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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 한 장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 한 장면.
ⓒ 영화 전태일 제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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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0월 24일 오후 1시

전태일은 노동청 출입기자들한테 오늘 오후 1시께 데모가 있을 것이니 평화시장에 와서 취재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시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때 이미 평화시장 일대에서는 시장 경비원의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알고 보니 형사들도 시장 일대 이곳저곳에 깔려 있었고, 각 작업장 중에서 기업주들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곳이 많았다.

삼동회 회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시장 경비실에서 오 형사가 회원들을 부르며 손짓했다. 순간, 오늘의 데모 계획이 새어나간 것도, 경비가 삼엄한 것도, 업주들이 공장 문을 닫고 노동자들을 내보내지 않는 것도 오 형사의 능구렁이 같은 짓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삼동회 회원들의 주위를 맴돌면서 능구렁이 짓을 하더니 며칠 전에는 데모하라고 부추기면서 도와준다고까지 했었다.

전태일과 서너 명의 회원들이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서 오 형사를 만났다. 오 형사는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왜 여태까지 한 가지도 개선이 안 됩니까?"

회원들이 큰소리로 따졌다.

"오 형사, 정말 이렇게 할 겁니까?"

오 형사와 회사 측 사람들은 유들유들 웃으면서 시간을 끌며 조롱 섞인 말은 던졌다. 그들은 '현실'을 들먹이며 회원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삼동회 회원들이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자 그들은 그때야 당황한 빛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11월 7일까지는 선처해 주겠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려봐라."

그들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삼동회 회원들은 화를 삭이며 '한 번만 더 기다려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국민은행 앞길로 내려왔다. 11월 7일, 약속한 날짜가 되었건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다시 모였다. 전태일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해버리자. 있으나 마나 한 법이니 우리 손으로 태워버리는 거다. 우리 모두 희생할 각오로 싸우자!"

그날 정해진 거사 일자는 11월 13일. 시각은 변함없이 오후 1시 전태일을 포함한 세 명의 회원이 플래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플래카드에 쓸 구호를 정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

일단 구호가 정해지자 그들은 세부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연설은 탁자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가 노동자들이 모일 때 그 자리에 내놓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그 위에 올라가서 근로기준법의 중요 조문을 소리 내어 읽기로 했다.

"이런 조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 지켜지지도 않는 이 따위 허울 좋은 법은 화형에 처해버리자!"

이러한 취지의 선동연설을 결행하기로 했다. 선동연설이 끝나면 곧바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전태일이 계속해서 구호를 선창한 뒤 삼동회 회원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따라 외치면서 데모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화형식을 위하여 전태일은 휘발유통을 하나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들의 계획이 세워지고 나자 전태일이 삼동회 회원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

그들은 전태일의 이 말이 바로 목숨을 던질 엄청난 결심을 품고 그 자신의 마음을 다지는 말인 줄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1970년 11월 13일 낮 1시

평화시장 일대에 긴장감이 돌았다. 경비원들과 출동한 경찰들이 이곳저곳에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오늘 몇몇 깡패 같은 놈들이 주동이 되어 좋지 못한 움직임이 있으니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 된다."

각 사업장에서는 업주들이 근로자들에게 협박하며 단속을 강화하고 있었다. 경비원들과 형사들이 국민은행 앞길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그러나 업주들의 협박과 경찰, 경비원들의 감시망을 뚫고 삽시간에 약 5백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국민은행 앞길에 모여들었다.

이 시각, 삼동회 회원들은 형사들의 눈을 피해 평화시장 건물 3층의 어둡고 침침한 복도 구석에 모여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회원 중 몇 사람은 이미 시장 경비원들에게 끌려가서 회사 사무실에 감금된 처지였다. 그날 아침 회원들은 플래카드를 몸에 감고 옷 속에 감춘 뒤 시장에 나왔다.

드디어 1시 30분

삼동회 회원들은 플래카드를 꺼내어 펼쳐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2층 복도까지 왔을 때 형사 두 사람이 뛰어오더니 플래카드를 빼앗으려 했다. 전태일은 구호를 외치며 플래카드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 플래카드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플래카드를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 사이에 밀치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종이로 만들었던 플래카드가 어이없이 쉽게 찢겨 나갔다.

"좋다! 플래카드가 없으면 우리가 못할 줄 아느냐!"

몇몇 회원들이 복받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국민은행 앞길로 곧바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소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전태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니네들 먼저 내려가서 담뱃가게 옆에서 기다려라, 난 좀 있다 갈 테니."

