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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4일 오전 9시 1분]

중국인들은 2009년 을축년을 맞았다. 중국에서 소는 근력의 상징이자 농민들의 반려 동물로 몸을 바치다가 죽어서도 버릴 것 하나 없이 주고 가는 동물이다. 전년에 다사다난했던 해를 잊고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은유였다.

하지만 전해 말 미국에서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로 중국인들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를 크게 받을 것으로 전망됐다. 다만, 월가에서 소가 상승 장세를 의미했기에 중국에서도 이 해 경기 부응에 대한 기대가 컸다. 미국에서도 1월 20일에 버락 오바마가 44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다.

류지아주이 인근은 중국 최고의 금융타운으로 부각했다
▲ 푸동의 야경 류지아주이 인근은 중국 최고의 금융타운으로 부각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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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중국 국무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전해 경제수치를 발표했다. 국가통계국 마지엔탕(馬建堂)이 밝힌 2008년 중국 국내총생산(GDP)는 300,670억 위안(한화 5400조 원가량)으로 전년 대비 9%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반기 세계금융위기에서도 이런 성장 추세는 안도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또 국내총생산으로 봤을 때, 세계 경제규모 3위로 도약을 확인한 해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월과 2월의 성장률이 마이너스 17%와 26%를 기록하며 동해안과 광둥의 공장지대는 위기를 맞았다. 공장 폐쇄로 쓸쓸히 귀향하는 이들도 많았고, 도시로 나온 농민공들 역시 다시 건설 경기가 살아날지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해 춘지에는 1월 26일로 비교적 일렀다. 중국에서 춘지에의 가장 큰 민속놀이는 화약을 터트려 화를 쫓고 복을 부리는 '방파오' 놀이다. 700년 전 중국의 원나라를 돌아보고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폴로(1254~1324) 조차 "중국은 전쟁에 쓰는 화약보다 방파오 놀이에 쓰는 화약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했던 전통은 현대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방파오 놀이는 섣달그믐에서 설날로 가는 시간에 절정을 이루고, 다음에는 5일 간격으로 놀다가 보름인 음력 1월 15일에 끝난다. 이해에는 2월 9일이 위앤샤오지에(元宵節)로 불리는 보름날이었다.

6월 개관 앞둔 고급 호텔에 불꽃놀이 하던 화약이 붙어 전소

공식 피해액은 300억원으로 발표됐지만 실질 비용은 그보다 휠씬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 cctv 화재사건 모습과 이후 앙상한 모습 공식 피해액은 300억원으로 발표됐지만 실질 비용은 그보다 휠씬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 중국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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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날 중국 역사상 가장 값비싼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낙성식을 앞둔 중국중앙텔레비전의 북쪽 건물 옆 공터에서 불꽃놀이를 하던 사장단의 화약이 불씨가 되면서 준공 직전의 이 건물을 전소시킨 것이다.

다행히 메인 건물은 불이 번지지 않았지만, 전체 1조 원의 공사 비용은 물론이고 6월 개관을 앞둔 상태라 고급 호텔로 쓰이기 위한 시설과 방송장비 등도 다수 들어와 있어 실제 피해액은 전체 공사비에 상응한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발표된 피해액은 1억6000만 위안으로 한화 300억 원가량이었다. 이 수치로만 해도 전무후무한 거대한 불꽃놀이를 한 셈인데, 이후 약간의 자제령이 있었지만, 이후에도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불꽃놀이를 막지는 못하고 있다.

3월은 1년 전에 있었던 티베트 시위로 인해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철저한 통제로 별다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몇 지역에서 승려들의 분신이 일어났지만, 더 확산하지는 못했다. 티베트는 물론이고 신장 위구르 지역 등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은 자치구나 자치주 등으로 운영되지만, 한족의 급속한 현지 이주로 인해 전체 인구에서 소수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을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이다.

거기에 변방의 대도시에는 도심 가운데가 중국 인민 해방군이 주둔하고, 군부대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소수민족이 반정부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갈수록 줄고 있고, 그런 상황이 갈등을 잠재우고 있는 형국이었다.

