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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월간 말> 기사협약: 여기 소개하는 두 개의 글은 최장집 교수에 대한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이 한창이던 1998년 12월호 <월간 말>에 실렸던 기사다. 필자인 정지환 기자는 이번 달 중순에 발간되는 <월간 말> 4월호에 '일본 교과서 왜곡과 조선일보·동아일보'(가제)라는 기사를 게재할 예정인데, 독자 의견 중 일부를 엄선해 싣는 한편 제보가 있으면 추가 취재를 하겠다고 밝혔다-----편집자)


조선일보의 친일행각(1)


'반공 콤플렉스'의 뿌리는 '친일 콤플렉스'


정신분석학은 유년시절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라고도 한다)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찰한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통해 정신분열 증세의 근원을 밝혀 낼 수 있다고 보았다. 현재 나타나는 독특한 심리나 행동의 근저에는 유년시절에 형성된 어떤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프로이트의 충고에 따라 우선 <조선일보>의 ‘유년시절’을 고찰해 보자.

이완용과 쌍벽 이룬 ‘매국노’ 송병준이 발행

1919년 한국 민중의 3·1시위투쟁에 놀란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1920년 그 일환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이 허가된다. 창간 당시 표면적으로나마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와 달리 <조선일보>는 애초부터 ‘친일지’로 출발했다. ‘신문명 진보주의’라는 창간 당시의 <조선일보> 사시(社是)는 총독부의 문화통치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발간 주체도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한 친일 경제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였다. 이완용과 함께 매국노의 양대 거두였던 송병준이 3년 6개월 동안 <조선일보>의 판권을 소유하기도 했다. 그런 <조선일보>에 민중들이 등을 돌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일보>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1924년 9월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부터다. 그는 이상재를 사장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 사회주의 성향의 젊은 기자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때 사회주의, 배일 성향의 기사가 양산되었으며 기사압수 및 정간조치가 잇따랐다. 그 덕분에 <조선일보>는 어느 정도 친일 이미지를 벗을 수 있었다.

평북 정주 출신의 광산업자 방응모가 자신과 같은 서북계 인맥(평안도 출신 인사들)의 리더인 조만식을 앞세워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한 것은 1933년 3월. 그러나 그는 애초에 항일에는 뜻이 없는 ‘상업주의’ 신봉자였다. 동아일보와 소모적인 사세경쟁이나 벌이며 ‘적전분열’을 일삼다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중반부터 철저한 ‘친일보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는 1940년 폐간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도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가 곧바로 복간호를 내지 못했던 것은 바로 <조선일보>의 이런 친일전력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수년 전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참사를 생생히 기억하듯 당시 민중들도 해방 직전까지 친일에 몰두했던 <조선일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쇄 노동자들이 <조선일보>의 복간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일보>는 미군정에 의해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무력화되고 친일세력이 전열을 가다듬은 뒤에야 복간호를 낼 수 있었다.

압수 기사 다수는 박헌영 등 좌파기자들이 쓴 것

“우리가 친일을 했다면 어떻게 기사가 압수되고 정간과 폐간까지 당했겠느냐.”
1988년 12월 13일 언론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씨(현 회장)가 친일행각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내뱉은 말이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는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반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과연 정당한 항변인가. 꼼꼼하게 검증해 보자.

첫째, <조선일보>의 기사압수 건수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압수과정의 내막과 압수기사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70년사' 뒤쪽에는 '해방전 <조선일보> 압수기사' 제목이 ‘자랑스럽게’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조선일보>는 기사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가 어렵사리 찾아본 몇 개의 압수기사를 보자.

