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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내가 대학에 입학 한 첫 해, 한 강연회에서 홍세화씨가 말했다.

 

"사람은 평생 생존과 자아실현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하나에 매몰되지 마세요. 둘은 함께 가야합니다."

 

그때 다짐했다. 아무리 힘든 순간이 오더라도 생존에만 매몰된 삶을 살지는 말자고. 그래서인지 대학을 다니는 내내 '온순한' 친구들을 보는 일이 불편했다.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에 '도무지' 분노하지 않는 아이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취업과 토익 걱정뿐. 그들의 무기력한 눈빛에 지쳐갈수록 나는 더욱 더 '현실참여형' 인간이 되어 갔다. 각종 시위나 집회 현장을 바쁘게 오가며.

 

88만원 세대에겐 희망이 없다는 당신에게

 

20대의 보수화를 지적하는 담론들이 많다. 현재의 실업 문제를 세대 간 착취 현상으로 설명한 한 경제학자는 88만 원 세대에게서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촛불시위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10대들과 비교하며 정치에 무관심한 20대를 질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들은 적어도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88만원 세대는 지금 경계에 서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꿈꾸지만 머뭇거릴 뿐이다. 다들 쓰라린 패배를 맛보면서부터다.

 

친구들이 변했다. 대학 시절 내가 알던 친구들은 세상 일에 지독하게 무관심했다. 그랬던 친구들이 이제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세상이 미쳤다"며 침을 튀긴다.

 

얼떨결에 비정규직이 된 친구는 생애 처음으로 한국 노동 현실의 모순을 깨달았다. 졸업 이후 승승장구하며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는 매일 밤 9시, 10시에 퇴근하다 보니 한국의 자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개인을 착취하는지 알게 되었단다.

 

면접 중 외모나 학벌에 대한 모욕적인 질문을 받으며 '꼰대'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었다는 친구는,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의 차원에서라도, 진보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 역시. 불합리한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진보가 단단해지려면, 그 가치가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대학 시절 내가 멋모르고 떠들던 평등이나 해방의 단어들은 결코 내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내 친구들은 단 한 번도 진보의 이론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구직 과정에서 혹은 직장 생활을 경험하며 오히려 나보다 더 단단한 진보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부모의 품이 아닌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며 단련되어 갔다.

 

촛불문화제와 토익시험 사이, 그래도 희망은 있다 

 

20대인 나와 내 친구들 역시 정부의 쇠고기 협상에 분노한다. 먹고 마시는 우리의 일상과 직결된 것이기에 그 분노는 더 구체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20대는 눈앞에 당면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분노를 행동으로 증명해 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의 불안을 무지의 소산으로 여기는 이명박 정부의 오만함이 짜증난다면서도, 당장 내일 있을 토익시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친구의 말은 지금의 20대가 마주한 현실을 방증한다.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내느라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유보한 것일 뿐, 꿈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아니 적어도 지금의 대한민국이 '좋은 세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안다.

 

광장의 함성과 촛불의 열기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촛불이 꺼지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열기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이냐 하는 점이다.

 

촛불시위 현장에 20대가 적다고 해서 미래를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확신에 찬 백 마디 말보다 수줍은 몸짓으로 머뭇거리며 던지는 고백에 더 큰 진정성이 있기 때문에.

 

20대는 광장의 바깥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세상이 '공부만 잘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살던 친구는, 여러 번 임용시험에 실패한 뒤에야 공부 못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때로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패배자가 되는 이들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더불어 패배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얻었다.

 

저항의 시작은 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적의 행위로 인해 고통 받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염려일지도 모른다. 잦은 패배를 겪으며 성장한 88만원 세대의 경험은 쉽게 냉소로 변질되지 않을 것이다.


태그:#촛불문화제, #88만원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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