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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31일.
20세기의 마지막 날, 월간지 기자 오연호의 사표는 수리됐다.

새 천년에는 새 인생을 살자. 인터넷을 무기로 20세기의 뉴스 생산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보자.
그래서 나는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월간지 기자에서 일간지, 분간지, 초간지 기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닷컴 인생의 출발이었고 곧 '닷컴 아빠의 위기'의 시작이었다.

월간지 기자 시절, 적어도 나에겐 한 달에 3일 동안의 꿀맛같은 휴일이 있었다. 며칠밤을 지새고 책을 만들어내면 3일 정도는 세상 나몰라라 하고 쉴 수 있었다. 그런 날엔 당연히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일곱 살이던 딸아이 은별이는 그런 어느 날 아빠에게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아빠 오늘 왜 회사에 안가?"

그때 내 답이,
"으응, 회사에서는 오라고 하는데 은별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은별이하고 놀려고 안나가는 것이야."

물론 은별이는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2000년 1월 1일을 맞아 닷컴인생이 된 후 나에겐 그런 꿀맛같은 연휴는 사라졌다. 연휴는 커녕 컴퓨터 화면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단 하루를 갖기 힘들어졌다.

나는 지난 2월 22일 <오마이뉴스>를 창간하기까지 인터넷 노동자의 현실을 처절히 체험했다. 월간지는 며칠 밤을 새더라도 일단 완성품이 나오면 시장의 평가를 기다리면서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닷컴의 세계에서는 완성품이 없었다. 가장 최근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동사항을 반영해줘야 했다. 비단 기자뿐 아니라 프로그래머도 디자이너도 완성품 없는 노동의 세계에서 젊음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하루에 3시간 정도 잤을까? 그런 중노동이 계속되면서 창간을 3일 앞둔 날, 나는 새벽 2시에 퇴근하여 화곡동 전셋집 계단을 오르는 순간 머리가 멍멍해지면서 이상한 감을 느꼈다. 위기 경보.

'아, 과로사란 바로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 것이구나.'

그즈음 은별이는 아침에 출근하는 아빠를 붙잡고 이렇게 물어왔다.

"아빤 요즘 내가 미워졌어?"

이 무슨 말인고?

"은별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가 그럴 리 있나?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예전에는 회사에 나가야 되지만 내가 보고 싶어서 안나간다면서 나하고 놀아주기도 했는데 요즘엔 왜 맨날 맨날 회사에 나가?"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나는 딸의 그런 질문을 듣고서야 나의 닷컴인생의 시작이 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희생을 동반하고 있음을 심각하게 깨달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하나의 결단을 했다. 집을 광화문에 있는 회사의 근처로 옮긴 것이다. 화곡동에서 회사까지 출근시간이 1시간인데 집을 회사 근처로 옮긴다면 가족과의 대화의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나는 2월 27일 회사에서 택시로 5분 거리인 효자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한 이사'의 약발은 2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처음엔 가끔 점심이나 저녁을 집에서 먹고 다시 회사에 돌아가 일을 해보기도 했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회사 옆 이사는 가족을 위한 이사가 아닌 일을 위한 이사인 셈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은별이가 출근을 준비하는 나에게 다가와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 이제 아빠 안보고 싶다아."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빠하고 놀고 싶다고 그토록 아빠를 기다리던 '내 귀여운 딸'이 아빠가 안보고 싶다니.

"왜?"

"아빠 보고 싶어할 시간이 없어서."

결정타였다. 보고 싶어할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없다, 그것은 내 전용어였는데. 나는 은별이에게 어떤 말이 더 나올지 몰라 두려워 엄마에게 배경 설명을 물어봤다. 아내는 샘통이라는 듯 말했다.

"어젯밤에 나한테도 '이제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하도 아빠와 노는 시간이 없으니까 아빠와 노는 재미를 잊어버린 거예요. 대신 요즘 롤러브레이드도 배우고 새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요."

그날 나는 출근해서도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실연당한 총각처럼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해야겠구나.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 오후 5시경에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없었다. 아내의 휴대폰에다가 걸었다.

"어, 우리 같이 오늘 저녁에 식사하자고. 맛있는 거 사줄게."