“언제나 투쟁이란 다수자가 승리를 얻는 것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를 점한 무산계급의 단결된 조직만 완성하면 최후 승리는 다반사일 것이다.”(<조선일보> 1924년 11월 21일자)
“(조선은 현상 타개를 필요로 하는데) 요체는 정치적인 제국주의와 경제적인 자본주의를 합리적인 제도로 바꾸는 데 있는데 이에는 반드시 적로(赤露)의 세계혁신운동과 그 보조는 일치하는 것이다.”(<조선일보> 1925년 9월 8일자)

여기서 ‘적로’란 소련을 말한다. 특히 두 번째 기사 때문에 <조선일보>는 정간까지 당하게 된다. 방우영 사장이 말한 혁혁한 항일의 표징인 ‘압수’와 ‘정간’은 결국 사회주의 성향의 기자들과 그들이 쓴 기사들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박헌영 등이 <조선일보>에서 활약한 기간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무려 90건의 기사가 총독부에 압수 당했다. 그러나 1925년 9월 박헌영 등 화요계 중심의 사회주의 기자 17명은 강제 해고되어 쫓겨난다. 총독부의 압력에 경영진이 굴복한 것이다.

한편 방우영씨의 양조부인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경영하던 8년 동안 압수된 기사는 23건에 불과하다. 이는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하던 3년 6개월 동안 82건의 기사가 압수된 것과 대조적이다. 더욱이 1936년 8월부터 1940년 폐간 때까지는 단 한번도 기사가 압수된 적이 없다. 방응모의 대일관과 시국관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조선일보>는 반일성향이 강했던 사회주의자 기자들 덕분에 그나마 민족지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조선일보>가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방우영씨의 주장처럼 항일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1940년 8월 10일의 폐간사만 보아도 그것은 금방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지나사변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일제의 지상목표인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불철주야로 분발했음을 읍소하며, 국책에 순응해서 폐간조치를 감수하기로 했다고 <조선일보> 스스로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는 보상금까지 챙겼다. <조선일보> 폐간 뒤 <조광>의 친일행적은 또 얼마나 노골적이었던가.

친일행각 숨기려고 치켜든 반공의 깃발

그러나 <조선일보>는 철저하게 이런 사실을 은폐, 왜곡해 왔다. '<조선일보> 70년사'에도 1940년 이후의 상황은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들이 친일행각에 대한 원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자신의 원죄에 대한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반성하면 충분히 치료될 수 있건만, <조선일보>는 끊임없이 사실을 숨기고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정신적 억압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1994년 문민정부 교육부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국사교과서를 개편하기 위한 시안을 발표했다.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이 아우성을 치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개편 시안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광복이 되기까지 임시정부, 건국동맹, 독립동맹, 만주무장대 등이 어떻게 활동했던가를 이해시킨다. △일부 민족지도자들이 일제 말 일제의 황국신민화운동과 침략전쟁에 협력하였음을 간략히 기술한다. △광복 후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통일국가 건설이 민족의 과제였음을 이해하게 한다. △이승만 한민당의 단정운동 전개과정을 이해시킨다.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이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교과서냐”, “마침내 주사파가 교육당국까지 침투했다”고 시비를 걸었다. 결국 <조선일보>의 반공선동과 극우단체들의 아우성 속에서 교과서 개편시안은 이리저리 찢겨졌고 결국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평소 그렇게도 역사의 정통성을 강조했던 <조선일보>가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합의된 민족적 대의는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자주통일 등 세 가지였다. 그것은 당시 우리 민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명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친일행각을 은폐하기 위해 반공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반공은 그들의 친일행위를 가리기 위한 외피였다. 특히 <조선일보> 등 일제시대 말기에 친일에 앞장섰던 언론들이 그런 역할을 주도했다. 결국 <조선일보> 반공콤플렉스의 뿌리는 친일콤플렉스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체제가 고착화되자 <조선일보>는 반공을 내건 독재정권에 적극 협력했다. 친일파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뒤 독재정치를 하다 국민저항에 밀려 물러난 이승만과, 장기집권을 시도하다 측근에 의해 살해된 일본육사 출신의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주도했던 <조선일보>. 그들은 최장집 교수 사건과 관련해 “용어 사용이 얼마나 무서운 의미를 띠고 있는지”(<조선일보> 10월 24일자) 알아야 한다고 공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적반하장이다. <조선일보>야말로 폭력적 용어를 남발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1988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명명한 개념)을 ‘무정부 상태의 폭동사태’로, ‘광주시민’을 ‘난동자’로 매도했다. 반면 그들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을 ‘구국의 영도자’로 찬양했다. 1972년에는 영구집권을 위해 국회해산, 대학휴교, 언론검열 등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칙을 유린하면서 선포한 비상계엄령을 ‘구국의 영단’(72년 12월 28일자 사설)으로 찬양하기도 했다. 특히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를 ‘구국의 영단’이라고 찬양한 대목은 과연 <조선일보>를 진정한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마조히즘적 정신분열 증세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의 친일행각(2)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 위한 조약"


