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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 열린 전간도 축구대회의 중학부 우승팀. 오른쪽 신사복 차림은 여운형. 경기도 양평군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1936년에 열린 전간도 축구대회의 중학부 우승팀. 오른쪽 신사복 차림은 여운형. 경기도 양평군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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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는 기원전부터 축국(蹴鞠) 혹은 축구(蹴球)가 있었다. 중국 후한(後漢, 25~220년) 때 응소가 집필한 <풍속통의> 등에서는 "털로 만든 둥근 공을 국(鞠)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축국의 국(鞠)과 축구의 구(球)는 같은 뜻이다. 따라서 축국과 축구는 동일한 말이다.

고대 동아시아 시절엔 풀·털·가죽으로 둥근 공을 만들거나 동물 오줌보에 공기를 주입해서 축구공을 만들었다. 또 대나무로 만든 골대를 두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골대가 없는 경우는, 양쪽 끝에 선을 긋고 그 선을 넘기면 득점으로 인정했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의 동이열전에는 고구려인들이 축구를 잘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인들의 축구 실력이 중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남쪽 사람들이 축구를 더 잘하지만, 고구려 때는 북쪽 사람들이 더 잘했는지도 모른다.

축구가 성행하기는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에서는 축구가 역사를 바꾸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의 축구 시합을 이용해서 김춘추와 여동생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이 사건은 신라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까지 바꾸는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축구경기 나선 김유신이 노린 건 승리 아닌 김춘추?

때는 서기 625년 정월 대보름으로 추정된다. 이날 김유신과 김춘추가 각각 포함된 두 팀 간의 축구 시합이 열렸다. 이때 김유신은 31세, 김춘추는 23세였다. 김유신은 전직 풍월주(화랑도 1인자)이자 현직 장교이고, 김춘추는 현직 화랑도 부제(화랑도 2인자)였다.

축구가 벌어진 곳은 김유신의 집 앞 공터였다. 전·현직 화랑도 간부들인 김유신과 김춘추가 참가하는 경기였으므로, 많은 화랑과 낭도들이 이 시합에 참여했을 것이다.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김유신 흉상.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김유신 흉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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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소개된 대로, 이 날 김유신은 게임보다는 몸싸움에 주력했다. 그는 공이 아닌 김춘추한테만 신경을 썼다. 김춘추와의 몸싸움에만 집중한 것이다.

김춘추에 대한 '대인마크'에 주력한 김유신은 결국 김춘추의 옷을 찢어버렸다. 경기 스코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춘추의 옷을 찢어버린 것만으로도 김유신은 속으로 무척 기뻤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기 시작 전부터 김유신이 노린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난 뒤 김유신은 "우리 집에 가서 옷을 고치자"며 김춘추를 유인했다. 그는 김춘추를 자기 집 방안에 들여보낸 뒤, 큰 여동생인 김보희를 찾았다. 김보희가 김춘추의 옷을 수선하도록 만든 다음에 두 사람을 이어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김보희는 나오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그 이유에 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소개한다. 하나는, 김보희가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로 귀공자를 만납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김보희가 그때 마침 몸이 아파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결국 김보희 대신 동생인 김문희가 '투입'되었다. 그런데 김춘추에게는 보라라는 부인이 있었다. 부인과의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김춘추는 딴 여자를 사귈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도 김유신은 개의치 않고 작은 동생 문희를 그 방에 밀어 넣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문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김춘추는 김유신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래서 김춘추는 김유신과의 안면 때문에 할 수 없이 문희와 계속 만났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화랑도 선배이자 상관인데다가 유능한 장군이었다. 김춘추의 앞날에 김유신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김유신을 서운하게 할 수 없었다.