'웬일이에요?' 하고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운전중이라는 아내는,
"우리끼리 갈 데가 있어서 안돼요."

왕따. 이런 것이 왕따라는 것이구나. 나는 아내가 운전중이라는 '핑계'로 다급히 휴대폰을 끊었을 때 그 정적 속으로 '너는 왕따 당하고 있어'하는 놀림의 함성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닷컴 아빠의 위기를 느꼈다. 그것은 내가 과로사의 위기를 느낄 때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딸내미 세대에는 제발 좀 인간다운 세상이 되라고, 인터넷을 무기 삼아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이 짓을 하는데 딸내미가 나를 거부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빠를 사랑한다고 몇 번씩, 아니 몇백 번씩 말해온 딸내미가 아빠 보고 싶어할 시간이 없다고?

다음날 나는 아내에게 '애걸복걸'하여 가족들과 외식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은별이와 둘째 민혁이를 식당 밖에서 볼 때부터 '희대의 아부꾼'처럼 잘 대해줬다. 사달라고 하지도 않은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그러나 하루 저녁식사로 어떻게 닷컴 아빠의 위기의식이 씻어질 수 있겠는가.

5월 8일 어버이날 저녁, 나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 은별이의 침대로 가서 은별이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서로 인터뷰를 해보는 게 어때? 아빠는 은별이가 요즘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은별이는 아빠한테 물어보고."

녹음기를 작동시켜놓고 내가 먼저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빠한테 제일 바라는 것은?
"바라는 게... 아빠가 빨리 오는 거."

-왜 아빠가 늦게 오는 것 같아요?
"인터넷 하느라고 정신 없으니까."

확실히 닷컴 인생들은 정신없이 산다. 나는 은별이에게 "무엇을 위해 아빠가 그렇게 정신없이 인터넷을 하는 것 같애?"라고 이어지는 질문을 던지면서 내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을 닷컴 인생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지금 아내에게, 아들딸에게 전화 한 통 하세요. 그리고 주말엔 컴퓨터를 끄고 가족들과 어울리면서 정신 좀 차려봅시다. 인터넷의 바다에서 허우적대지만 말고 가끔씩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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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7월 1일부터 <주 5일 근무, 주말엔 컴퓨터 끄기> 시작--한기현 기자 외 <기자만들기> 6기 수강생

인터넷 종합 일간지 <오마이뉴스> 대표이사 오연호 씨는 6월 30일밤 <기자만들기> 6기 수강생들과의 인터뷰에서 "오마이뉴스는 7월 1일부터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주말엔 컴퓨터를 끕시다'는 캠페인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오씨는 "오마이뉴스뿐만 아니라, 요즘 대부분의 인터넷 노동자들이 높은 노동강도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제하고, "인터넷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마이뉴스가 추구하는 '새소식으로 인간다운 새 세상 만들기'는 그 과정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면서 "더 좋은 기사를 위해서라도 기자들의 재충전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오마이뉴스>에 근무하고 있는 '이수정(28)'씨에 따르면 그동안 오마이뉴스 기자들은 하루 평균 12시간 정도 일해왔다고 한다.

오씨는 또 오마이뉴스뿐만 아니라, 주 5일근무제를 인터넷 업계 전체에 확대하기 위해 '주말에는 컴퓨터를 끕시다'는 캠페인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씨는 "인터넷 컨텐츠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독자)들도 주말만이라도 화면에서 해방돼 산으로 들로 나가 자연과 호흡하거나 가족들과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것이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는 7월 첫 번째 토요일인 7월 1일자에 '닷컴 아빠는 왕따중, 주말엔 컴퓨터를 끕시다'는 제목의 머릿기사를 실었다. <오마이뉴스> 편집국은 7월 1일 이후, 토요일엔 전체 10명 가운데 절반인 5명만 출근했고 오후 1시를 기해 당직기자 1명만 남고 모두 컴퓨터를 끄고 퇴근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쪽은 "기자회원들이 주말 오후와 일요일에 올리는 기사는 당직 기자가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 중 오연호 기자가 쓴 것은 한겨레IT가 발행하는 'dot21' 창간준비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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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 사단법인 꿈틀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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