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생산적인 담론은 사라지고 좌파와 우파라는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문학평론가 이명원씨의 글을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지식담론을 펼쳐 보일 계획입니다. '이명원의 좌우지간(左右之間)'은 좌우 지식인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속살 깊은 이야기를 독자여러분께 전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 소설가 이문열
ⓒ 오마이뉴스 남소연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이천 톨게이트로 나간다. 200m 앞에서 우회전 한 후 직진, 그러다 보면 작은 식당 인근의 옹벽이 나온다. 옹벽에서 다시 좌회전. 그러면 살구색 건물이 보일 것이다."

전화로 길 안내를 받았지만, 도착해 보니 그 마을의 집은 모두 살구색이었다. 난감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어렵사리 부악문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25분. 1월 10일 수요일의 일이다. 날은 차고, 길은 질척거렸다.

소설가 이문열 역시 막 도착한 듯했다. "서울에서 점심약속이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서울에서 만날 것을." 그의 손에는 그날 점심에 만났던 사람들의 명함이 두둑하게 쥐여져 있었다. 얼핏 보니 한나라당 인사의 명함도 있었다.

그렇게 이문열은 서울에서 이천으로 돌아왔다. 이천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1년여의 세월을 미국 버클리에 있었다. 체류작가 신분이었지만 오직 소설을 쓰는 데 집중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이곳을 떠났던 참이었다.

그러나 떠남의 과정도 그러했지만, 그의 귀환 역시 고요한 방식은 아니었다. <호모엑세쿠탄스>, 우리말로는 처형자라는 의미의 소설은 그의 귀환을 전후한 시기에 또 다시 끓는 듯한 논란 속에 사로잡혔다.

이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에, 언론의 화제는 단연 소설의 대단원에서 불꽃을 뿜고 있는 '한야(寒夜)대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과격한 발언에 있었다. 이 인상적인 토론회 장면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혹한의 추위로 느끼고 있다. 나는 그 추위에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이 왜 오늘을 지극히 추운 밤의 정서로 느끼고 있는지는 알고 싶었다. 그게 이문열을 만난 이유다.

'그래도 이문열' 아니면 '보수꼴통 작가 이문열'

"묵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찍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입을 열었다.

"과거 대학생들에게 이문열에 대해서 물어보면 견해가 다양했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이야길 들었다. 재수 좋으면 6대4, 재수 없으면 7대3의 비율이다. 이문열의 책을 읽어보았냐고 물으면 <삼국지>라고 답한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지>는 내 문학의 본령이 아니다. 소설가 이문열을 평가하면서, 나에 대한 외적 정보, 밖에서 오는 신호를 보고 결정하는 것 같다. '그래도 이문열' 아니면 '보수꼴통 작가 이문열' 둘 중의 하나가 나에 대한 평가란다."

이문열은 잊혀진 것일까. 적어도 작가 이문열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장편소설 <선택>(1997)과 <아가>(2000)를 포함하여, 이문열은 2000년을 전후한 수년간 보수우파 논객의 대명사로 세간에 오르내렸다. 소설에 대한 평가도 가혹했다. <선택>과 <아가>는 주인공인 '정부인 장씨'와 '당편이'에 대한 작가의 서술과 묘사 탓에 대표적인 반페미니즘 소설로 꼽혔고, 비평의 융단폭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선택> 이후 내가 찍힌 것 같다. 어쩌면 <시인>(1994) 이후랄 수도 있다. 특히 <시인>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책이고 외국에서는 제일 우호적인 책인데, 한국에서는 묵살됐다. 햇수로 1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설사 <선택> 같은 건 문제가 된다고 치더라도, <아가>나 <시인> 그리고 <변경> 같은 작품은 나로서는 나잇값을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전부다 이미지 때문에 끝장나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중견작가 이문열이 스스로 찍혔다는 발언을 노출한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지만,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지 때문이라니.

"묵살보다 더 무서운 게 논쟁을 통해 대리만족하게 하는 거다. 사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알게 만드는 거지. <선택>하면 사람들은 반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소설이 400년 전 여자이야기인지 아는 사람은 실은 별로 없다. 그래서 가끔은 이것도 나에게 적대하는 세력의 책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이 그런데 오래 시달리다 보면 피해의식도 있고. 왜 나라고 상처가 없겠는가."

