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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항공의 보잉 747-400
 영국항공의 보잉 747-400
ⓒ 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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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2년 6월 24일 호주로 향하던 영국 항공기가 인도네시아 자바 섬 남단을 지나갈 무렵이었다. 영국 조종사들은 조종실 창문을 통해 비행기 엔진에서 예사롭지 않은 붉은색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동시에 객실에는 알 수 없는 연기가 차기 시작했다.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은 처음에는 담배연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연기가 짙어졌고, 연기에서는 유황냄새도 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1번 엔진이 꺼지더니 몇 분 안 되어 2번 엔진이, 또 다시 몇 분 후 3, 4번 엔진이 연달아 꺼졌다. 4개의 엔진에 연료가 충분히 남아있었음에도 모조리 꺼져버린 것이다. 베테랑 조종사들은 이런 기이한 현상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여간 모든 엔진이 꺼진 비상상황에서 영국항공기 747기는 순식간에 글라이더가 되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은 이대로는 항공기가 호주까지 도저히 못 가겠다고 판단하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국제공항에 비상착륙 하기 위해 기수를 자카르타 쪽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조종사들은 비행기 엔진에 화산재가 스며들어 시동이 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곤 승객들에게 비행기가 왜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는지 차분하게 안내방송을 했다.

그러나 안내방송을 들은 승객들은 창밖 비행기 엔진에 불이 붙은 것을 봤고 충격을 받았다. 또한 연기가 기내로 새어 들어오고 엔진이 꺼진 비행기가 급강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승객들은 공포에 떨었다. 머리 위에서 산소마스크까지 떨어지자 승객들은 공포로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2010년 4월 15일 유럽에 닥친 '재앙'

많은 승객들이 기도를 하거나 아무 종이에다 가족이나 연인에게 남길 유언을 쓰기 시작했다. 초조한 조종사들은 꺼진 엔진을 되살리기 위해 계속 재시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꺼진 엔진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몇 번의 불안한 엔진 재점화 시도 끝에 조종사들은 마침내 4번 엔진을 재점화 하는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뒤이어 나머지 1, 2, 3번 엔진도 모조리 재점화되었다. 그 와중에 다시 4번 엔진이 꺼졌다.

베테랑 조종사들은 엔진 3개만으로 자카르타 공항에 비상착륙하는데 성공한다. 승객과 승무원 중 사상자는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사고항공기 상태를 조사한 정비사들은 인도네시아 갈랑궁 화산의 화산재가 엔진에 들어가 항공기 엔진이 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사고 당일 인도네시아의 갈룽궁 화산이 폭발했고 화산이 폭발하면서 날아온 화산재가 엔진에 유입돼서 결국 엔진이 꺼진 것이다.

이 사고를 계기로 영국정부는 그동안 무관심했던 화산폭발과 항공기 운항 사이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10년 4월 15일,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 지역에 큰 재앙이 닥쳤다. 아이슬란드에서 화산이 폭발했고 그 화산재가 온 유럽 하늘을 덮어버린 것이다. 28년 전 인 1982년 인도네시아 화산재로 항공기 대형 참사를 맞을 뻔했던 영국정부는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하자 즉시 영국으로 출입하는 모든 항공기의 운항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영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편의 하늘길이 전면 폐쇄되었다.

영국의 비행금지가 발령되자 약 15만 명의 영국인들은 외국에 발이 묶였다. 이들이 한꺼번에 기차역과 항구로 몰리면서 기차와 선박의 모든 표는 매진되었다. 외국에 나가있는 영국인들이 귀국할 길이 막힌 것이다.

