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자기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군, 좋은 패가 들어 온 게 틀림없어."

12월 11일 방영된 KBS 2TV 수목드라마 <왕의 얼굴> 8회에서 선조의 두 번째 후궁 귀인 김씨의 오빠 김공량(이병준 분)과 장수태(고인범 분)의 장부를 놓고 내기를 하게 된 광해(서인국 분)의 내레이션이다. '관상'에 능통해진 광해가 상대방의 얼굴 표정만으로 그가 가진 패를 읽어내는 순간이다.

영화 <관상>의 설정을 허락도 없이 베꼈다며 제작사가 건 소송으로 인해 <왕의 얼굴>을 둘러싼 논란은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자 수그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될 얼굴'이란 설정의 시작은 비슷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관상>은 역적이었던 조상 때문에 벼슬길에 나서지 못해 관상쟁이가 된 주인공이 왕의 얼굴을 판가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역사의 풍파 속에 휩쓸리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의 굵직한 흐름은 단종과 세조 대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지만, 결국 그 안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고 마는 민초의 이야기를 근저에 깔고 간다.

그에 반해, <왕의 얼굴>은 대놓고 왕이 될 관상을 지니고 있지 않아 콤플렉스를 가진 왕 선조(이성재 분)를 등장시킨다. <관상>에서 왕이 될 얼굴이 아님에도 왕의 자리를 노리는 수양대군과는 같은 듯 다른 캐릭터이다. 한 사람은 왕이 될 얼굴이 아니지만 스스로 왕의 자리를 쟁탈하는 자요, 또 한 사람은 운명적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왕이 될 깜냥이 아니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정신병리학적 증후군의 인물이다.

광해가 진정한 군주로 거듭나게 만드는 힘, 관상

 <왕의 얼굴>의 광해(서인국 분).

<왕의 얼굴>의 광해(서인국 분). ⓒ KBS


왕이 될 만하지 않은 인물로 인해 일어나는 역사적 갈등을 다루었지만, <관상>의 등장인물들이 제목과 달리 '관상'이라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휩쓸리지 않는다면, <왕의 얼굴>은 시작부터 거기에 사로잡힌다.

그런 자격이 없는 아비에게서 왕이 될 얼굴을 가진 광해가 태어나고, 그의 등장은 아버지와 갈등의 원인이 된다. 자신이 왕실의 적자가 아니기에 늘 불안감에 시달리는 왕 선조, 하지만 그에게는 정작 정실부인인 의인왕후에게서 난 자손이 없다. 그래서 공빈 김씨의 소생인 두 아들들이 가장 유력한 왕의 계승자이지만, 그런 것이 선조에게는 늘 마땅찮은 구석이 된다. 더구나 그 중에서도 난 놈인 것 같은 광해가 그의 눈에 걸린다.

<왕의 얼굴>은 이렇게 자신의 아들이지만 애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광해가 아버지 선조와의 갈등을 일으키며, 그런 수난을 겪는 와중에 백성들의 삶에 눈을 뜨고 진정한 군주의 상으로 거듭나는 성장드라마를 그리고자 한다.

왕재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왕이 되어야 했던 선조의 콤플렉스를 '관상'이란 운명론적 세계관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과연 왕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데 대한 의문을 가진 광해가 스스로 관상에 입문, 능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관상'은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다. 광해는 그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마다, 게임의 필승 아이템처럼 '관상'을 꺼내 무기로 써먹는다.  마치 인간계에 등장한 마법사처럼 말이다. 당연히 상대방의 운명과 얼굴을 읽을 줄 아는 그의 능력 앞에 보통 사람은 나가떨어질 밖에. 어디 광해뿐인가, 궁중에 떡하니 자리 잡은 관상감하며, 과거시험 보듯이 관상시험을 보고 궁중에 입궐하는 김도치(신성록 분)까지.