"'책 장례식' 때 나도 모르게 내상 입어"

ⓒ 오마이뉴스 남소연
소설을 둘러싼 논란도 논란이지만, 칼럼을 통한 이문열의 여과 없는 사회적 발언도 심각한 사회적 논란의 중심으로 그를 이끌어갔다. 2001년 국세청에 의한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에 그는 <조선일보>에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2001. 7. 2)라는 칼럼을 발표한다. 이 칼럼에서 그는 이렇게 발언했다.

"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걸 2,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선동을 연상시킨다."

시민운동세력에 대한 비판도 개진되었는데,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동아일보>, 2001. 7. 9)라는 칼럼에서는 시민운동 세력을 '정권의 홍위병'에 비유해 그 자신이 3차례에 걸쳐 고소당하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한 강연회에서 안티조선운동이 친북적 성향이 있음을 암시해 사회적 논란에 휩싸이면서, 한국문학사상 전무후무할 '책 장례식'이라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은 내가 담배를 끊었는데, 사실은 과거에 '책 장례식' 했을 때, 그거 3개월 하니까 당뇨도 올라가고 혈압도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내상을 입은 것이다. 내 자랑은 몸이 뚱뚱해도 당뇨나 혈압이 없는 것이었는데, 그때 의사가 담배를 끊으라고 했다. 그런데 '책 장례식'을 생각하니까 화가 나서 끊기더라고. 아무래도 사람이라고 하는 게 자꾸 그런 피해의식이나 피해망상, 좋게 말해서 내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신이 '내상'이라는 표현을 썼듯, 실제로 이문열은 '책 장례식'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도, 이 문제는 자주 언급되었는데 다시 그의 육성을 경청해 보기로 하자.

"작가가 마음에 안 들 때, 우리 집에 와서 장례식을 하고 풍장을 하고 또 불에 태우고 이런 짓을 했는데, 이것은 문화사적으로 제왕이 해도 폭거로 이야기된다. 진시황의 분서나 히틀러의 분서 다 폭거 아닌가. 우리사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내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악당이었고 잘못을 했나. 아니었다. 그리고 문학을 하려면 말해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문학단체에도 안 나가는데, 왜 그러냐 하면, 그때 당시 아무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가 이사로 있는 단체조차, 거꾸로 그 사람들을 편들어 그럴 수도 있다는 그런 성명을 발표하는 구조. 이건 굉장히 안 좋은 구조다. 군사독재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보다도 어쩌면 더 나쁠지도 모른다."

한 작가가 육친과도 같은 책이 장례식에 처해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분명한 내상임에 틀림없다. 반대로 이문열의 사회적 발언에서 내상을 입은 독자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 내상의 크기를 견주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상처가 더 큰가 하는 '불행대결'에 속하겠지만, 내 생각에 이문열의 '홍위병' '나치의 선전관'이라는 발언은 '은유의 폭력'일 수 있고, '책 장례식'은 그것에 대한 '상징의 폭력'일 수도 있었다는 점은 지금 시점에서는 서로 인정해야 할 듯하다. 다만 공인의 발언이 파급시키는 영향력의 강도와 자연인의 분노 사이의 범주는 구분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민족의 이산·분열, 문화적으로 통합된 예 본 적 없어"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나는 이문열이 실제로 찍혔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문학평론가로서 그의 작품의 영향력 감소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한 권의 소설이라는 것 역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소설의 내러티브란 일종의 설득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한다. 그런데 <선택>을 기점으로 해서 이문열의 소설에서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으로 계몽에의 의지인 것 같다.

<선택>의 그 장중한 정부인 장씨의 현실세태에 대한 풍자나 <아가>에서의 편집자적 논평이 그러하고, <호모엑세쿠탄스>의 거의 날것에 가까운 정치세태 풍자가 그러하다. 작중인물을 통해 발설되는 전언들이 독자들에게 작가의 육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느껴질 때, 이에 대한 반응은 결국 전언에 대한 호오(好惡)로 귀착된다.