봄이 되자, 동아시아를 흔든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4월 5일 통신위성 '광명성 2호'를 발사했다. 중국은 통신 위성이라고 인정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장거리 로켓과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위험성을 제기해 긴장관계가 고조됐다.

거기에 5월 25일에는 2차 지하 핵실험까지 진행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북한이 핵과 이것을 실어나를 수 있는 장거리 로켓을 보유한다는 것은 미국에는 위협을, 일본에는 무장 논리를, 한국에는 직접적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한반도의 안정이 자국 경제발전의 필수요건 중에 하나였던 중국에도 이런 상황은 위기로 인지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왕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자비행을 베푼 김지장 스님의 활동은 한중간에 가장 인상 깊은 인적 교류다
▲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지우화산 육신보전 신라왕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자비행을 베푼 김지장 스님의 활동은 한중간에 가장 인상 깊은 인적 교류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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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짙어갈 무렵 내게도 큰 슬픔이 찾아왔다. 어릴 적 무등산에서 만났던 다형 김현승의 아픔을 나도 겪었다. 우리 가족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저지앙 푸투오산(普陀山)과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우화산(九華山) 등을 다녔다. 지우화산의 지장보살은 다른 불교 명산들과 달리 관념적인 신이 아닌 김교각 스님이라는 인물과 동격이다.

신라왕자였던 김교각 스님(696~794)은 신분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서 수많은 사람을 깨우치고, 훗날 등신불이 된 살아있는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었다. 지우화산 어디에나 한글 안내판이 있어, 스님의 고국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그리고 앞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그만큼 중국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인물이 없을 것이다.

2009년 한국의 5월은 유난히 잔인했다

한국에 돌아와 한숨을 쉬고, 집 거실에 누웠는데 같이 근무했던 신문사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며 텔레비전을 보라는 것이었다. 혼몽한 일주일이 갔다. 투표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귀국했던 2002년의 기억 그리고 대통령의 조금 경솔했던 발언에 대한 비판하며 썼던 글의 기억 등 모든 것이 허무하게 하늘로 날아갔다. 유난히도 잔인했던 그해 5월은 그렇게 갔다.

6월 29일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일으킨 전 나스닥 증권 거래소 이사장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뉴욕남부 연방법원이 150년 형을 선고했다. 중국으로서는 미국 금융위기로 인한 파장이 있었지만, 경쟁자의 도태는 자신에게 기회가 된다는 원리가 있어서 위로가 되기도 했다. 우선 중국은 이 사건 등을 계기로 미국이 더이상 국제금융시장의 보안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세계가 확인했다고 판단했다. 위안화를 국제기축통화로 부상시키는 작업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셈이다.

여기에는 당시에도 2조 달러를 바라보는 외환보유고가 작용했다. 4월 1일 있었던 G20 정상회의에 앞서서 인민은행 총재가 달러의 기축통화 유지 능력에 대한 포문을 던졌고, 9월 중순 중국 따리엔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례 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세계 금융위기 1년 만에 혼란을 막게 한 힘은 중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이었다는 것을 강조했고, 이를 반박하기에 쉽지 않았다. 더욱이 전해 중국 인권 문제를 거론했던 프랑스조차 중국이 떠안기는 경제협력의 메시지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티베트는 무사했지만, 이해 7월 5일에는 우루무치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지역의 원래 주인인 위구르 인들과 한족들 간의 노골적인 감정대결의 형태였다. 아랍민족에 가까운 위구르인들과 한족 간은 명확한 표시가 난다. 우루무치 상권의 분할, 종교적 차이 등이 많았는데, 이런 사건이 노골화된 것이다.

중국은 분명한 지배자였지만 위구르 인들도 아랍 민족이 뒤를 바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조건 물러서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200명이 사망하고, 1천8백 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다시 역사속 미궁의 한 계단을 채우는 미봉책으로 마무리됐다.