●“천황폐하께 범인(犯人) 이봉창이 폭탄 던졌으나 무사히 환궁하시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조선의 불행”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 위해 체결한 조약”
●“데라우찌 총독은 조선의 대근원 기초한 위대한 창업공신”
●“일제의 30년 조선통치로 ‘문화조선 건설’ 결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잘 운용해야 항일운동 근절 가능”
●“일본육군지원병제도는 조선통치사의 신기원이자 성스러운 일”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현으로 민족융합의 이상적 경지로 맥진(驀進)―이는 모두 천황의 존엄스런 위세 때문인 동시에 팔굉일우(八紘一宇) 대건국정신(大建國精神)의 발로.”(<조광> 1940년 10월호 사설)
‘국가안보의 파수꾼’이자 ‘사상검증의 심판관’을 자처하는 <조선일보>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의 전신)의 지면을 장식했던 기사의 일부다. 여기서 ‘맥진’이란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돌진”을, ‘팔굉일우’는 “온 세상과 한 우주”를 뜻한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세계를 위해 좌우를 돌보지 않고 돌진했던 <조선일보>의 친일 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다.

<조선일보>와 <조광>의 친일보도 경향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인용 기사는 가능한 원문을 살리되 일부는 현대문법에 맞게 고쳤다.)

1. 일제침략에 항거한 민족항쟁을 테러로 매도

“광주학생사건에서 발단이 된 학생시위사건이 전 조선에 확대된 오늘날에 있어 제군이 비상(非常)을 버리고 평상(平常)에 돌아와 고요한 책상 앞에 용기있게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 허다한 불만과 실망 속에 이토록 확대된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1930년 1월 12일자 사설 '동요 중의 학생제군―책상 앞으로 돌아가라')

한국근대사의 ‘상식’은 광주학생사건을 청년학생들의 반일민족항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학생들에게 배일운동을 즉각 중단하고 학원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온몸으로 항거한 의거를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일’로, 망국의 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의 영달을 위해 공부나 하는 것을 ‘정상적이고 용기있는 일’로 본 것이다.

“천황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에 앵전문앞에 이르렀을 때 사고가 발생하였다 …… 전방 약 18간에 수류탄과 같은 물건을 던진 자가 있어서 궁내대신 마차의 좌후부 바퀴 부근에 떨어지어 차체 바닥에 엄지손가락 만한 손상 두셋을 나게 하였으나 천황의 마차에는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 50분에 무사히 궁성으로 돌아오시었다. 범인은 …… 조선 경성생 이봉창(32).”(1932년 1월 10일자 기사 '천황폐하 환행도중 돌연 폭탄을 투척')

결국 요지는 이봉창이라는 한국인 출신 ‘범인(犯人)’의 폭탄 테러에도 불구하고 천황폐하께서는 천만다행히도 무사하시었다는 말씀이다. (부끄럽게도 이 사건을 항일투쟁사건으로 특종 보도한 것은 중국의 <국민신보>였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은 사회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 만큼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 운용을 잘못하면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사상운동에 도발적 반동기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사유한다.”(1936년 12월 13일자 사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조선일보>는 항일을 지향하는 독립운동과 사상운동을 말살하려는 이 악법의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총독부가 이 악법을 잘 활용하여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독립운동과 사상운동의 싹을 아예 밟아 버려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2.‘황민화’ 기사로 ‘천황폐하’께 복종과 충성을 서약