그런데 그것이 특히 사회적 논란이 되는 여성평등의 문제라든가 정치이념의 문제로 확대되어 작가적 관점이 일방적으로 표출되다 보면, 작가의 주관적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어쨌든 독자에 대한 설득이 아닌 계몽과 훈민(訓民)의 성격을 띠게 되고, 그것이 독자들의 수용지평을 협소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문열 자신은 이러한 나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소설이 독자대중들의 지지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그의 소설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보수우익적 이념에 대한 의식적 배제가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내용물만으로 독자들이 특정 작가의 소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더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 내포된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함께, 그것의 일방향적인 내러티브가 사실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나는 특정한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노출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작품이 정치적 전언을 강렬하게 피력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독자들의 적극적인 해석과 개입을 통해 함께 고민해야 될 문제를 작가가 일방향적으로 주입하면서 차단하는 듯한 상황이 이문열의 소설에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변명이 될까봐 걱정이 되지만,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그런 의심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다룬 것은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내 생각에는 <영웅시대>나 <사람의 아들>도 독자의 개입이 쉽지 않은 완고한 틀에 속한다고 본다. 그런데도 독자들이 읽어주었다. 물론 <사람의 아들>의 경우 나는 항상 명확하게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반기독교적인 것과 친기독교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다. 이번 소설의 경우, 다만 문제는 에필로그 때문에 지금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젊은 날의 초상>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포함한 예술가 소설의 경우는 사회성이 없으니까, 그런대로 읽혀졌다.

그래도 내심, 실제로 생각이 변한 것이 있었다. 보수우파로 정착해서 예전의 조심성이 없어진 것이 들키면 예전보다 굳어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명확하게 보일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이번 소설의 경우 줄까지 맞추었다. 노무현을 비판한 것과 옹호한 것, 한나라당의 차떼기를 비판한 것과 옹호한 것을 치밀하게 분량을 고려하면서 썼다. 논란이 된 '한야대회'의 경우도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것들이 아마 독자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 같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나도 안보였다. <호모엑세쿠탄스>를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은 이문열이 말한 '균형감각'보다는 그의 보수우익적 세계관을 더 손쉽게 발견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 김대중 정부로부터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현실정치에 대한 작중인물의 과감한 발언들은 너무나 직접적인 것이어서, 이 작품이 과연 소설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 자신은 특히, '한야대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현정권에 대한 규탄을 과장적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소설 속에서 현정부의 외곽조직으로 그려지고 있는 '새여모'와 같은 단체 역시도 현실성을 느낄 수 없도록 풍자적으로 그렸다는 점을 들어, 일종의 '소설적 균형'을 취했다고 말하지만, 소설을 읽어 본 나의 전반적인 인상은 그조차도 다분히 냉소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 각각이 내려야겠지만, 적어도 내 주관적인 인상은 그랬다.

특히 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가 배치한 유대 민족주의가 초래한 상호간의 학살이라는 신화적 시간, 또 르완다 내전의 상호학살 모티프가 작가 이문열이 오늘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묵시록적 관점의 표출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부분에서 이문열은 시청 앞 광장의 시위에 참여하는 늙은 우익시민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묵시록과 현실 역사를 등치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서울시청 광장에 존재하는 '내전의 기억'. 그게 현실적으로 남아 있는 곳. 지금 생각에는 르완다보다는 소말리아가 전형적인 것 같다. 실제로 제일 두려운 그림이 있다면 어떤 민족주의가 내전의 이니셔티브가 되는 것. 외세와의 대항이란 것이 내전의 유효한 도구가 되는 것. 이런 것이 아마도 이 사람들의 걱정일 것이다."

이문열은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해 있는 늙은 우익들의 절규를 애절하게 듣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간단하게 '레드 콤플렉스'로 규정해 희화하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대단히 절실한 고민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북핵 사태를 거치면서, 이들의 고민은 더욱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북한의 쇠약함과 무력함에 동의해 왔는데 비대칭 무기인 핵을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일(아마도 전쟁인 듯)이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문열은 김대중 정부 이후 지속된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에도 회의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다. 남북 간의 적대감 또는 경쟁심이 지금 말하는 평화적인 통일, 평화세력에 의해 자연스럽고도 일방적으로 없어질 수 있을까. 가령 지금 진보세력이 천만, 이천만 있다고 치자. 그 사람들이 과연 북한과의 일체감을 회복했냐는 의심이 일단 든다. 그럼 반대로 북한은 남한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생각에는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 다만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까지 분열되었던 민족이 과연 감상적인 이념 하나 가지고 합쳐본 적이 있었는가.