사재 털어 국민 수송작전 벌인 영국 언론인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
ⓒ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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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영국의 언론인 댄 스노(1978~)는 2010년 4월 18일, 열차와 배 표가 매진되자 5척의 소형 고무보트를 자비로 임대해 개인적으로 '수송 작전'에 나섰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유럽대륙에 발이 묶인 영국인들에게 자기가 임대한 보트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메시지를 띄웠다. 그리고 스노는 프랑스 항구에 모인 25명의 영국인들을 한 차례 영국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그 후 스노는 이 보트 '수송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프랑스 정부가 보트 안전을 문제 삼아 추가 운항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정부의 항공기 전면 운항금지 조치에 여러 항공사들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하루에만 천문학적인 숫자의 영업이익 손실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곧 세계 유력항공사들의 항의와 불만이 영국정부에 쇄도했다. 이 항공사들은 2010년 4월 15일부터 19일까지 무려 5일째 항공기 운항을 금지시킨 영국 때문에 유럽에 항공 대란이 일어났다고 영국정부를 성토했다.

5일간의 항공금지로 천문학적인 영업 손실을 입은 항공사들은 이후 "화산재 발생 후 시간이 많이 지나 이젠 안전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국정부의 계속적인 항공금지 조치는 너무 엄격하다"면서 "수십 만 명의 영국국민들이 외국에 발이 묶여있는 상황에서 영국정부는 세계 항공사들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규제를 가하고 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급기야 국제항공운송협회 지오바니 비시냐니 회장은 같은해 4월 19일 "화산재 성분에 대한 측정도 없이 이론적 접근으로만 비행금지가 이뤄졌다"며 영국정부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더욱이 일부 국제항공사들은 천문학적인 영업 손실에 대하여 유럽연합과 영국정부에  막대한 액수의 손해배상 소송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영국 정부는 승객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세계 유수항공사들의 압력 때문인지 유럽의 몇 몇 공항들은 즉시 운항을 재개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5대 공항 가운데 4개가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정부는 여전히 "승객 안전"을 이유로 항공사들의 손해배상 소송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항공운항을 전면 금지했다. 그리고 4월 19일, 당시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은 비상각료회의를 소집하면서 특명을 내렸다.

특명의 내용은 아이슬란드 화산폭발로 해외에서 발이 묶인 영국국민을 데려오기 위한 비상조치를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브라운 총리는 해외에 있는 영국국민들이 스페인 마드리드로 집결하면 버스와 군함을 이용하여 귀국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화산재의 영향에서 그나마 조금은 자유로운 나라가 스페인이었고 그래서 스페인행 비행기는 일부 정상 운행되고 있었다.

브라운 총리는 특명을 발표하면서 "스페인 총리로부터 비상 수송에 대한 협조를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피터 맨덜슨 영국의 상무장관은 "상황이 악화하면 민간 선박도 동원해 국민들을 집으로 데려올 계획입니다"라고 발표했다. 이후 특명에 따라 스페인으로 보내진 영국 군함은 최초로 항구에 모인 영국인 490명을 태우고 도버항구로 출발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보다는 사람살기 좋은 나라

영국 정부는 국민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영국 정부는 국민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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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총리의 특명이 발표된 다음날인 4월 20일 아침이 밝자, 영국의 하늘은 화산재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자 영국정부는 화산재 영향으로 기상이 악화되지 않는 한 항공금지조치를 풀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를 기해 런던 히스로 공항에 영국 항공운항 금지가 풀리고 처음으로 영국 국민들의 귀국행렬이 시작되었다.

세계 유력 항공회사들의 단체 손해배상 소송 '협박'에도 영국정부는 "영국 국민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신념과 정책을 내세우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28년 전 인도네시아 항공사고에서 얻은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고 "국민의 안전을 무엇보다도 우선순위"로 두고 대안을 마련한 영국의 관료들. 또 온갖 어려움과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안전이 가장 먼저"라며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기다려준 영국 국민들. 정부의 전면 항공운항금지 조치를 비판하지 않고 정부의 선택을 지지해 준 영국 언론인들.

사람의 생명을 희생해 기업에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해도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국민 한 명, 한 명의 생명과 안전이 거대 자본이나 이윤을 앞세우는 기업의 횡포로 말살되지 않고 보장받고 존중되는 사회, 우리는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함께 추구하고 가꾸어 나가야할 나라는 결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살기 좋은 나라"여야 한다.


태그:#영국, #아이슬란드, #화산재, #비행금지, #런던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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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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