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내용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기다림의 미학'은 대학교 강의시간에 처음 접한 단어다. 미학 비평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뭐에 관한 내용이었는진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그저 '기다림의 미학', 이 말만 뇌리에 박혔었다. 기다리는 건 뭔가 쓸쓸한 일이고, 기다리는 건 혼자만 힘든 일 같이 느껴졌는데 그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이 뭔가 어린 나에겐 난해하면서도 멋지게 보였나보다.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기다림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그 말의 모순만큼이나 내 태도 역시 모순적이었다. 어려운 것을 멋지게 봤던 그때의 나. 모순은 결코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이 말을 통해 깨달았다.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나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건 기이한 일이자, 신선한 감각을 일깨우는 일이라고. 나는 이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통해 수많은 생각을 확장시켰었다.

장예모 감독에 대해선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중국에서 꽤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사실 한 가지와 그가 데뷔작으로 만든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에 대한 이해 정도가 전부다. 이야기가 또 대학교 때로 이어지는데, 교양강의로 '중국영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교양교육원에서 진행하던 교양강의였기에 타과생을 차별하는 교수님의 횡포 따위도 겪지 않을 수 있었고 영화를 원래 좋아하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엔 중국영화나 섭렵해보자', 싶은 마음에서 선택했던 강의였다.

그 강의시간에 봤던 영화 중 한 편이 바로 <붉은 수수밭>이었다. 그때 여주인공이 공리였단다. 지금은 중국의 대스타지만 그때만 해도 무명의 신인이었을 그녀. <붉은 수수밭>은 그녀의 데뷔작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그 영화는 아주 아주 큰 상들을 휩쓸며 명성을 떨쳤고, 장예모 감독이나 공리 역시 그 후로 영화계에선 승승장구했다. 그 작품에서 함께 성장한 그들이 다시 만났다. 이달 개봉한 영화 <5일의 마중>으로.

 영화 5일의 마중 한 장면

영화 5일의 마중 한 장면 ⓒ 찬란


가끔은 그런 느낌이 든다. 뻔한 스토리에, 뻔한 캐릭터지만 그 뻔함마저도 매력적인 영화가 존재한다고. <5일의 마중>은 사실 진부한 스토리임엔 틀림없다. 캐릭터도 그렇게 특별하진 않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고 영화를 본다면, 그리고 그 시대상을 이해하고 영화를 본다면 결코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다.

여기서 특별할 것 없다는 말은 영화에서 다루는 상황이 특수하기보단 당연한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장예모 감독은 천천히, 느리게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는 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재였지만, 이 진부한 스토리가 장예모 감독을 만났을 땐 '장예모스럽게' 변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뭐라고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꼭 그랬다.

루옌스처럼 억울하게 강제 징집되어 온갖 수난을 겪고 돌아온 지식층이 한둘이었을까. 펑안위처럼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며 자식과 힘겹게 살아간 여인들이 한둘이었을까. 그 당시에 말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아프게 만들었던 비극의 역사였다. 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유독 두 사람의 사랑이 절절했던 건 그걸 그려낸 장예모 감독의 몫이 컸다고 밖에는.

공리,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분장을 한 채 남편을 기다리며 늙어가는, 심신성 기억장애를 가진 여인으로 등장한다. 어디서부터 그녀의 기억이 멈춘 걸까.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 채 남편이 남긴 편지에 기록된 '5일에 돌아갈게'라는 말만 철썩 같이 믿는 그녀다. 일 년 열두 달을 그렇게 꼬박꼬박, 5일이 되면 기차역에 나가 남편의 이름을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는 건 그녀의 의례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영화에선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기차역 신이 꽤 자주 등장한다. 똑같은 장면이 자꾸 반복되면 지루할 법도 한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기다리는 그녀의 기억은 늘 어느 부분에서 멈춰 있을지라도, 그녀를 바라보며 눈물 짓는 돌아온 남편의 표정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울어버리는 딸의 모습이, 그리고 무엇보다 천진난만하게 매달 5일을 새 마음으로 기다리는 아내의 사랑이 스크린 넘어 관객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던 거다.

감동은 익숙함도 특별하게 만드는 감정이며, 감동은 지루함도 상쇄시켜 버리는 커다란 힘이라는 걸 느낀다. 영화의 결말은 예상치 못한 결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면 저런 결말이어서 다행이다' 싶은, 그런 마지막이었다. 서로를 인식한 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겠지만, 둘 중 어느 한 명의 인식이 멈춰버린 채, 한 사람만의 뜨거운 사랑만 남았을지라도 그것 또한 사랑임을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할까.

사랑하는 사람 옆에 남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대 앞에서 그는 절망 대신 기다림을 택한다. 비록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버틸 수 있을테다.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진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남자는 알고 있으니깐. 그러니깐 마음 아파도 그 아픔은 진짜 슬프지는 않을테다. 기다림의 미학을 그는 아내를 향해 실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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