금세기 들어 예멘이 그런 과정으로 통일되었지만 그 결과는 피투성이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역사상 민족의 이산과 분열이 힘의 우위 없이 문화적으로 통합된 예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여기서 곤란한 느낌이 생긴다.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고 인간의 본성에서도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시비가 아직 안 끝났다. 하지만 믿어야겠지. 안 믿으면 반통일 세력 보수 꼴통이라는 것이 되니까."

"386을 비판한다거나 모함했다는 것은 오해"

그는 <호모엑세쿠탄스>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민족사적 비극을 생각해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사실 이것이 묵시록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역사 허무주의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다. 묵시록적 세계관이란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논리를 빌리자면 '공동체의 오염과 타락→순결한 소수의 항거→최후의 결전과 본래성의 회복'의 구도로 요약된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단순화하자면, 아마겟돈 전쟁 이후의 구원의 신세계라는 이야긴데, 그것을 한반도의 현실역사에 대입해 보면, 결국 남북한 간의 총력전에 따른 무력통일. 그러나 '신석기 시대'라는 결론이 나온다. 근거 없는 역사 낙관주의가 위험한 것과 비슷한 차원에서 역사 허무주의 역시 위험하다. 그래서 구원과 해방을 둘러싼 문제해결이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는 가능한 사유체계지만, 그것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대입시켜 사유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반도를 둘러싼 어떤 우발적 요소들이 대파국의 시나리오 쪽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시청 앞 광장에 나와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우익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그런 시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나 같은 젊은이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나쁜 가능성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난경(難境)에 가까운, 남북간의 평화체제를 불가능케 하는 한반도의 압축공기의 밀도를 지속적으로 낮춰 나가는 노력이 여전히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깊은 낙관도 뾰족한 비관도 없이, 그 사이에서 말이다.

이 부분에서 질문의 방향을 약간 돌렸다. 가령 언론에서는 이 소설에서 작가 이문열이 이른바 386세대에 대한 비판을 던졌다는 논평을 한 바 있는데, 작가의 생각은 어떤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386을 비판한다거나 모함했다는 것은 오해다. 386은 거의 1000만 가까이 되는 세력이다. 정확히 갈라도 500만이 되는 사람들. 내가 무슨 이유로 그들을 적으로 삼겠는가.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몫이 있다. 오히려 그들은 애정과 존경이 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386 모임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다 속인이 되어 화이트칼라가 되었지만, 한 달에 한번 모이는데 옛날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한다.

진정성과 행위와 이념의 일관성, 과거에도 기능했고 앞으로도 기능해야 할 중요한 세대가 386세대이다. 물론 내가 이 소설에서 386 찌꺼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비판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간 사람, 특히 그들의 원한에 주목한 것이다. 권위주의 정부와 싸우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 고통에 망가진 것 같다. 원한을 벗어나지 못해 원한으로 미래를 결정하거나, 단순한 '적' 논리로 간 친북좌편향에 빠진 사람들을 비판했다면 비판한 것이지. 386세대 전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남북 문인교류, 단합대회지 교류인가"

이문열과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유독 그가 '북한' 문제에서는 신념에 가까운 보수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견지했던 세월이 있었는데, 적어도 '북한'은 자유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이문열의 정치적 보수주의라고 하는 것 역시, 그 핵심을 추출해 보면 '반북의식'으로 귀결되는 듯했다.

문단에도 이문열과 유사하게 반북의식을 핵심적 의제로 설정하고 등장한 단체가 있다. 최근에 출범한 이른바 문화미래포럼(회장 소설가 복거일)이 그것이다. 문화미래포럼이 등장하자, 보수언론에서는 벌써부터 문단에서 좌우갈등이 시작되었다며 싸움을 부채질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에 대한 이문열의 생각을 물어 보았다.

"문화미래포럼이 출범한다고 해 미국에서 축전도 보냈다. 내 생각에 그런 결집이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우리 문단은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보수단체의 대명사였던 문인협회까지도 휩쓸려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북문인교류라고 하는 이상한 정치쇼. 그것을 보고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인협회까지 끼여 깃발을 들어주고 있는데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교류라는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모여 일체감을 키워가는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은 단합대회다. 또 그것을 할 때 나에게는 종이쪽지 하나 온 적이 없다. 단합대회지 그것이 교류냐. 남북문인교류의 장에 한국문인협회가 있는 것을 보고 이제는 정말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최근에 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그럴 만한 의미가 있다. 문인간의 좌우갈등이 우려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땐 문인사회가 통일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교류도 아니고 이상한 것인데."

