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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왕들의 거래"라는 드라이든의 말은 각종 명언 사전에 실려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타군의 저서 <전쟁과 평화>(웅진지식하우스)에는 "전쟁은 전염병처럼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들이나 사회집단이 의도적으로 부추기고 일으킨다"라는 갈파가 나온다. 그런가 하면, 실비 보시에의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푸른숲)에도 "사람들은 조국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군수업자를 위해 죽는 것"이라는 촌철살인도 등장한다.

인류사는 물론 우리나라 고대사에도 무수한 전쟁이 있었다. '조국'과 '군수업자'가 동인일이었던 삼국 시대 초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전쟁이 일어났을까? 대구·경북에 산재해 있는 삼국 시대 초기의 여러 사적들을 답사하면서 이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찾아본다.

(사진 왼쪽부터) 대구 불로고분군, 영주 순흥 벽화고분, 성주 성산고분군은 5-6세기 역사유적이다. 이 때는 대가야가 멸망한 시점이므로 이들 고분들이 왕릉일 수는 없다. 하지만 금동관 출토, 내부 벽화, 무덤 크기 등은 왕릉을 방불하게 한다. 어째서일까?
 (사진 왼쪽부터) 대구 불로고분군, 영주 순흥 벽화고분, 성주 성산고분군은 5-6세기 역사유적이다. 이 때는 대가야가 멸망한 시점이므로 이들 고분들이 왕릉일 수는 없다. 하지만 금동관 출토, 내부 벽화, 무덤 크기 등은 왕릉을 방불하게 한다. 어째서일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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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불로고분군은 5~6세기, 영주 순흥 벽화고분은 6세기 후반, 성주 성산고분군은 5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사적들이다. 하지만 왕릉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금관가야 532년 멸망, 대가야 562년 멸망 등을 볼 때 5∼6세기에 대구·영주·성주에 나라가 존재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당시 정복국의 왕은 항복한 족장에게 지역의 통치권을 계속 보장했다. 큰 무덤을 축조하는 것도 허용했다. 정복지에 관리와 군대를 파견할 만한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광개토대왕이 직접 김해까지 내려와 금관가야와 왜구를 진압한 뒤 그냥 돌아간 까닭도 마찬가지 사정 탓이었을 터이다). 그래서 261년 이전에 멸망한 달구벌국(대구의 고대국가)의 비산동 고분에서 '왕관 같은' 금동관이 출토된 것이다.

달구벌국 고분군서 금동관 출토된 까닭은?

죽은 뒤에도 머리에 댓잎을 꽂은 '하늘의 군사'를 보내어 적국의 침범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는 신라 미추왕릉의 무덤 뒤편에는 지금도 대나무들이 무성하다. 미추왕은 김씨 최초의 신라 임금이다.
 죽은 뒤에도 머리에 댓잎을 꽂은 '하늘의 군사'를 보내어 적국의 침범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는 신라 미추왕릉의 무덤 뒤편에는 지금도 대나무들이 무성하다. 미추왕은 김씨 최초의 신라 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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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왕권이 강화된다. 미추왕의 고사는 왕권 강화의 사례를 잘 증언해준다. 미추왕의 고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책에 모두 실려 있는 청도 이서국의 297년(유례왕 14) 신라 공격 사건, 즉 죽엽군(竹葉軍) 설화를 말한다.

이서국 군대는 서울 금성을 포위할 만큼 강했다. 신라는 이를 물리치지 못했다(이는 아직 신라가 진한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때 머리에 댓잎을 꽂은 정체불명의 군사들이 출현해 적군을 물리친 뒤 미추왕릉 부근에서 사라진다.

전투가 끝난 뒤 미추왕릉 일대에는 댓잎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14년 전에 죽은 미추왕이 나라를 걱정해 사후에도 군사를 움직인 것이라고 믿었다. 2014년 현재도 미추왕릉 뒤편에는 대나무숲이 무성하다.

왕위 계승 신라 김씨들, 미추왕 미화 작업 골몰 

두 번째 김씨 임금인 내물왕의 능. 내물왕 이후 김씨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두 번째 김씨 임금인 내물왕의 능. 내물왕 이후 김씨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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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엽군 설화'는 김씨 최초의 임금인 미추왕을 미화하기 위해 신라 당대에 널리 회자됐던 이야기로 여겨진다. 미추왕을 미화했다는 것은 김씨계가 신라의 권력을 대물림할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다. 왕권이 강화돼 귀족들의 권세를 억누르지 못하는 한에는, 산 임금도 아닌 죽은 임금이 적국을 물리쳤다고 역사책에 기록할 수는 없다.

왕권이 강력해진 것은 정복전쟁의 결과였다. 동진해 동해까지, 남진해 살수(청천강, 淸川江)까지 국토를 확장한 정복군주 태조왕(53∼146)의 업적에 힘입어 고구려 고국천왕(179∼197)은 부족 세력이던 5부를 행정적 성격으로 개편했다. 백제는 한강 일대를 완전 장악한 정복군주 고이왕(234∼286) 때 6좌평제와 16관등제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

신라는 낙동강 동쪽을 거의 차지한 내물왕(356∼402) 때부터 왕의 칭호가 '나이 많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을 뜻하는 이사금(尼斯今)에서 '대장군'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었고,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그 후 눌지왕(417∼458)부터 왕위 부자 세습이 이뤄졌다. 법흥왕(514∼540)은 6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정비해 17관등제를 완비했다.

내물왕 때 김씨 왕위 세습, 눌지왕 때 부자 세습

법흥왕릉
 법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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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화백회의의 만장일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법흥왕은 531년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을 뒀다. 왕은 상대등이 화백회의의 논의 결과를 보고하면 최종 결정만을 내렸다. 그만큼 왕권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법흥왕은 517년 처음으로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를 설치했다.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복을 제정했고, 532년 금관가야를 합병했다. 536년에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해 자주 국가의 위상을 천하에 알렸다.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27년 불교를 공인하는 것도 결국은 그만큼 왕권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구 동구 불로동 335번지의 '대구 불로고분군', 영주 순흥면 읍내리 산 29번지의 '영주 순흥 벽화고분', 성주 성주읍 성산리 905-1번지의 '성주 성산리 고분군'은 오늘도 답사자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금동관을 토해냈던 달구벌국 비산동 고분군은 개발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사적 188호인 내물왕릉은 계림과 경주향교 사이에 있다. 사적 176호인 법흥왕릉은 경주대학교 뒤편에 있다. 조금 찾기가 어려우므로 경주시 효현동 산 63번지라는 주소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미추왕릉은 정면보다 뒤에서 봐야 제맛

정면에서 본 미추왕릉. 다른 왕릉과 별 차이가 없다. 역시 미추왕릉은 대숲이 있어야 제격이다.
 정면에서 본 미추왕릉. 다른 왕릉과 별 차이가 없다. 역시 미추왕릉은 대숲이 있어야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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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은 경주 대릉원 안에 있다. 대릉원은 후문으로 들어서면 황남대총이 먼저 나오고, 정문으로 들어서면 미추왕릉부터 만나게 된다. 미추왕릉은 김씨계의 첫 임금답게 특급의 무덤 보호를 받고 있다. 신라 왕릉들 중 출입문이 따로 있고, 묘석 등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는 무덤은 오릉, 무열왕릉, 신문왕릉, 그리고 미추왕릉뿐이다.

미추왕릉은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뒤로 가서 바라봐야 더 큰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능 뒤편에 대숲이 울창해 '죽엽군 설화'가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태그:#미추왕, #법흥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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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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