축구시합 때문에 원치 않은 결혼 두 번 한 김춘추

김춘추의 무덤인 태종무열왕릉의 비석. 서울시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춘추의 무덤인 태종무열왕릉의 비석. 서울시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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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의 만남은 임신으로 연결됐다. 김춘추가 새 생명을 책임져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김춘추는 책임을 기피했다. 보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김문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명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던 때였으므로, 보라만 잘 설득한다면 김문희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계속해서 회피하기만 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김유신이 행동에 나섰다. 그는 선덕여왕(당시 공주)이 김춘추 등을 데리고 경주 남산에 오르는 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사전에 김유신은 "내 동생이 처녀 몸으로 임신을 해서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으므로 불에 태워 죽이겠다"는 소문을 냈다. 그런 뒤, 임신한 김문희를 장작더미 위에 묶어놓고 불을 질렀다. 물론, 확 지르지는 않았다.

김유신의 집은 경주 남산의 정상에서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김유신 집 마당에서 난 불은 선덕여왕의 눈에 금방 띄었다. 여왕은 측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연을 들은 여왕은 김춘추에게 "네가 벌인 짓이니까 빨리 가서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김춘추는 급히 달려가서 김문희와의 결혼을 선포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불길은 김문희에게 옮겨 붙지 않았다.

김문희는 김춘추의 둘째부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부인인 보라가 사망했다. 그러자 김문희가 첫째부인이 되었다. 그런 뒤에 태어난 아들이 훗날 문무왕이 될 김법민이었다. 축구 시합을 계기로 태어났으니, 김법민은 요즘 말로 하면 '축구 베이비' 혹은 '월드컵 베이비'였다.

김춘추는 김문희와 결혼하기 싫었지만, 김유신과의 안면 및 선덕여왕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그는 그날의 축구 시합이 두고두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김춘추는 또다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김춘추 편에 따르면, 김문희의 언니인 김보희는 자기와 김춘추가 연결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고 한다. 결국 김보희는 이 때문에 독신의 길을 선포했다. 김춘추 같은 남자를 놓쳤으니 앞으로는 그냥 혼자 살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또다시 괴로웠다. 김유신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결국 김춘추는 김보희를 첩으로 맞이했다. 김문희에 이어 김보희까지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축구 시합 하나가 김춘추의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놓았다. 축구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두 번이나 해야 했던 것이다.

한민족 역사를 바꾸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한 축구시합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신라 여성의 모습을 본뜬 조각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신라 여성의 모습을 본뜬 조각품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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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대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축구 시합이 있기 열흘 전에 김보희는 희한한 꿈을 꾸었다. 경주 서악산(지금의 선도산) 정상에서 소변을 봐서 경주 시내를 오줌 바다로 만드는 꿈이었다.

보희는 아침에 동생 문희한테 꿈 이야기를 했고,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꿈을 샀다. 그로부터 열흘 뒤에 그 집 앞에서 축구 시합이 열리고, 김춘추가 그 집을 방문했으며, 어떤 이유에선지 김보희 대신 김문희가 김춘추의 옷을 꿰매주게 되었다.

이 같은 꿈의 매매는 김문희를 훗날 신라 왕비로 만들었다. 또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 꿈은 동생 문희를 언니 보희의 형님으로 만들었다. 문희가 김춘추의 첫째부인이 되고 보희가 첩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축구 시합은 김유신·김춘추·김문희·김보희를 하나의 가족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신라 역사는 물론이고 한민족의 역사를 바꾸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이를 계기로, 가야 혈통인 김문희는 훗날 김춘추의 등극과 함께 신라 왕비가 되었다. 또 가야 혈통을 이어받은 김법민이 신라왕이 되었다. 멸망한 가야왕국이 축구 시합을 매개로 신라 왕실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또 이 시합은 김유신-김춘추 콤비의 결속력을 강화시켜, 이 콤비가 신라를 구원하고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그러므로 그 시합은 신라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고, 백제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았다면, 왕자 시절의 백제 의자왕은 그날의 축구 시합에 뛰어들어 김유신의 집중 마크로부터 김춘추를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


태그:#축구, #김유신, #김춘추, #김보희,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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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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