문학단체는 물론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반북의식이 여과 없이 노출될 때 흔히 거론되는 사항 중의 하나는 북한의 인권상황이다. 인권은 오늘날 의심할 여지없는 지구적 공통 가치이기 때문에,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한국의 진보세력이 발언해야 된다는 견해는 진보세력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그럴 때 문인들이 느끼는 것은 사르트르적 고뇌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자인 사르트르는 소비에트연방에 대해 회심한 계기가 있었다. 그를 회심하게 만든 것은 스탈린 치하의 억압적 인권상황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스탈린식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그런 점에서는 사르트르식 고뇌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러나 남북한의 문학교류가 이문열이 말한 대로 단합대회로 비하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지적한 바처럼 남북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문인들의 성향은 다양했다. 이념적으로는 가장 오른쪽으로부터 가장 왼쪽까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교류는 친북과 반북의 정치적 이분법으로 재단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 교류는 말하자면 동일한 모어(母語)의 구성원이지만, 문화어와 한국어라는 다른 명칭의 언어권으로 재편된 언어들의 어려운 만남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의 노무현과 북한의 김정일로 상징되는 정치체제와는 그 층위가 다른 문화적인 전망과 자율성이 있는 것이다. 이산가족이 만나면, 껴안고 울지 서로의 이념을 묻지 않는다. 언어적 재회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정치적인 발언은 피할 생각"

언어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말의 상황'에 대한 이문열의 생각을 엿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특히 오늘날 '말의 과잉'과 저널리즘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지난 5년 동안 뭐랄까. 우리말이 격렬해졌다. 우리가 이제 싸우고 뭐 하더라도 금도란 것이 있는데, 이제는 금도를 잃은 듯하다. 물론 그 시작은 인터넷에서 시작된 것 같은데 이제는 여과 없이 상층부까지 그런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사실 이문열처럼 설화(舌禍)의 잦은 주인공이 되었던 작가도 드물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필화(筆禍)에 시달렸다면 제법 시달린 편인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시간이라도 정해 놓고 묵언수행이라도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간혹 든다. 물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일종의 거리유지는 가능하다. 아마도 지난 1년간 이문열이 한국을 떠나 미국에 체류한 데도 그런 사정이 얼마간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거리유지랄까, 일종의 객관화랄까 하는 그런 의지 말이다.

"그림 같은 객관화는 안 되지만, 사람이 앞 뒤 없이 격분한다거나 충동적으로 개입한다거나, 끌려든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서 내가 여러 가지 논쟁에 끼어들 때, 사실 내가 자발적으로 논쟁에 끼어든 적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발언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칼럼을 써서 내가 신문사에 투고한 적이 많았다. 열편의 칼럼을 썼다면, 신문사의 청탁에 의한 것은 세편 미만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미국에서는 자제가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일이 한국에서 있었나. 한국에 있었으면 내가 한바탕 했을 일이 많았을 것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문열과 직접 대화해 보면 알겠지만, 그는 열정이 충만한 청년작가처럼 느껴진다. 이념적으로는 왼쪽에 있는 황석영의 달변과는 다르지만, 이문열의 유장한 의견개진을 직접 들어보면, 그가 문사로서의 현실개입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제는 민감한 현안에 대한 그의 발언이 종종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언론을 통해 유통되면서, 곤란한 상황으로 뻥튀기 된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언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은 듯했다.

예를 들어, 그는 언젠가 마치 그 자신이 과거의 '대동아공영권'을 옹호한 것처럼 보도되었을 때나, '한일합방은 합법적이었다'라는 발언을 해 마치 일제강점을 정당화한 것처럼 신문에 보도되었을 때 놀랐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책 장례식' 정국에 자신이 마치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돼 곤욕을 치렀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한 강연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효순이 미선이 촛불시위 때, 북한이 남한에 약 3000명의 간첩을 보냈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건 강연도 아니고 강연 후의 청중의 질문이었다. 청중의 질문이 이랬다. 10만 명이 촛불시위를 했다면 그거 용공분자 아니냐고 묻더라.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떠나서 잘 모르나본데 요새 용공분자라는 말 안 쓴다. 그 전에 용공분자라는 말의 정의부터 해야 한다. 한국식으로 '빨갱이' 그러나 본데 그러면 바보 된다.

