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의 2차 회의 모습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의 2차 회의 모습
ⓒ 홍성수

관련사진보기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이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심각한 상황이다. 단순히 박원순 서울시장이 시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맥락이 너무 고약하기 때문이다.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던 사람으로서 꼭 한마디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에 이 글을 쓴다.

이번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은 일종의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식 시민참여 모델이다. 투표나 여론조사처럼 냅다 '찬/반'을 묻는 방식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상호토론의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시민의 의사가 형성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만약 '인권'이라는 의제가 시민들의 '숙고'를 거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많은 사람들이 상호이해적 존중이라는 인권의 기본이념에 동의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도출되지 않을까?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바로 이러한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정치학자 로버트 달이 줄기차게 강조한 그 '보통사람들의 위대함'을 지켜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회의에서 뚝딱 나온 게 아니다

토의 내용을 정리해 살펴보는 시민 제정위원들 모습
 토의 내용을 정리해 살펴보는 시민 제정위원들 모습
ⓒ 홍성수

관련사진보기


제일 먼저, 서울시 시민들로부터 시민위원 신청을 받았다. 무려 1570명이 지원했다. 이 중 성비와 연령 등으로 안배를 해서 150명을 선발했고, 비례대표 개념으로 각계 전문가 30명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했다(나도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총 180명이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아래 시민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2014년 8월 13일 대망의 시민위원회 1차 회의가 열렸다. 운동장 같이 넓은 회의장에서, 조별로 앉아 토론을 하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 과정에서 '인권연구'가 직업인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논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면서, 조율된 의견을 포스트잇에 적었다. 전체토론과 분과별 심화토론을 반복하며 합의수준은 점점 높아졌다. 인권에 대해서 뭘 좀 알아야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겠다는 열성적인 시민위원들의 요구에 예정에도 없던 인권교육이 두 차례나 실시됐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민위원들은 최종안을 만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전문위원들의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많이 신경 썼다. 사전지식이 많은 전문위원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시민 참여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문위원들은 주로 사회자나 간사 역할을 맡았고, 관련 참고자료를 제공하거나, 각 분과별로 겹치는 내용을 조정하고, 체계상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했다. 문경란 시민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러한 협업을 '시민성과 전문성의 결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 시민제정위원의 포스트잇 메모.
 한 시민제정위원의 포스트잇 메모.
ⓒ 홍성수

관련사진보기


시민위원회 회의는 무려 6번이나 개최됐다. 원래 5회로 예정되었으나 추가 회의를 잡아야 했을 정도로 논의 열기기 뜨거웠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한 자리에서 토론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무 부담도 상당했다. 4개월 동안 시민위원회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를 30번이나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동안 축적되어온 시민사회의 역량과 서울시의 전문적인 행정지원이 결합하면서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나갔다. 서울시의 지원은 '감동적'일 정도였다. 그들은 정말 진심을 다해 이 어려운 회의의 사무국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6회'라는 회의 개최 횟수도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시민배심원제, 참여예산제, 공론조사 등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여러 날에 걸쳐서 한 경우는 흔치 않다. 생업이 있는 시민들이 자주 모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심 회의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었다. 좀 더 광범위한 시민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권역별 토론회 2회, 인권단체 분야별 토론회 9회, 청문회 1회도 열었고, 부대행사로 인권콘서트도 했다. 정말이지 지방자치단체가 할 수 있는 '시민참여'의 모든 방법은 다 동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성애자와 토론하던 시민위원들, 그들은 변해갔다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이 어떻게 논의됐는지 궁금할 것이다. 시민위원들 중에는 유독 성소수자 관련 문제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시는 분들이 십여 분 계셨다. 그 분들이 입장을 바꿀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시민위원들 간의 토론은 격렬했다. 혐오 표현을 제지하는 사회자와 다툼도 벌어졌다.

그래도 공청회나 토론회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악다구니를 퍼붓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내가 바로 동성애자입니다"라고 커밍아웃을 한 시민위원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바로 시민위원회 회의다. 하루 이틀 지나면, 얼굴도 익숙해지고 이름도 부르게 되고 미운 정 고운 정도 들기 마련이다. 옆 자리의 '토론 동료'들을 설득해야하기에 막 나가면 자기만 손해다. 어떻게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자리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위원회의 그라운드 룰. '반 인권적 언행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위원회의 그라운드 룰. '반 인권적 언행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
ⓒ 홍성수

관련사진보기


그러다 보니 논의가 약간 진전되기도 했다. 어느 틈에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성소수자 차별금지만을 대놓고 반대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차별사유를 나열하면, 나열되지 않는 소수자가 소외되니, 아예 아무 것도 나열하지 말자"는 새로운 주장도 제기됐다. 사실 이것은 차별사유가 '예시'일 뿐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는 얘기다. 하지만 나름대로 '인권'을 내세운 논리가 제시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분들이 최초의 입장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상호적대가 아닌 상호이해를 목적으로 옆에 앉은 동료를 설득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었다.

