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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북한 출신 청년단체들의 통합 기구로 출범하여, 친일 청산 및 통일정부 구성을 방해하며 가공할 테러를 자행한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 이들은 1948년에 발생한 제주 4·3항쟁은 물론이고 전국 곳곳의 새 시대 열망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또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 같은 인물도 배출해냈다.

이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자고 외치는 극우파가 지난달 2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 출현했다.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를 표방한 이들은 세월호 참배객들이 남긴 노란 리본을 수거하려다가 시청 직원 및 경찰들의 제지를 받고 물러났다.

이들의 시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표출되는 사회개혁 열망에 대한 극우세력의 불만을 이용해서 서북청년단의 영광을 재현해보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서북청년단이 어떤 단체였는지를 되돌아보면, 이런 단체를 재건하겠다며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직후 경북 영천에서는 미군정과 이승만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경북 영천 빨치산 운동으로 기억된다. 반민주적·반인권적 공권력 행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화해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북청년단은 이곳 영천에서도 악질적인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영천향교에 본부를 둔 이들은 사복을 입은 채 총을 들고 다니며 민간인들을 마음대로 살상했다. 즉결처분이란 명분으로 인명을 함부로 살상한 것이다. 이들은 가옥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의 재산을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혼란한 분위기를 틈타 성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에는 미군 정보원이 많았다"

미군정과 이승만에 대한 저항이 가장 격렬했던 제주 4·3 항쟁 때도 서북청년단은 그 악명을 널리 떨쳤다. 제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사람 백정'이었다. 이런 느낌은 학살 행위를 함께했던 경찰들에게도 전해졌다. 1997년에 발표된 제민일보 4·3 취재반의 보고에 따르면 "서북청년단은 토벌을 했다기보다는 힘없는 주민들을 괴롭히고 학살했다"는 당시 경찰의 증언도 있었다.

이런 서북청년단을 재건해서 세월호 사고로 가슴 아파 하는 국민적 분위기를 진압해보겠다는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통합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제2의 서북청년단은 절대로 부활해서는 안 되는 집단이다.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1948년 5월 31일의 모습. 사진 속의 서북청년단은 미군이 주둔한 대한민국의 국회 앞에서 ‘소련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1948년 5월 31일의 모습. 사진 속의 서북청년단은 미군이 주둔한 대한민국의 국회 앞에서 ‘소련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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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북청년단은 부활해서도 안 되는 집단이지만, 부활하기도 힘든 집단이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그들의 광란을 가능케 했던 두 가지 핵심 조건을 재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이다. 독자적 무력이 없는데다가 38선 이북 출신인 서북청년단이 객지인 남한 땅에서 폭력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미군정의 든든한 지원 덕분이었다.

해방 직후에 주한미군은 친일 청산 및 통일을 추진하는 세력을 분쇄할 목적으로 친일파 및 서북청년단과 손을 잡았다. 미군은 특히 서북청년단을 도울 목적으로 월남민들의 남한 정착을 돕고 그들의 주거지를 각 도별로 배정하는 일에 간여했다. 또 서북청년단과 월남민들의 취업도 알선해주었다. 월남민들에게 주거와 직장을 마련해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미군정이 그렇게 한 것은 월남민 속에 포함된 서북청년단을 활용해서 미군에 대한 저항을 제압하고 한반도 점령정책을 완결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은 서북청년단의 4·3 항쟁 진압을 다룬 김평선의 논문 '서북청년단의 폭력 동기 분석'에 소개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원 박아무개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사무소에 근무할 수 있도록 알선해주었다. 그런데 박씨가 면사무소에서 쫓겨나자, 미군정은 그를 미 육군 제24사단 첩보부대인 CIC의 성산포 사무소 직원으로 기용했다.

