며, 이집트를 왕의 자격으로 다스렸고, 속주에서는 금화와 은화를 주조했다. 로널드 사임은 그런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이렇게 말한다.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일개 시민이었으며 정무관이었던 그가 군단병들에게는 임페라토르였고, 제국의 예속민들에게는 왕이자 신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관직 임면과 승진을 좌우할 수 있는 거대하고 잘 조직된 당파의 영수였다. "(로마혁명사 1권, 465쪽)

이게 바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키파투스의 실체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은 35세 이후 공식적으로 이렇게 바뀐다.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Julius Caesar Augustus).

최고의 2인자, 아그리파를 만나다

 로널드 사임은 아그리파의 초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초상들은 그가 엄격하고 장중한 얼굴 모습에 화가 난 듯하고 도도하며 의연한 인상을 지닌 만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 '아그리파', 루브르 박물관 소장 로널드 사임은 아그리파의 초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초상들은 그가 엄격하고 장중한 얼굴 모습에 화가 난 듯하고 도도하며 의연한 인상을 지닌 만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 Marie-Lan Ngu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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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의 제1인자,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는 두 명의 충신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해 보자.

첫번째 사나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기원전 63~12). 이 사람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그냥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다고 소개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충신, 아니 충복, 아니 최고의 동료 등등… 아마도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승리에는 아그리파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가계가 로마의 귀족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슨 계기에서인지 옥타비아누스와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웠다. 나이도 동년배였다. 같이 배우고 같이 놀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아들로 입적되었을 때, 그는 카이사르의 눈에 띄어 옥타비아누스의 조력자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르가 벌인 내전에 참전했을 때 카이사르가 거기에서 그의 활약을 눈여겨 보았던 모양이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로마군단에서 훈련시키기 위해 아그리파를 붙여 마케도니아 아폴로니아에 보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4개월 전이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아그리파는 국방장관 혹은 참모총장의 역할을 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의 마지막 전투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종지부를 찍고 사실상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탄생시켰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전쟁에 참전해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모범적인 겸손을 보이면서 자세를 낮추었다. 심지어는 그는 승전자의 영예로 주어지는 개선식마저 마다하고 자신의 일을 조용히 해 나갔다. 아마도 아그리파는 절대권력자 밑에서 2인자가 살아남는 방법을 일찍이 터득한 모양이다.

절대권력자, 동서고금 막론하고 2인자를 두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절대권력자는 자신을 넘보는 2인자를 두지 않았다. 1인자로선 2인자가 자칫하면 딴 맘을 먹지 않을까 불안감을 갖기에 보통 2인자라 지칭되는 사람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우리 역사를 보라. 박정희 정권하에서 2인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가. 박정희 1인 절대권력 밑에 몇몇 권력자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권력을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하다고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나 경호실장이 그런 권력자들이었다. 김종필, 김형욱, 박종규, 이후락, 차지철, 김재규 등등… 이들에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이 허락되었으나 그것은 일장춘몽과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결코 항구적인 권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항상 충성경쟁을 시켰고, 어떤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칼을 뽑아 잠시 허락했던 권력을 회수했다.

김형욱의 경우 중정부장으로 권력을 즐겼지만, 그도 언젠가부터 박정희의 눈 밖에 들더니만 이 땅을 조용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인생이 되었다.

이런 예는 비단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다. 최근 북한에서 일어난 사태, 장성택 사건을 보면 다시 한 번 절대권력자 밑의 2인자가 얼마나 위험한 살얼음판을 걷는 권력자인지를 알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누가 보아도 명실상부한 2인자라 여겨지던 장성택이 어느 날 갑자기 숙청되어 처형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게 바로 2인자들의 운명이다.

아그리파, 2인자의 덕성을 가졌나

그럼 아그리파가 본질적으로 1인자의 총애를 받는 2인자에 적합한 덕성을 가진 자였을까. 2인자로서 어떻게 처신하면 절대권력자로부터 신임을 받아 그 생명을 롱런할 수 있을지 그는 제대로 알았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개인적으로는 야망도 있고 미래를 도모할 능력도 있었지만,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충실한 2인자로 남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는 것이다. 로널드 사임은 아그리파에 대하여 이런 인물평을 내놓는다.

"…아그리파는 로마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야망을 다 갖고 있었다. 그가 명예 수여를 거부한 것은 겸손하여 주제 넘게 나서지 않는다고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응집된 야망, 실제 권력에 대한 한결 같은 열정의 표시, 꾸밈과 평판에 개의치 않는다는 표시이다. 아그리파의 본성은 고집이 세고 오만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에게는 굴복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굴복하지 않았으며 아우구스투스에게도 언제나 기꺼이 굴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로마혁명사 1권, 491쪽)

한편, 아그리파는 군사적 차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절대적 참모였지만 로마를 제국의 수도답게 꾸민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로마는 성장하는 도시였지만 최고의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재위 기간 로마는 인구 1백만 명이 살아가는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었고, 거기에 걸맞는 기반시설이 갖추어졌다. 도로가 정비되었고, 수로를 통해 들어 오는 맑은 물은 로마 시내 어디서든 콸콸 쏟아졌다. 대리석으로 다듬어진 신전과 공회당, 그리고 시장이 여기 저기에 만들어졌다.

로마 건축의 걸작품인 이 판테온은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원래는 이곳에 아그리파가 만든 것이 있었다. 판테온 현관 주랑 위에 아그리파의 이름이 보인다. 다시 세워진 신전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원 건축주인 아그리파의 이름을 남겼다.
▲ 로마 판테온 로마 건축의 걸작품인 이 판테온은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원래는 이곳에 아그리파가 만든 것이 있었다. 판테온 현관 주랑 위에 아그리파의 이름이 보인다. 다시 세워진 신전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원 건축주인 아그리파의 이름을 남겼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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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사책임자가 바로 아그리파였다. 지금 로마에 가면 볼 수 있는 로마건축물의 걸작 판테온도 아그리파가 건축한 것이다. 판테온은 그 후 팍스 로마나의 한가운데를 지배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나 하드리아누스는 그 문설주에 자신의 이름 대신 여전히 아그리파의 이름을 남겼다. 오늘날도 판테온 앞에 서면 아그리파의 이름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태그:#세계문명기행, #로마문명이야기,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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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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