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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7일 중앙정보부 앞으로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하달해 "김형욱에게 용서란 없다"고 명령했다. 사진은 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왼쪽에 정일권 총리가 서 있다. 정일권 총리는 김형욱 미국 망명 당시 미국으로 김형욱을 설득하러 갔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난 77년 6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당시 중앙정보부에 하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이 '특별지시사항' 문서는 그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왔던 박 전 대통령의 '김 전 중정부장 살해 지시설'의 신빙성을 한층 높여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바 따르면,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77년 6월 17일자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낸 '대통령 특별지시사항' 문서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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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온갖 노력해야 한다고 명심할 것"

▲ 박정희 전 대통령
이 특별지시사항은 김형욱 전 부장의 미국 망명 이후 행각에 대해 엄중한 조처를 명령한 내용이다. 이 문서는 현재 국정원 진실위가 보관중이다. 박 전 대통령이 중정에 내린 특별지시사항은 다음과 같다.

"본 건(김형욱의 미국 망명 이후 행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므로 정부는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임을 명심할 것이며, 본 건에 관한 한 용서란 있을 수 없음."

1972년 유신헌법을 선포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사항을 내려보내 "정부는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을 명심하라"며 "김형욱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다"고 밝힌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당시 이 지시사항을 접한 정보요원들은 이 뜻을 명확히 알고 '누가 나한테 지시하지 않나, 명령만 내려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단독 범행은 아닐 수 있다는 일단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6일 국정원 진실위의 김형욱사건 중간조사 발표이후, '김재규 정범론'이 일파만파 번졌었다.

김형욱 미국 망명활동 차단방법 여러 경로로 연구

박 전 대통령은 이 특별지시사항을 내려보내기 전에도 김형욱 전 부장의 미국 망명 이후 활동을 전격 차단할 방법에 대해 여러 차원으로 궁리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김형욱 전 부장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에 특사 형식으로 정부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1973년 4월 김 전 부장의 미국 망명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귀국을 설득한 바 있다.

계속되는 고위층들의 설득에도 김 전 부장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77년 6월 2일엔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비리를 폭로했다.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폭로에 나선 이유는 69년 10월 박정희정권 유지를 위한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했기 때문이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에 따라 미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한 각종 박정희정권의 비리를 터뜨리는 나팔수가 됐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강력히 비난하고,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도 추진했다.

이를 참다못한 박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6일 김재규 중정 부장에게 "김형욱의 미 하원 청문회 출석 저지를 위해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특사로 파견해 김형욱이 자제할 수 있도록 설득, 회유하라"고 명령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6월 17일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김형욱 관련 특별지시사항도 내려보냈다.

총리 주재로 김형욱 대책회의... "김재규 단독범행은 불가능"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이 같은 김형욱 전 부장의 행동에 대해 박정희정권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던 것이다.

미 하원 청문회 직후인 77년 6월말 박정희정권은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여는 등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대책회의만으로 끝낸 것도 아니다.

박 대통령은 77년 12월 '외국 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한 자'와 '외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하는 자로서 죄상이 현저히 중한 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명백히 김형욱 전 부장을 겨냥한 것으로 정부 내에서 추후 김형욱과 같은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경고장이었던 것이다.

'대통령 특별지시사항' 적극적 해석해야

이처럼 김형욱 전 부장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일련의 작업과정을 볼 때, 10월 7일 프랑스에서 이뤄진 김형욱 살해사건에는 김재규 전 중정 부장의 손을 넘어 그 윗선에서 기획됐을 가능성도 크다.

한 역사학자는 이와 관련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직접 지시해서 살해하라는 명령과 달리 특별지시사항으로 살해를 암시하는 것도 명령"이라며 "박정희의 특별지시사항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역사학자는 "당시 권력구조상 박정희 지시 없이 김재규 단독범행은 불가능했다"며 "김형욱의 미국 망명 이후, 살해사건이 몰고 올 국제적 파장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김재규 혼자서는 감행할만한 일이 못된다"고 덧붙였다.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도 29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김재규 부장과 김형욱 전 부장은 둘 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며 "김재규 부장이 자기와 정치적 견해가 같은 김형욱을 살해하라는 야만적이고 불법적인 명령을 내릴 리 만무하다"고 말했다.

▲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6일 오전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김형욱 실종사건` 등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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