그해 10월 1일은 중국이 탄생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톈안먼 행사는 더욱 크고 화려했다. 공식적으로 10만 명이 모인 가운데 56개 민족이 건국 60주년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56문의 대포가 60발의 예포를 발사하며 행사가 시작됐다. 이후 후진타오 주석과 장쩌민 등 전·현직 원로들은 톈안먼 망루에서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을 봤다. 땅에서는 대륙 간 핵탑재 탄도 미사일 등이 하늘에서는 중국 자체개발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 등이 에어쇼를 펼쳤다.

이후 후진타오가 중국기업 이치가 만든 300만 위안짜리 고급 승용차로 분열한 후 10만 명이 국민대행진을 벌였다. 오성홍기 뒤에는 중국을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먹는 문제를 해결한 덩샤오핑, 당대를 연결한 장쩌민과 현직 주석 후진타오의 초상화가 차례대로 따라갔다. 행사 막바지에는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보다 두 배나 많은 30만 발의 폭죽이 베이징 밤하늘에 터지며 분위기를 돋았다.

중국 역사에서 건국 60년은 결코 녹녹한 숫자가 아니다. 처음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16년을 채우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왕조인 명나라나 청나라도 개국한 후 30~40년도 되지 못해 큰 위기를 맞았다. 2대 군주를 둔 치열한 형제간의 혈투가 있은 후 극복해야만 긴 왕조가 보장됐다. 중국이라고 해도 완전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과거처럼 황제가 대를 물려, 정권을 주지 못했지만 태자당, 공청단, 상하이방, 청화방 등 명백한 편 가르기가 있었다. 물론 이런 파벌이 있었지만, 위로는 7명이 진행하는 상무위 회의부터 아래로는 정치국 회의, 전인대 회의 등의 절차가 있어 일방적인 독주는 불가능했다.

문제는 분배 가능한 자원에 있다. 중국에서 가장 확실한 부의 출처는 원재료 독점이나 제도 독점이 가능한 부분이다. 문제는 이제 가용할 수 있는 이 분야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보통 상무위원 하나가 퇴진하면 동반 퇴진하는 식솔은 백 명을 상회하는데,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자원이 갈수록 가라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원이 다시 재정립되지 않으면 국가 갈등의 위험을 커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후진타오 정부까지 성장률을 8%로 유지하는 바오빠(保八)를 포기하고, 그 아래로 성장률을 관리하는 상황이라 나눌 수 있는 자원은 더욱 축소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건국기념일 행사가 끝나자마자 10월 4일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다. 김정일이 직접 공항에 나와 원총리를 영접했고,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홍영희씨가 직접 꽃다발을 전달했다. '꽃파는 처녀'는 김일성이 1930년대 중국 지린성 창춘 일대에서 벌이는 활동을 배경으로 한 가극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공연이다. 1972년에는 김정일이 직접 영화 제작을 주도한 것으로도 알려졌는데, 나름대로 북한과 중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콘텐츠로 생각한 것이다.

김정일, '꽃파는 처녀' 주인공 홍영희씨에 직접 꽃다발 전달 

보저우는 조조의 고향이자 화타의 고향이다.
▲ 조조 고향인 보저우 시내에 있는 조조 석상 보저우는 조조의 고향이자 화타의 고향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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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가기 얼마 전인 12월 27일 허난성 안양현 안펑샹(安豊鄕) 까오쉐춘(高穴村)에서 조조묘가 발굴됐다. 조조(曹操 155~220)는 삼국시대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유교를 숭상한 중국 황제들이 촉한정통론을 내세우면서 상대적으로 폄하된 인물이다. 하지만 당대 중국에서는 뛰어난 국가 경영능력이나 인재 등용, 위기대처 능력, 문화적 소양이 재평가받으면서 다시 살아나는 추세였다.

이에 맞추어 묘가 발굴되자 동작대의 실제 지역으로 알려진 안양지역은 흥분했다. 수 차례 진위논란이 있었지만, 보름 가량 지난 후 중국사회과학원 고고 연구소가 다시 진짜 묘로 추정된다고 확인했다.


태그:#중국, #상하이,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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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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