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Déjà vu) 현상은 강풀의 만화 <타이밍>에서도 드러나는 소재다. <타이밍>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타임 스토퍼'와, 시간을 10초 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사람, 예지몽을 꾸는 사람 등이 모여 고등학교 내의 기묘한 자살 사건을 추적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강풀은 <아파트>에 이어 <타이밍>에서도 데자뷰 현상을 연상시키는 전개 방식을 선택해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독자로 하여금 고난이도의 퍼즐 맞추기를 제안한 것이다.

@BRI@빌 마실리와 테리 로시오가 공동으로 완성한 영화 <데자뷰>의 시나리오는 명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의 손에 들어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영화화가 확정됐다고 한다.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영화적으로 여전한 상업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여기에 명감독 토니 스콧의 연출을 생각해냈고, 명배우 덴젤 워싱턴까지 생각해냈다. <크림슨 타이드> 이후, 모처럼 뭉친 명제작자, 명감독, 명배우라고 할 수 있겠다. 저마다 뚜렷한 색깔을 가졌지만, 이들은 <크림슨 타이드>를 통해 서로 개성을 충분히 살려주는 기가 막힌 하모니를 완성한 적도 있다.

<데자뷰>는 그렇듯 개봉 이전부터 영화 마니아의 구미를 자극할 모든 요소를 한몸에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풀어 보여준다는 점도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영화들의 장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골치 썩히면서 감상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데자뷰>는 오는 11일 개봉한다.

여전한 그들의 '하모니'

▲ 오는 11일에 개봉하는 <데자뷰>
ⓒ 소니픽쳐스릴리징 브에나비스타 영화
사실 <데자뷰>는 '데자뷰 현상'에 우주가 11개의 차원으로 진동하는 작은 실 혹은 막으로 이루어져 '연결돼' 있다는 '끈 이론'과, 매순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평행우주로 갈라져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의 모든 경우를 조합한 무한한 수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평행 우주 이론'을 결합하면서, 과학적 토대까지 깔아놓은 심상치 않은 작품이다.

그 이전에 <슈퍼맨>에서 애인의 죽음에 상심한 슈퍼맨이 지구 밖으로 나가 지구를 역회전하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을 통해 이 모든 이론들이 결합한 또 하나의 '데자뷰'를 그린 적도 있다. 과거를 돌리고 싶어하거나, '순간의 다른 선택'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음을 믿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건드린 <나비 효과>와 같은 영화도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고 미래가 불확실하기에, 그리고 과거를 후회하기에 희망을 얻고 절망을 느끼는 인간의 내면을 자극하는 영화들인 셈인데, 이런 영화들도 그 이론의 토대대로라면, <데자뷰>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데자뷰>는 관객으로 하여금 나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장면을 꼼꼼하게 챙겨볼 줄 아는 확실한 기억력과, 과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도 이 영화의 충실한 가이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데자뷰>는 브룩하이머 표 영화답게 대단히 친절한 일면도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중간중간에 다소 딱딱한 이론적인 설명 장면도 나오지만, 할리우드의 흥행 마법사는 관객을 위해 되도록 어려운 길은 피하는 혜안을 발휘한다.

이것이 토니 스콧 감독이 선택된 궁극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의 장기인 현란한 화면과 빠른 편집이 시각적인 맛을 자극하면서 관객의 집중력 향상을 돕고 있으며, 후반부에는 덴젤 워싱턴과 제임스 카비젤의 연기와 탄탄한 각본의 힘을 업어 퍼즐을 알아서 짜맞춰 주는 서비스 정신이 발휘된다. 흥행 마법사다운 확실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크림슨 타이드>가 진 해크먼과 덴젤 워싱턴의 기가 막힌 신경전에 더 많은 것을 기울였다면, <데자뷰>는 '관객을 위한 조화로운 하모니'에 충실하다. 많은 재능이 투입됐고 골치아픈 과학적 이론도 개입돼 있지만 쓸모없는 부분은 사실상 거의 없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시간의 퍼즐, 적절한 액션 등, <데자뷰>에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유기적으로 조합돼 있다.

▲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기계 장치는 그의 사명감을 자극한다.
ⓒ 소니픽쳐스릴리징 브에나비스타 영화

'데자뷰'는 선택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 그리고 사명감

<데자뷰>는 대형 테러 사건을 제시하면서, 시간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으려 노력하는 수사관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마디로 '아무도 모르게' 자연의 섭리까지 거슬러가려는 의지의 수사관을 다룬 것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기계 장치와 과학적 이론의 힘이 영화의 개성으로 작용하면서 그를 돕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는 점도 언급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강풀의 만화 <타이밍>이나 우리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등을 기억해보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동까지 불사할 때에는 사람의 목숨이 위태롭다거나 국가의 운명처럼 큰 비극이 예고된다는 식의 이유가 숨어있다.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명분은 돼야 현실을 살고 있는 관객에게도 기본적인 설득력과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

영리한 제작자나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명분의 생생함을 위한 캐릭터들의 절박함도 필수적이다. <타이밍>에서는 캐릭터들이 처한 개인적인 아픔이 부각되며,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장동건의 필사적인 연기가, 그리고 <데자뷰>에서는 덴젤 워싱턴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인 연기가 돋보인다.

하지만 그런 스케일 큰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우리의 소소한 인생에도 언제나 선택을 요구받으며, 엇갈린 운명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난관과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나비 효과>에서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고 난 다음에는, 다시금 "과거로 돌아갔으면"을 중얼거리는 안타까운 순간도 오게 마련이다. '데자뷰' 현상, 그리고 영화 <데자뷰>가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빌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언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언제 어디선가 겪은 것 같은 느낌도 알고 보면 무의식 속에 숨은 후회와 아픔, 그리고 사명감 등이 뇌와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은 늘 하나뿐"임을 강요받는 인간은, 그 선택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를 무의식 속에 잠재워놓는 것이다.

<데자뷰>의 이야기 규모는 '(제리 브룩하이머의) 영화답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인생 이야기다. 소소함과 거대함의 차이는 인간의 눈으로 나누어지는 잣대가 아니던가. 소소함도, 거대함도 모두가 인생이고 우주다. 소소함이 거대함이 될 수도 있으며, 거대함이 소소함이 될 수도 있다. 우주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한 곳이다.

▲ '예수'에서 극우 테러리스트로, 제임스 카비젤의 악역 연기는 짧지만 강렬하다.
ⓒ 소니픽쳐스릴리징 브에나비스타 영화
인간은 이별도 하고 아픔도 느끼며, 후회도 한다. 물론 사랑도 하며, 기쁨도 느끼며, 확신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공존하기에 인간의 삶은 힘겨우면서도 기대를 걸어볼 만한 것이다. '데자뷰'는 그런 것들이 뒤엉킨 무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아파야만 하는 것'을 지우고 싶어하는 본능, 어쩌면 그 본능이 '데자뷰'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흥행의 마법사와 명각본가, 명감독과 명배우는 그 열쇠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리고 '테러 공포'에 대해 뭔가 다르면서도 분명한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숨겨진 영웅'의 시간여행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1-10 11:57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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