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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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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은 그렇게 해서 중앙시장에 발을 붙일 수가 있었다. 하차 일을 며칠 하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불쾌한 감정이 싹 텃다. 어찌된 셈인지 일을 열심히 해도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이었다. 작업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이상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업주가 품삯을 정당하게 지불하지 않아도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하차작업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실은 하차작업을 하고 난 뒤 바닥에 흩어져 있는 배추 잎이나 폐품들을 주워가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차작업을 하는 동안에 어떻게 해서든지 업주의 눈을 속여 물건을 훔쳐 내다 파는 것으로 품삯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업주나 작업하는 사람이나 암묵적으로 서로가 인정하는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있었다.

"일하면서 공연히 도둑 취급받을 필요 없잖아요"

이소선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자식들한테 아무리 배가 고프고 궁색하더라도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쳐 왔는데 그런 자신이 어떻게 물건을 훔쳐서 돈을 벌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아무리 없이 살아도 부끄러운 짓을 안 하면 그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믿어왔건만 이제 와서 양심을 허물어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고 바닥에 흘린 것들만 주워서 파니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나마 다음 하차작업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그가 주운 것들을 제값 받고 팔수가 없었다. 남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운 것들이나 훔친 것은 제값도 받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헐값에 넘겨버렸다. 더욱이 훔친 물건은 단번에 알아보기 때문에 제값을 못 받는 것은 당연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고 있는 꼴이었다.

이소선은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하차작업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도 정당한 품삯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업주 쪽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물건을 안 빼앗기려고 경비원을 세우게 되니 그 돈으로 나가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결국 양쪽 다 고생을 사서하고 있는 셈이었다.

작업하는 여지들은 눈치 보면서 훔쳐낸 물건들을 헐값에 팔아넘긴다. 업주 측에서도 고용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되니 서로가 사람대접을 못해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고민을 하다가 하차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예 일하는 여자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지켜주는 일을 맡았다. 이소선은 그 물건들을 정당한 값에 팔아서 여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낙네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물건을 맡기기를 꺼려했지만 이소선이 속이지 않고 정당하게 처리해주니까 안심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얼마동안 하다 보니 여자들이 물건만 생겼다 하면 다 이소선한테 가져왔다.

결국 차츰차츰 양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에도 힘에 겨웠다. 이소선이 나서서 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건을 지키느라고 하루 종일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면 여자들이 일을 마치고 물건을 팔아서 지켜준 삯을 이소선한테 주었다. 내친 김에 이소선은 여자들을 설득해보기로 했다.

"아줌마들, 우리가 이럴 게 아니에요. 물건을 훔쳐내 와서 불안하게 헐값으로 팔 게 아니라 일을 끝낸 뒤 업주한테 작은 양이지만 몇 단씩 얻어 와서 정당하게 제값을 받는 게 어떻겠어요? 우리가 일은 일대로 하면서 공연히 도둑 취급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요."

이소선의 말을 들은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고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요,아줌마 말이 옳아요. 사실은 우리가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헐하게 팔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지 많이 훔쳐내려고 한 것 아녜요? 이제야 아주머니가 지켜주니까 제값을 받을 수 있어서 불안에 떨며 많이 훔쳐내지 않아도 된다고요."

이소선은 아낙네들의 물건을 지켜주면서 틈만 생겼다 하면 그들을 설득했다.

"이제부터는 물건을 훔쳐낼 것이 아니라, 며칠만이라도 착실하게 일을 해 주고 업주한테 일이 끝나고 몇 단씩 달라고 요구해봅시다. 분명히 업주들도 거절하지는 않을거예요."

이소선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훔치는 일을 하지 말고 정당하게 일한 만큼 돈을 받자고 설득했다. 그 말이 업주한테도 들어가서 하차작업 하는 동안 불안에 떨지도 않게 되었고 물건을 훔치는 일도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두 다 좋아했다. 업주로서는 마음 놓고 일을 시켜서 좋고 일하는 사람들도 기분 좋게 일하고 정당하게 보수를 받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홈쳐낸 채소가 아니라 일을 하고 정당하게 받은 물건이니 시장에 내다 팔아도 여자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이소선도 물건만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구석진 곳에 물건을 숨겨두지 않고 떳떳하게 제값을 받고 팔았다. 이어서 이소선은 물건을 팔 수 있는 장소를 하나 얻었다. 평판이 좋아지자 작업장 감독이 이런 이소선을 잘 보았는지 길목이 좋은 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조를 지켜서 이소선은 시장바닥에 나온 지 한 달 만에 동료 여자들한테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업주들이나 감독들로부터도 좀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인가. 이소선이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이소선은 이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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