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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2013년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비행기가 압록강을 넘어간다'는 기내방송이 나온다. '김일성 주석이 어린 나이에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뜻을 품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설명과 함께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기내에 울려퍼진다.

사진으로만 봐왔던 누나... 평양에서 다시 만나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동상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동상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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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북한의 산하로 접어들자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에 앉아 있던 재미동포 이산가족 한 분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겉으로 보기에 내 남편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 북한에 이산가족이 있는지 의문이 들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찾는 친척분께서는 평양에 사시나요?"
"아니요, 원산에 살고 있습니다. 한 10여 년 전까지 평양에서 살았는데, 원산이 너무 좋다며 그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분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그분의 사정이 더욱 궁금해진다.

"선생님께서는 고향이 이북이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북에 친척이 사시는지 궁금하네요. 여쭤봐도 될는지…."

"아, 네, 괜찮습니다. 긴 사연이 있답니다. 저와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북도입니다. 저는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이 지나 태어났는데 늦둥이였어요. 어머님께서 마흔다섯에 저를 낳으셨으니까요.

그런데 제게는 생전 보지도 못한 누나가 있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열여덟에 결혼을 하셔서 첫 딸을 낳으셨는데, 그 누나는 한국전쟁 당시 20살이었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답니다. 학생 때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인민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대요.

누나에 대해 입도 뻥끗하시지 않아 저는 전혀 모르고 자랐지요.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알려주셨답니다. 혹시 통일이 되면 꼭 찾아보라시면서 꼭꼭 숨겨뒀던, 색바랜 흑백사진을 제 손에 쥐여주시곤 돌아가셨습니다. 사진 뒤에는 누나의 생년월일과 함께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었어요."

콧등이 시큰해진다. 어렵사리 계속 질문을 드렸다.

"아니, 그렇다면 그 누님을 찾아가시는 길인가요? 어떻게 찾으셨어요?"

"찾기는 벌써 찾았습니다. 만나기도 벌써 만났고요. 제가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사진을 들고 왔지만, 누나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 한동안 잊고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꿈에 나타나 '누나를 찾았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새벽녘에 깨어나자마자 서랍 속에 넣어뒀던 사진을 꺼내 들고 바라봤어요.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흐르지 않겠어요? 참….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게 뭔지. 생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는데…."

이 분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한숨을 크게 쉬며 말씀을 이어간다.

"당시 뉴욕에 살던 아는 분께서 북에 자주 가시곤 했는데, 그분께 부탁드렸습니다. 혹시 찾을 수 있다면 부탁한다고요. 그리고는 한 1년 정도 지나서 누나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누나의 편지와 함께요. 누나는 당시 평양에 살고 있었는데, 비교적 높은 자리에 있어 쉽게 찾았다고 하더군요.

담담히 편지를 읽어가는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누나!'라고 소리치며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결심했지요. 누나를 찾아 북한에 가겠다고. 요즘은 더 자주 갑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이제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자주 오게 돼요."

"처음 만났을 때 기분은 어땠나요? 금세 알아보셨어요?"

"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사진 속의 학창 시절 누나보다 나이가 든 누나의 실제 모습을 보고도 피붙이임을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누나도 저를 처음 보시더니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별의별 사연이 다 있다. 고향이 남쪽이고 전쟁 후 태어난 사람에게 이산가족이 있다니. 이 분의 사연은 수많은 사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도 이 분은 누나를 만나 행복하단다. 그리고 언제든지 북에 갈 수 있으니 이산가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한다.

"내일 산보라도 하시지요"... 불길한 예감

공항에 내린 우리는 북한의 '해외동포사업부'의 안내를 받고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이산가족 업무를 관장하는 관리가 우리 일행을 맞이하면서 상봉 계획을 논의한다.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에 이산가족 모두가 들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다. 아마 우리는 정식 이산가족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리라.

'세포등판'이 뭔가요?
세포등판은 북한에서 건설 중인 축산기지다. <조선신보>는 세포등판을 두고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이천군의 광활한 대지에 수 만정보의 인공과 자연풀판(초지), 무우, 뚝감자, 사탕무우밭을 조성하는 대규모 종합축산기지"라고 설명했다(2014년 3월 17일 보도).
현수 조카가 그리워진다. 지금쯤 평양에 돌아왔는지, 아니면 아직도 '로력동원'으로 나간 강원도 세포등판에서 삽질, 곡괭이질을 하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지. 엄청난 넓이의 황무지를 개간해 동양 최대의 목장을 건설한다고 하던데 거기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까. 현수 조카가 흘린 땀을 먹은 풀이 무럭무럭 자라 북녘 강원도 산골의 돌멩이 밭을 푸른 초원 위의 목장으로 바꾸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오늘따라 호텔 로비에 조선국제려행사 안내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웬만한 안내원들은 다 알고 있으니 수양딸 설경이의 출산 소식을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예정일이 2013년 9월 중순이라고 했으니 아직 애를 낳지는 않았겠다.