자칭 ‘1등 신문’ <조선일보>는 일제시대에도 수많은 1등 기록을 남겼다. 조선 신문으로는 최초로 새해 첫날 신문 1면에 일왕 부부의 초상을 대문짝만하게 싣기 시작했으며(1936년 1월 1일자), 가장 먼저 일본군을 ‘아군’ 혹은 ‘황군’으로 표기한 것이다(1937년 7월 19일자). 일본군의 침략전쟁에 돈을 대라고 조선 동포들에게 강요한 ‘국방헌금’ 사고(社告)를 제일 먼저 낸 것도 <조선일보>였다(1937년 8월 12일자).

그런 <조선일보>였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의 민중’을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표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1937년 8월 23일자). 특히 ‘<조선일보>의 황제’인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나 ‘천장절(天長節)’이 되면 <조선일보> 지면은 ‘천황폐하’의 은혜로운 통치에 대한 감격으로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조선 침략의 괴수’ 히로히토의 생일을 맞이해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가 지어 바친 ‘용비어천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춘풍(春風)이 태탕하고 만화(萬花)가 방창(方暢)한 이 시절에 다시 한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바이다. 성상폐하께옵서 옥체가 유강하시다니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일년일도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鴻遠)한 은(恩)과 광대(廣大)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적성봉공(赤誠奉公) 충(忠)과 의(義)를 다하야 일념보국(一念報國)의 확고한 결심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1939년 4월 29일자 사설 '봉축 천장절')

봉건왕조시대에 정도전이 이성계에 바친 헌사도 이보다 더하진 못했으리라. <조선일보>는 같은 용어를 쓰면서도 항상 극존칭을 사용했다. 예컨대 ‘황공(惶恐)’을 ‘성황성공(誠惶誠恐)’으로, ‘경하(慶賀)’를 ‘동경동하(同慶同賀)’로, 충성(忠誠)을 ‘극충극성(克忠克誠)’이라고 과장되게 표현했다. 아니 <조선일보>는 신문 사설을 아예 교주에게 바치는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일왕을 ‘지존’이라고까지 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천황 지존’에게 “황공무지와 감격을 못 이기겠다”고 토로한 뒤 이번에는 “신동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하여 황도일본의 위광을 빛내자”면서 충성맹세를 늘어놓는다.

<조선일보>는 ‘조선 백성의 신문’이기를 포기하고 ‘일본 천황의 신문’이 되기로 작정했다. 사설 말미에 “천황의 무강과 황실의 번영을 받들어 축하하면서 우리가 경행하는 이유를 강조하여 둔다”고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러한 충성서약은 매년 되풀이된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동안 조선의 백성을 천황의 ‘신민(臣民)’이라고 한 것도 부족했던지, 이 무렵부터는 아예 ‘신자(臣子)’라고 바꾸어 표기했다는 점이다.

3. 내선일체 미화하고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 동원

“황국의 위무선양(威武宣揚)과 동양평화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제일선에 선 출정장병으로 하여금 안심과 용기를 가지고 신명을 다하게 하는 데는 총후에 선 일반국민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1937년 8월 12일자 사설 '총후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의 목적')

1937년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중국 대륙을 침략하면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조선일보>는 즉각 조선 민중의 임전태세를 강조했다. 후방에서 조선 민중이 일본군을 지원하는 것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당연히 발휘해야 하는 의무와 성의의 일환”이라고도 주장했다.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1938년부터 <조선일보>의 ‘친일보국’과 ‘전쟁미화’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해 1월 1일자 1면에 일본군 지원병들의 열병식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게재한 <조선일보>는 특집기사를 통해 당시 미나미 총독이 제창한 ‘내선일체’를 미화하는 일에 열중한다. <조선일보>는 내선일체의 목적을 “조선 민중을 상대로 한 국민으로서의 신념상 의무, 권리의 동등을 전제로 한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동족적 친화감을 깊게 하려 함에 있다”고 해석하고 “물론 이 실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조선 통치사의 한 신기원을 이룩한 것(<조선일보>는 ‘에포크 메이킹’이라고 영어식으로 표현했다)이자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 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것에 대하여 이미 본란에 수차 우리의 찬의를 표한 바 있거니와……금번 지원병제도의 실시는 당국에서 상(上)으로 일시동인(日視同仁)의 성려(聖慮)를 봉체(奉體)하고 하(下)로 반도민중의 애국열성을 보아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대정신으로 종래 조선민중의 국민으로서의 의무……황국신민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장래 국가의 간성으로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래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1938년 6월 15일자 사설)