8회에서 김공량과 광해의 투전 대결은 게임 관전처럼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관상'이라는 능력을 탑재한 광해 앞에 김공량은 그저 밥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광해 앞을 가로막은 장애들은 제거된다. 이러다 광해와 김도치가 조우하게 된다면, 마치 중국 무술 영화의 각종 비기를 장착한 무림 고수들이 장풍을 쏘며 대결하듯, '관상 대 관상'의 환상적인 대련이 펼쳐지는 건 아닌지. 관상은 대중적으로 흥미를 느낄 소재이긴 하지만, 여전히 운명론적이며 중국 무협 영화의 장풍만큼이나 막연한 요소다.

개혁군주 재해석 넘어 너무 완벽한 캐릭터가 된 광해

  KBS 2TV 수목드라마 <왕의 얼굴> 포스터

KBS 2TV 수목드라마 <왕의 얼굴> 포스터 ⓒ KBS


드라마는 대동계의 역모에 휩쓸린 가희(조윤희 분)를 보호하려다 폐서인으로 되어 궁궐 밖으로 내처지게 된 광해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여인을 보호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그녀와 백성들이 사는 세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가희를 구하려는 광해의 시도는, 나아가 백성들의 삶을 구제하는 계기가 되어간다.

이는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개혁군주로서의 광해에 대한 밑그림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구상이다. 그런데 그런 광해가 가진 관상이란 능력은 지금은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지만, 딜레마가 된다. 갖은 곡절을 이겨내고 왕의 자리에 오르지만 결국 왕의 자리에서 내쫓기고, '왕의 이름' 한 자리 지니지 못한 채 광해군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이 존재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지. 정작 자신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한 관상의 능력자 광해라니.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에스컬레이터가 되었던 능력을 과연 이 드라마는 어떻게 설명해 낼 것인지.

최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비밀의 문>에서도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아비 영조와 정통성에 진취적 세계관까지 가진 능력자 아들 사도세자라는 단선적인 갈등 구조를 그렸다. 왕의 깜냥이 아님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신들의 비리를 눈감아주며 능구렁이가 된 아비, 그와 달리 권신들의 비리를 척결하고자 의지를 다지며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꿈꾸는 아들이 극을 이끌어 간 것이다.

역사적으로 광해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아비 선조와 같이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결코 왕이 되기 힘들었다. 역사는 그의 형 임해가 광폭하여 왕이 될 깜냥이 되지 못한 듯 그려내지만, 그 역시 폭군 광해처럼 후대의 해석일 뿐이다. 임진왜란 때 도망간 아비를 대신하여 전쟁터에서 성실하게 왕자의 자리를 지킨 공로가 그를 왕의 자리에 까지 올렸다. 드라마는 '왕의 얼굴'이라는 운명적 요소로 그의 왕좌를 설명하지만, 정작 그를 왕위에 올린 건 전쟁터를 지킨 그의 책임감이자 능력이다.

이렇게 우연과 우연 속에 드러난 광해라는 인물의 신실한 캐릭터를 굳이 '관상'이라는 운명론적 요소를 개입시켜 개연성을 부풀릴 필요가 있을까? 8회까지 진행된 드라마에서 가희와 얽히며 폐서인이 되기까지 광해의 파란만장해진 삶만으로도 드라마는 충분히 내적 동력을 가지고 있는데, 김공량과의 투전 대결에서 등장한 '관상' 아이템처럼 절대 무한 능력까지 장착시켜 운명론을 배가시켜야 했는지 의문이다.

이건 마치 조선 건국을 '용비어천가'로 설명하는 것처럼, 광해란 인물을 입지전적 인물로 형상화하기 위해 둔 무리수로 느껴진다. 제 아무리 이제 와 개혁 군주로서의 면모가 재조명된다 한들 그 역시 장단점을 가진 역사적 인물이다. 드라마가 정통성을 가진 아비에 대비하기 위해 광해를 너무 '완벽한 캐릭터'로 키워가고 있는 건 아닌지, 진취적 성향을 가진 개혁 군주라는 또 하나의 볼모에 잡히고 있는 건 아닌지. 이제 본격적인 광해의 활약이 시작되는 즈음, <왕의 얼굴>에 덧붙이는 아쉬움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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