전화라도 걸어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내가 들고 있는 휴대전화는 이곳에서 사용할 수가 없다. 2013년 초부터 외국인들에게 휴대전화 반입을 허용했으며, 한때는 휴대전화를 통해 인터넷 사용도 허락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만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전화만 사용할 수 있을 뿐 북한 주민들과의 국내통화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심(SIM)카드도 상당히 비싸고, 분당 국제전화 요금 역시 무척 비싸 많은 관광객들은 호텔에 있는 국제전화를 이용한다.

적어도 북한 내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북한주민들과의 전화 통화를 허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북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본 북한은 외국인에게 북한 주민들과의 전화 통화를 허용한다고 해서 나라의 체제나 국가 안보가 지장을 받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호텔 커피숍에 앉아 설경이와 현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의 안내를 맡은 해외동포사업부 직원이 다가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현수는 세포등판에서 돌아왔나요?"
"아직 기곳에 있답니다. 아마 이달 말에나 돌아올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현수네 가족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는데…."
"천천히 알아보지요. 오늘은 푹 쉬시고 두 분께서는 내일 평양시내 산보라도 하시지요. 내일 아침 9시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이유인지 불안하다. 마치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양조카 현수를 그리며
 
미국 시애틀에서 오신 이산가족
 미국 시애틀에서 오신 이산가족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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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에서 깼다. 잠을 푹 자지 못해 그런지 기분이 찌뿌둥하고 식욕도 없다. 커피나 한잔 할 생각으로 식당에 가니 너무 이른 시각이라 식당이 텅 비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미동포 이산가족 노부부께서 들어오신다.

시애틀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홀로 남으로 오셨다는 것 같다. 평양에 누님이 사시는데, 유명한 문학가로 고려호텔 서점에 가면 누님의 책들이 진열돼 있다며 자랑을 하신다. 문득 의문이 간다. 동생이 월남한 기독교 목사인데 북에 남아 있는 가족이 어떻게 유명한 문학가로 활동할 수 있었는지. 나중에 서점에 가서 찾아볼 요량으로 그분의 성함을 받아 적어놨다.

방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한 뒤 약속시간에 맞춰 로비로 내려갔다. 해외동포사업부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호텔은 평소보다 몹시 붐빈다. 돌아오는 9월 9일이 북한의 건국기념일이라 이를 참관하기 위한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9월 9일이 공화국(북한) 창건일입니다. 기념일 전 며칠 동안 많은 행사가 있는데 원하시면 두 분도 참관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행사들인가요?"
"당(노동당) 보고대회도 있고 군열병식도 있습니다. 아리랑 공연 참관도 있고…."


'열병식'이란 말을 듣더니 남편이 선뜻 그러자고 한다. 나는 여전히 수양조카 현수를 만날 생각밖에 없다. 내가 현수 이야기를 꺼냈다.

판문점 회의실 안에서 수양조카 방현수와 함께(지난 2012년에 찍은 사진)
 판문점 회의실 안에서 수양조카 방현수와 함께(지난 2012년에 찍은 사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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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현수가 노력동원 가 있다는 세포등판은 이곳에서 얼마나 먼 곳인지요?"
"강원도에 있습니다."
"그건 저도 들어서 아는데….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하네요. 현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나요?"


"뭐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 땅을 개간하는 일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축사도 짓고 유류제품, 육류가공 공장도 짓고 일이 많습니다."
"현수가 있는 곳에는 여러 동무들이 함께 일하겠지요? 현수가 속해 있는 그룹에는 대략 몇 명 정도가 있나요?"

"글쎄요. 작업반에 따라 다른데, 뭐 단위당 한 100명씩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요 선생님, 우리가 세포등판으로 갈 수는 없을까요? 여기 와 보니 우리 북의 동포들이 꼬부랑국수(라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 1000개 정도 사가고 싶어요. 차에 싣고 가서 끓여주고 왔으면 해서요."
"아이구, 그건 안 됩니다. 그곳은 오지라 아직 도로사정이 좋질 않습니다. 지금 모든 건설 차량들이 임시도로로 다니는데…. 가는 데만도 족히 하루는 걸릴 겁니다."


"그렇다면 더 잘됐네요. 가면서 북녘땅 구경도 하고."
"아니, 녀사님께서는 조국의 구석구석을 다 보셨잖습니까. 뭐 더 보시고 싶으십니까? 얘기는 해 보겠습니다만 절대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부탁이에요."


