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이즈 러너> 메인 포스터.

영화 <메이즈 러너> 메인 포스터. ⓒ 20세기 폭스 코리아

영화를 보며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초반부터 기대하고 호기심과 두려움 혹은 결말에서 어떤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지 잔뜩 기대하고 고대했건만, 영화의 모든 것이 등장인물을 테스트하기 위한 장치, 혹은 그들의 일상을 분석하려는 위험한 장난거리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다.

<큐브>와 <하이퍼 큐브>가 그랬다. 물론 <레지던트 이블>에서 앨리스를 실시간 위성으로 감시하며 체내에 칩을 심어 일부러 탈출하도록 놓아 주는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관객은 영화에 깊이 흡입돼 주인공과 그들의 무리에 동화가 되어 있는 상태다.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환상 혹은 테스트였음을 아는 순간 주인공과 같은 허탈감과 자존감에 심한 상처를 입는다.

혹은 감독의 욕심으로 주인공에겐 닫히고 관객에게만 열린 장치로서 스토리가 이어질 때, 관객은 주인공의 심리상태에 폭풍 감정이입이 되며 그를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한편으론 주인공이 어떻게 이 꼭두각시 같은 인생을 인지하고 그를 둘러싼 세상을 향해 무언의 카타르시스를 보여줄지 기대하기도 한다.

<트루먼 쇼>와 <메이즈 러너>

그중에 나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 버린 영화가 있다. 바로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 쇼>이다. 마치 내 삶의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는 존재들에게 낱낱이 읽혀지고 그들에게 웃음을, 때로는 조롱을 당한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조명 장치가 떨어지는 장면이나 트루먼이 운전할 때 주파수에 잡히는 멘트 "트루먼이 진입하고 있다, 전원 레디!" 하는 신은 영화의 주제로 들어가는 혹은 영화 몰입을 위한 행위였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트루먼의 20년이 넘는 일생의 비밀이 하나 둘 밝혀진다.

트루먼의 탄생과 유년시절 그리고 현재의 성인이 되기까지의 모든 인생이 고스란히 라이브로 전 세계 사람들의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내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주고 말았다.

트루먼 마을을 비추는 태양은 이 프로그램의 피디가 머물고 있는 스튜디오의 조명이다. 그는 트루먼 쇼를 위해 마을을 만들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캐스팅하고 심지어는 여자 친구와 직장까지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교묘한 연출력을 발휘해 그의 주변 사람들은 트루먼 쇼를 지원하는 회사의 상품 광고까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한편의 잘 나가는 드라마였다.

<트루먼 쇼> 트루먼은 그의 탄생부터 유년시절과 중고등학교, 현재의 성인까지 모든 사생활이 낱낱이 티브로 생중계 된다.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며 그의 성장기에 눈물짓고 대견해 하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지 기대하고 있다. 당연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쇼'이자 '드라마'이다.

▲ <트루먼 쇼> 트루먼은 그의 탄생부터 유년시절과 중고등학교, 현재의 성인까지 모든 사생활이 낱낱이 티브로 생중계 된다.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며 그의 성장기에 눈물짓고 대견해 하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지 기대하고 있다. 당연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쇼'이자 '드라마'이다. ⓒ 파라마운트 픽쳐스


마지막에 트루먼이 배를 타고 세상의 끝에 다다른 곳이 그를 창조한 스튜디오의 벽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트루먼의 인생이 너무 가여웠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난 트루먼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진정한 용기라는 것은 나를 옭아매고 있는 타인의 시선과 관념을 이겨내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난 나 자신을 돌아보며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처럼 잔인한 영화가 있다니! 영화라는 도구로 미디어와 네트워크되어 있는 세상의 추잡함은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무시하곤 한다. 이는 올리버 스톤 감독이 <킬러>라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미디어 네트워크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한 것과 궤적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메이즈 러너>를 보며 <트루먼 쇼>가...

이번에 보게 된 영화 <메이즈 러너>도 마찬가지였다. 이해의 난이도가 다르고 이야기의 방향이나 설정은 다르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과학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정당화되어온 그간의 실험과 반인격의 행태를 드러낸다.

실험자들 테스트에 의해 등장인물들이 죽음의 위험에 처하고 절망하는 장면 그리고 그 후엔 그들이 만들어 낸 피실험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될 것이 뻔한 영화. 그럼에도 마지막에 스토리의 여지를 남겨 둔 것은 그나마 원작의 깊고 화려한 주제가 영화라는 영상이 구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초반부 도입기엔 마치 일종의 소규모 공동체의 실험 같은 이야기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에 예쁜 여자아이가 나타나면서 공동체의 분열과 생존의 문제, 여자를 둘러싼 치정살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까 말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고 오직 살기 위한 몸부림만이 보였다. 글레이드라고 불리는 마을 안에서 살던지 아니면 목숨을 버릴 각오하고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미로를 넘어 바깥세상으로 나가던지 말이다.

<메이즈 러너>의 주요 장면 한 달에 한 번씩 한 사람씩 마을로 원인도 모른 채 도착한다. 이 마을은 커다란 미로 안에 갇혀 있으며, 미로 안에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 한 명이 올라오며 이야기는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 <메이즈 러너>의 주요 장면 한 달에 한 번씩 한 사람씩 마을로 원인도 모른 채 도착한다. 이 마을은 커다란 미로 안에 갇혀 있으며, 미로 안에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 한 명이 올라오며 이야기는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 20세기 폭스 코리아


시공을 초월한 변형된 느와르 영화

어쩌면 느와르의 형태를 닮아있다. 암울한 미래,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이성이 조화롭지 못하여 파괴되고 마는 문명, 그리고 새롭게 발생한 바이러스와 이에 노출된 인간들, 그러나 이 바이러스에 면역력을 가진 채 태어난 아이들이 생겨난다.

이 아이들이 기존 세력들에게는 희망이고 이들의 생태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끌어내는 게 목표이다. 여기에서 모든 비인간적인 실험의 행위는 정당화고 뭐고 간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수가 살기 위해 소수를 감금한 테스트가 필요하다 여기는 것이니까 말이다.

전문 인력들이 10년은 걸쳐 만들었음직한 거대한 미로. 높이만도 거의 50m에 달하고 이에 쏟아 부은 콘크리트의 양은 63빌딩 100채는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큐브>와는 좀 다른 거칠고 빠른 호흡의 카메라 워크가 맘에 들었다. 여기에서 풍겨 나오는 회색빛 거대 미로는 말 그대로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실험자와 피실험자들을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레지던트 이블>의 장면과 대사를 그대로 가져왔는지 결말이 어찌 이리도 흡사할까? 그럼에도 다음 편이 기대된다. 비록 활자로 느끼는 감정이입을 따라갈 수 없을지라도 영상을 통한 그들의 생존법칙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기는 하다.

메이즈 러너 트루먼 쇼 레지던트 이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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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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