일제는 1938년 4월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만들어 냈다. 한국 청년들을 그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제도를 가리켜 ‘조선통치사의 신기원’이라고 찬양했다.

아울러 전쟁에 나가는 것은 “천황과 일본의 신하이자 백성인 조선의 민중으로서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갈충진성’이란 말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갈충진성’ 중의 ‘갈진(竭盡)’은 “다하여 없어짐”이라는 뜻이다. 결국 한국 청년들에게 천황과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하여 싸우다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4. <조선일보> 폐간 뒤 더 노골화된 친일매국의 길


<조선일보>는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1940년 8월 11일 폐간된다.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저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고백한 폐간사의 한 대목처럼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은 아니다.(‘숙야분려’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최선을 다하고 고민했다”는 의미인데, 결국 친일행각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는 자랑이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월간지 <조광>을 확대 개편하고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 국책에 따라 시국을 인식시키는 데 일단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광> 1940년 7월호 권두언 '일본제국과 천황에게―성은(聖恩) 속에 만복(萬福)적 희열을 느끼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일보>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상태였다. 특히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은 방응모가 일제의 조선 통치 30년을 맞이해 쓴 다음의 글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능멸이고 배반이며 반역이었다.
“일한양국은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데라우찌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大本)을 정(定)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거니와……30년 동안 7대에 이르는 총독들은 그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특색있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 건설을 결실……2천3백만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를 실천해 황국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사려 깊은 시정(한일합방을 말함) 30주년을 맞이하여 각각 자기의 시국인식을 반성하고 시국의 장래를 투명하게 관찰하여 일층 각오를 굳게 하고 또 일단의 노력을 더하여 그 영예를 선양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조광> 1940년 10월호)

친일매국신문 <조선일보>, 역사의 법정에 서야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이 반민족적 친일행위에 대해서 시인하거나 사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도리어 해방 후에는 이를 은폐한 채 민족지를 자처하면서 독재찬양의 길을 걸었다. 그런 <조선일보>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하나 ―친일파에 맞서 민족정기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세력과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진보세력을 ‘반공’의 이름으로 때려잡는 일이었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도 크게 보면 그런 친일콤플렉스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12월 13일 언론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현 회장)은 이 철 의원이 <조선일보>의 친일전력을 언급하자 도리어 역정을 내며 이렇게 큰소리 쳤다.

“<조선일보>가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했단 말이요? 악랄한 조선총독부 아래 선열들이 독립을 지키기 위해 고문당하고 피흘린 것을 매도하지 마시오. 그렇게 매도하면 우리 역사가 모두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이오.”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비판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것이 역사를 매도하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비판하면 한국의 역사가 모두 뒤집힌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주와 경영진,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들은 알아야 한다. 프랑스가 항독 해방전쟁이 끝난 1945년 나찌 독일에 협력했던 매국노들과 반역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숙청시켰다는 사실을.

실제로 프랑스는 민족과 나라를 배신하면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그 중에서도 ‘지식을 팔아’ 나찌를 도운 언론인들이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친나찌 행위로 떼돈을 번 언론사 사장 알베르 르죈느와 친나찌 보도를 주도했던 언론사 주필 조르주 쉬아레즈 등 많은 언론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들이 썼던 사설과 기사가 사형선고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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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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