심성이 고운 현수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이모, 이모는 통일이 돼도 미국서 살 건가? 통일조국에 와서 함께 살자. 내가 꿩랭면 맛있게 만들어 줄게…. 이모, 조국이 통일이 되면 내가 개 한 마리 목에 터억 걸티고 이모 찾아 서울로 갈게."

현수 조카가 더 더욱 그리워진다.

모란봉에서 춤판을 보다니

고려호텔 레스토랑의 육회
 고려호텔 레스토랑의 육회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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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와 수양인척 관계를 맺은 이야기와 그동안 쌓은 정까지 들춰내며 끈질기게 설득을 하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호텔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임에도 남편은 평양소주와 함께 육회를 주문한다. 냉면도 물론 주문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평양시내 산책을 나갔다. 야외극장에서는 중학생들이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인 평양성 성벽을 따라 모란봉을 오른다. 평양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대동강은 버드나무를 벗 삼아 한가운데로 유유히 흘러간다.

평양시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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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미

모란봉의 한 누각에서 아줌마들의 춤판이 벌어지고 있다. 성벽에 걸터앉아 춤 구경을 한다. 옆에 앉아있는 아줌마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온다. 미국서 왔다고 답해주니 동포라며 반갑게 맞아준다. 어서 나가 함께 어울리잔다.

익숙한 '정서고 가락'이다.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러나 가슴속으로 애통하게 울부짖는다.

"남과 북 조국의 동포들이여, 눈을 뜨라. 마음을 열라. 그리고 두려워 말고 사랑을 하라."

어린 시절 테헤란에서의 기억

무용연습을 하는 초등학교 학생들
 무용연습을 하는 초등학교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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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앞 잔디밭. 초등학생 아이들이 무용 연습을 하고 있다. 어렸을 적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활동했던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함께 손뼉을 치며 하나가 돼 본다. 지금 이곳 평양에서 저 아이들의 무용연습을 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나는 중동·아프리카 순회 공연의 일환으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당시 테헤란에서는 아시안게임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우리 단원들은 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에서 머물게 됐다. 그러니 자연스레 선수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식당에 가면 우리나라 말을 하는 친절한 선수들과 마주치곤 했다.

옆 테이블에 함께 앉아 식사를 할 때마다 어떤 아저씨는 내 접시가 비었다 싶으면 접시를 들고 가 음식을 더 담아다 주기도 했다. 권투 선수인지 레슬링 선수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단장 선생님으로부터 '숙소를 옮길 것이니 짐을 싸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후로는 그 친절한 아저씨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아저씨들은 북한 선수들이었다. 가슴 위에 붙어 있던 국기가 북한 국기인 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우리나라 말을 하니 자연스럽게 한국 선수이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아마도 그 북한선수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숙소를 옮겼으리라 짐작된다.

당시의 그 친절한 아저씨들이 지금 어쩌면 이곳 평양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우연이라도 좋으니 마주치고 싶다. 수십 년 전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미소를 보여줬던 아저씨의 모습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평양의 한가운데, 모란봉 공원에서 무용 연습을 하는 어린아이들을 보니 문득 내 어린 시절 옛 기억이 떠오른다.

미궁에 빠진 북한 여정


리허설을 마친 중학생 합창단원들과 함께
 리허설을 마친 중학생 합창단원들과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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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내려와 보니 올라가면서 봤던 합창단 학생들이 연습을 마치고 주차장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남편과 함께 다가가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학생들이 줄을 맞춰 대열을 만들고 예쁜 표정을 지어준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아이들은 학교 이름을 대면서 꼭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학교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잘 모르는 지명이다. 평양과 남포 사이에 있는 동네란다. "알겠다"라고 답은 했으나 사진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아이들은 오늘도 사진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침대 옆에 놓여있는 대동강맥주
 침대 옆에 놓여있는 대동강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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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걸었나 보다. 피로가 엄습해 온다.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일찍 방에 올라갔다. 냉장고 안에는 대동강 맥주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병을 꺼내 쭈욱 들이킨다.

과연 현수를 찾아 강원도 세포등판에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적어도 현수 부인과 딸이라도 만나 식사라도 함께하며 선물이라도 전해줘야 할 텐데…. 내일의 일정이 뭔지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알려드립니다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애독해 주시는 독자분들께 연재가 늦어졌음을 사과드립니다. 저는 지난 4월 1일부터 4월 16일까지 전국순회강연 초청을 받고 한국에 있었습니다. 4월 18일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세월호 참사 소식에 충격을 받고 도저히 연재를 이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다시 연재를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태그:#북한, #통일, #평양, #여행,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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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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