이것은 미군이 박씨를 제주도에 보낸 본래의 목적이 취업 알선이 아니라 첩보 활동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군정이 어떤 목적으로 월남민들과 서북청년단을 지원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박씨처럼 미군 스파이로 활동한 서북청년단원이 많았다는 점은 김구 암살범 안두희의 증언에서도 나타난다. 국내 언론에서 수차례 보도된 것처럼, 죽기 전에 안두희는 자신을 추적하는 고 권중희 등에게 "서북청년단에는 미군 정보원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미군정 비호 아래 온갖 폭력, 불법행위 자행"

김구가 서북청년단원 겸 미군 첩보요원 안두희에게 암살당할 때 입었던 옷.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김구 사저)에서 찍은 사진.
 김구가 서북청년단원 겸 미군 첩보요원 안두희에게 암살당할 때 입었던 옷.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김구 사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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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의 유착 관계는 저명한 언론인인 고 리영희의 대담록 <대화>에서도 언급됐다. 이 대담록에서 리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미군정의 도움으로) 남한에 잔존했던 악질적인 반역자들과 친일파들이 이북에서 도피해온 같은 부류의 악질분자들과 결탁하여 남한 사회를 장악해버렸던 겁니다. 이북에서 도피해온 그런 부류의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이란 것을 결성해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하에 온갖 테러와 불법행위, 폭력을 자행하고 있었어요."

서북청년단의 미군의 위세를 빌려 사실상 정부기관의 위상을 확보했다. 그들은 마치 국가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미군의 위세를 빌려 호가호위했던 것이다. 해방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제4권에도 이런 상황이 설명됐다.

"경찰이나 군인이 무색할 정도로 투철한 그들(서북청년단)의 반공의식은 국책 수행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그 도가 지나쳐서 판을 어지럽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처럼 해방 직후의 서북청년단을 가능케 했던 후원자는 미군정이었다. 미군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북 출신인 그들이 남한 땅에서 그렇게 마음대로 폭력과 권세를 행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런 조건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주한미군이 해방 직후 때와 같은 의지와 열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또 그때의 주한미군을 대체할 만한 강력한 후원자를 찾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서북청년단 폭력 가능케 했던 당시의 국제정세

서북청년단을 후원한 주한미군의 수장, 존 하지 미군 중장. 사진 속의 존 하지가 김구·이승만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이승만 사저)에서 찍은 사진.
 서북청년단을 후원한 주한미군의 수장, 존 하지 미군 중장. 사진 속의 존 하지가 김구·이승만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이승만 사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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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의 폭력을 가능케 했던 또 다른 조건은 당시의 국제정세다. 서북청년단은 동북아시아 냉전 구도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한국·미국·일본·대만 대 북한·소련·중공의 대결 구도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친일파나 반(反)개혁파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밀려난 그들이 남한 땅에서 그렇게 융숭한 대우를 받으며 정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런 냉전 구도가 아니었다면 서북청년단의 테러에 대한 정권의 묵인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한테 무기와 자금이 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이고 방화를 일삼고 성폭력을 자행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앞세워 냉전을 유지하려는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동북아 냉전 구도는 사실상 거의 소멸했다. 냉전의 한 축에 가담했던 대만은 1990년대에 남방정책을 통해 동남아·태평양으로 눈을 돌리면서 동북아 대결구도에서 이탈했다. 남아 있는 한국·미국·일본과 북한·러시아·중국 간에도 냉전은 거의 다 해소되었다. 현재 한국·미국·일본은 각각 러시아·중국과 수교한 상태다. 6개국의 관계 중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제외한 모든 양자관계는 이미 평화적인 관계로 전환됐다.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회원들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참사 추모 노란리본을 강제철거하겠다며 서울시청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노란리본 훼손 시도하는 '서북청년단'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회원들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참사 추모 노란리본을 강제철거하겠다며 서울시청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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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의 전성기를 가능케 했던 조건들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북청년단 같은 조직을 재건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들의 폭력을 재현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는 웃음거리로 끝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무엇보다, 전 국민적 세월호 참사 추모 분위기를 잠재우려는 목적으로 과거의 잔학무도한 테러 조직을 재건해서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아보겠다는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서글프고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태그:#서북청년단,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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