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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 2년 2개월 동안 난 <조선일보>의 열혈 구독자였다. 신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그 때는 이 신문 저 신문 가릴 처지가 못됐다.

그것은 정훈시간에 그것도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볼 수 있었던 9시 뉴스와 더불어(대부분 뉴스를 보지 않고 드라마를 보기 때문에) 세상과 호흡하는 몇 안되는 통로였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나에게 <조선일보>는 진보 정론지였다. <국방일보>보다는.

이등병 때 신문을 보며 그렇게도 고참들의 눈치가 보였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신문읽기란 '광수생각'을 찾아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힘든 하루의 위안이었고 지친 마음의 피로 회복제였다.

죽음도 막지 못하는 변치않는 사랑의 이야기와 가슴 따뜻한 가족애는 삭막한 군인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 사랑과 믿음이 갈굼으로 대표되는 군생활의 현실적 버거움을 조금도 덜어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나와 똑같이 '광수생각'을 좋아했던 고참 중에는 근무 중에 총으로 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고참도 있었다.)

그후 차츰 계급이 올라가자 더불어 신문읽기의 시간도 점차 증가하였다. 그래도 시간은 여전히 부족한지라 제대할 때까지도 거의 문화면 밖에는 보지 못했다. 거의 꼬박꼬박 <조선일보>의 문화면만큼은 봐온 셈이다.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조선일보>의 문화면은 재미있다. 문학에서부터 음악, 영화, 뮤지컬 등등, 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하고 있고 다루는 소재 또한 풍부하다. 내가 절대 빼먹지 않고 읽었던 '이동진의 씨네마레터'에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간지로 발행하는 책 소식까지 참 알차게 구성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생겼다. 우선은 언제부터인지 <조선일보>가 좌파 사상을 소개하기도 하고, 비판적 지식인들을 필자로 모셔 기고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게 386에 대한 기획기사를 만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물론 난 너무 좋았다. <조선일보>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런 사상들과 그 사람들의 글을 그렇게라도 접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정말 그 때 나에게는 매체보다 메시지가 훨씬 중요했다.

사실 부대에서 생각할 때는 이제는 좌파적 사상쯤이야 소개해 줘도 한국 자본주의에 아무 이상없다는 그들의 자신감에서 기인한 진보 상업주의 정도로 그 의도를 파악했다.

사설과 칼럼에서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파업을 호도하고 대북 보도 또한 관점에 변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설과 칼럼, 그리고 문화면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모두 <조선일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호 작용이었다.

사회면의 극우성과 문화면의 진보성은 <조선일보>가 말하는 정론지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신문이 보수를 표방하건 진보를 표방하건, 그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이다.

그러나 한 때 자신들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로, 김정일의 친위부대 정도로 평가했던 사람들을 세월이 지나자 386이라는 추억으로 덧칠해서 팔아먹는 모습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그저 역겨울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일보>가 마치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언론인 양 국민들을 호도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으며 더 이상 이와 같은 조선일보의 상술에 기여하지 않겠다"는 최근 지식인들의 선언에 공감을 표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글이 그들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조선일보>의 극우적인 색채를 흐리게 한다면 그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옳고 그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인가라는 시공간의 문제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지난 2년 2개월 동안 나는 <조선일보>로 세상과 호흡하였다. 그리고 고백컨대 <조선일보>의 문화면은 나에게 삶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수생각'이 말하는 사랑과 따뜻함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으며(온겨레가 눈물을 흘렸다는 8월 15일 그 날도 민주노총의 대표는 단식을 하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빨갱이로 몰아갔던 광주와 386세대에 대한 반성없는 386 기획기사는 기만일 뿐이다.

더욱이 그것이 <조선일보>의 사설과 칼럼에서 보이는 극우의 해악을 가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현실에서는 더욱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이 2년 2개월 동안 <조선일보>와의 어색한 동침을 끝내며 떠오르는 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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