드디어, 최종 6차 회의. 시민위원회는 45개의 조문에 완전히 합의했다. 하지만 5개 조문에 대해서 일부 이견이 제시됐다. 그런데 서울시 관계자는 이 5개 조항에 대해 합의안이 도출되지 않으면 선포식을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장내가 술렁였고 시민위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시민위원들의 대다수는 서울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결로 최종안을 확정한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

문제의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은 마지막 표결 대상으로 배치됐다. 투표 결과는 60 대 17. 차별금지 사유를 나열하자는 쪽이 3분의 2를 넘었다. 이 표결 결과는 꽤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처음에는 입장이 불분명했던 분들 중 상당수가 찬성 쪽에 손을 드셨기 때문이다. 표결 결과는 정말 예측불허였기 때문에 회의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토론과정에서도 중립적 입장에서 서 계시던 분들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정말 많은 분들이 차별금지사유가 나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시민위원회가 의결한 인권헌장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다. 부담을 느끼는 서울시의 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박원순 시장이 "성소수자 차별금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아직 입장이 없다"라고 답했다면, 욕은 했겠지만 이해는 조금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맥락이 완전 다르다. 시민들이 4개월 동안 6번의 회의를 통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결과물을 어떻게 이렇게 간단히 내칠 수 있단 말인가? 서울시는 지금도 '합의 무산'을 언론에 이야기하느라 분주하지만, 정작 열성적으로 참여해온 시민위원들에 대해서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언반구 아무런 해명조차 없다.

시민인권헌장 폐기 사태... 박원순은 왜 침묵하나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상임이사가 서울시민인권헌장(안)공청회를 앞둔 지난 11월 20일 오후 서울 특별시청 후생관에서 발언을 하려고 하자 한 인권헌장 반대 시민이 마이크를 뺏으려 하고 있다. 반대 입장의 시민들은 "박래군 상임이사는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다"며 "공청회 사회자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 인권헌장 반대자들 "사회자를 교체하라"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상임이사가 서울시민인권헌장(안)공청회를 앞둔 지난 11월 20일 오후 서울 특별시청 후생관에서 발언을 하려고 하자 한 인권헌장 반대 시민이 마이크를 뺏으려 하고 있다. 반대 입장의 시민들은 "박래군 상임이사는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다"며 "공청회 사회자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시민들이 무리한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다. 그냥 헌법(11조 1항)과 법률(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의 3,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5조, 군에서의 형의 집행 및 군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6조)에 규정되어 있는 것과 똑같이 차별금지조항을 만들었을 뿐이다 (*최종적으로는 '성별 정체성'이 차별사유로 추가됐다). 서울학생인권조례, 광주인권헌장, 서울성북주민인권선언에 담긴 수준과도 차이가 없다. 국제기준대로 한 것이고, 법대로 한 것일 뿐이다.

대한민국은 유엔이사회 이사국으로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했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에 대한 유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에도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넣는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포함되어 있고,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은 "현행법이 이미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인권 변호사 출신 박원순 시장은 '헌법과 법률'에 적혀있는 사항을 그대로 규정한 인권헌장조차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서울시가 시민위원회에 위임해서 '시민'이 만든 인권헌장을 '시민참여'의 아이콘 박원순 시장이 폐기시킨다고 한다. 이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가지 더 우려되는 점은, 이 사태로 인해 박원순표 시민참여모델이 위기를 맞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합의 없으면 폐기"라는 이번 서울시의 방침은 매우 나쁜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원순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빌미가 없다. 이제는 아무 시민참여기구에나 들어가서 무조건 반대하고, '합의 안되었으니 폐기하라'고 외치면 된다. 인권헌장이라는 선례가 생겼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인권헌장 찍고, 도시계획헌장으로!'라는 글이 인터넷에서 공공연하게 나온다. 이런 사태를 다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내려진 결정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단체들뿐만 아니라, 여성단체들, 민주노총, 그리고 그가 설립한 참여연대도 인권헌장을 선포하라고 촉구했다. 오늘날 시민사회의 성장에는 시민운동가 박원순의 공이 지대했다. 그렇게 성장한 시민사회가 그에게 강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국제사회에 소개될 때 어떤 불상사가 연출될지는 국제사회의 동향에 밝은 박 시장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시민들의 소소한 질문에도 하트를 날려주던 그가, "시민들이 만든 인권헌장을 왜 선포하지 않냐"는 시민들의 항의에는 아무런 답이 없다.

책상 한 편에는 4개월 동안 시민위원회 회의를 위해 사용된 서류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아직 치우지 않았다. 인권헌장이 선포되고 나면, 시민위원회 백서도 써야 하고, 인권헌장 해설서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함께 고생한 시민위원들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고, 최고의 행정지원을 해준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아직도 내 손에는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위대한 작품,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들려 있다. 박원순 시장이 '시민이 만든 인권헌장을 폐기한 시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관련기사:>
폐기위기 '서울시민 인권헌장', 직접 보고 판단하세요
성희롱 사건 변호하던 박원순, 왜 사라졌나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홍성수님은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로 서울시 시민인권헌장 전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태그:#서울시민인권헌장
댓글3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