그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그의 말에 따라 전태일 혼자 남겨두고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갔다. 삼동회원들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웅성거리던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경비원들과 경찰들의 몽둥이질에 밀리며 이리저리 내몰리고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건만 신문기자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먼저 내려온 회원들은 초조해하며 담뱃가게 옆에서 전태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약 10분 뒤에 전태일이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 친구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가 전태일은 눈짓으로 그 친구를 사람이 뜸한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누구 한 사람 죽어야될 모양이다."

전태일은 음성을 낮춰 말했다.

"내가 눈짓을 보내면 성냥을 켜서 내 몸에다 불을 댕겨라."

그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성냥을 든 친구는 어제 저녁에 태일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쇼를 한판 벌여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 달라는 전태일의 부탁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머리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퍼뜩 스쳤지만 설마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한테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전태일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한 되가량의 석유를 온몸에 끼얹고 내려왔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전태일은 사람들이 아직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쳐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을 쉬게 하라!"
"근로자를 혹사하지 말라!"

전태일은 몇 마디 구호를 짐승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입안으로 화염이 확확 들이찼던지 나중에 쏟아놓은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으로 변했다. 때마침 그 자리에 서 있었던 한 회원이 근로기준법 책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삼동회가 계획했던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 분신 장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 분신 장면.
ⓒ 영화 전태일 제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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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3분가량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누구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 친구가 뛰어 나와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불은 꺼졌다. 그때야 흩어지고 있던 노동자들과 길 가던 행인들까지도 갑자기 일어난 불길을 보고 와서 웅성거렸고, 뒤늦게 평화시장에 나타난 기자들도 뛰어와서 수첩을 꺼내 들고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불길이 꺼지고 잠시 후 전태일은 다시 일어났다. 비틀거리더니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

그의 몸은 옷의 엉덩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신이 숯처럼 시커멓게 타고, 온 살결은 화상으로 짓물러 터졌다. 눈까풀은 뒤집혔고, 입술은 퉁퉁 부르터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간의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 참혹한 몰골로 전태일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듯 울부짖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신음을 터뜨리듯 몇 마디를 토해냈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뒤 전태일은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때야 구급차의 요란한 경적음이 들렸다. 삼동회 친구 두 사람이 숯검정이 된 전태일을 차에 올려놓았다. 전태일은 근처 병원 메디컬센터로 옮겨졌다. 그 시각이 오후 2시였다.

전태일이 분신했던 자리를 표시한 동판.
 전태일이 분신했던 자리를 표시한 동판.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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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은 김영문의 이야기를 눈물 한 점 흘리지 않고 다 들었다. 말하는 김영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있다. '갑자기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당해서 몹시 긴장하고 있겠지' 이소선은 오히려 안쓰러운 눈길로 김영문을 바라보았다. 김영문은 또 이소선이 놀랄까봐 그의 손을 꼭 붙들면서 떨고 있었다.

"너무 놀라지 마라. 우리가 할 일을 생각해 보자."

이소선은 김영문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럼 나는 무얼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풀 한 포기라도 당신의 뜻이 아니면 거두어가지 않으신 하나님, 당신의 아들이 지금 ... "

저자 민종덕은...  
민종덕 기자는 1974년 전태일 일기를 처음 접하고 난 뒤 감동을 받아 곧바로 이소선 여사를 찾아가 평화시장 청계피복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77년 이소선 여사 구속과 노동교실 폐쇄에 맞서 투쟁하다 부상당했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에 맞서 투쟁하다 수배당하기도 했다. 1984년 4월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노학연대 투쟁을 했다. 1985년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 위원장에 피선되었다가 그해 9월 청계피복노조합법성쟁취투쟁과 서노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1987년 7월 석방되어 대우조선 이석규열사 장례투쟁에 참가했다 수배되기도 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상임이사,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장을 1982년부터 26년간 지냈다. 2005년 청계천에 전태일 거리·다리 조성사업을 기획하고 집행위원장을 맡아 진행했다.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이소선 여사로부터 구술을 받아 <어머니의 길>을 집필했다. 당시 <어머니의 길>은 1979년까지 기록하고 이후 삶은 차후 수정 보충해서 완결하기로 약속함으로써 이번에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집필하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사람 이름에 존칭을 붙이지 않은 것은 글의 흐름을 위해 생략했으니 양해 바랍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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