나는 오차범위를 생각했다. 상시적으로 지령과 명령, 자금과 정보의 수수관계에 있을 경우만 당신이 말하는 용공분자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 체제에 호의를 갖고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건전한 시민이다. 그 사람들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라면 그래야 2~3%에 불과할 것이다. 즉 오차범위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사실상 없다는 말을 의미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이문열이 워싱턴 가서 촛불시위 때 북한에서 2000에서 3000명의 간첩을 보냈다고 보도됐더라. 그래서 내가 기자한테 물었다. 내가 언제 그랬냐? 기자가 하는 말이 10만명의 2~3%면 2000에서 3000명 아니냐고 하더라. 거의 없다는 말로 한 것인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보도되는가."

사실 이문열의 발언은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의 주된 인용처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 발언의 맥락을 절단하고, 발언의 일부만을 도려내면 자못 과격한 주장도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따옴표 저널리즘을 문제 삼는 태도는 이문열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먼저 발언 당사자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은 되도록 줄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강연의 맥락을 잘 모르는 기자가 '오차범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개념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가령 '대동아 공영권' 논란의 경우, 이문열 자신은 유럽공동체와 비슷한 의미에서의 동북아 공동체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용어에는 이른바 '용어의 역사성'이란 것이 있는 것이어서, 이문열의 내심과 무관하게 오용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러면 왜 당시에 언론에 정정보도를 요청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바로잡는 것이 거꾸로 일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차라리 조용해지길 기다리는 것이 훨씬 현명한 대응"이라고도 했다. 그런 까닭인가. 신작장편을 출간하면서도 "이제는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 역시 그가 경험했던 설화(舌禍)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듯 보였다.

"이제는 정치적인 발언은 피할 생각이다. 어제도 개헌 문제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할 이야기는 다 하는 것 같다. 내가 예전에 한 발언 중 어떤 것은 아무도 안 하니까 내가 발언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말하는 것 같다. 개헌 문제만 해도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충분히 얘기들 하는 것 같다."

"뉴욕에서 베스트셀러를 내는 것이 희망"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문열은 2월에 다시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올해는 말의 폭죽이 터질 것이 분명한 대선정국인데, 해외에 장기체류하면서 작품에 몰두할 계획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선 그가 현실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미국에서의 계획은 무엇일까.

"희망이 있다면 뉴욕에서 베스트셀러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렵다. 유럽시장은 비교적 들어가기가 쉽다. 내 작품의 경우 프랑스 9권, 이태리 6권, 스페인 8권, 그리스에서까지 책을 냈는데. 미국의 경우 정식으로 서점에 깔린 것은 1권에 불과하다. 대학출판부에서 출간한 것이 1권이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낸 것이다. 미국 시장은 그렇게 진입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미국 출판계의 코드와도 내 작품이 잘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요즘엔 <추락하는 것이 날개가 있다>를 번역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도 번역해서 팔려고 했는데, 아직 안 팔렸다. 큰 출판사에서는 거절당했고. 재미있는 것이 거절한 이유다. 추리물로서의 완벽성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기계적이라는 평가였다. 장르문법에 충실한 소설을 미국시장은 선호하는 것 같다."

이문열은 194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이순(耳順)이다.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나이.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한다. 우선순위 같은 것. 결국은 이제 내가 선택한 내 일. 내 주업이 있는데. 주업도 아닌 것에 쓸데없는 소모를 해서 주업 쪽에 생산의 차질이 있다면, 이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자제하거나 양적으로 줄일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다. 내가 작가로 죽을 건데, 나에게는 무진장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은 10년이 채 안될 것이다. 우리 나이로 10년 후면 70이 된다. 평균수명이 늘었다 하더라도 그 정도가 그런대로 정신 차리고 일할 나이다. 그 이상은 기대하지 못한다."

이문열과의 공식 인터뷰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비공식적인 시간까지 하면 5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우리는 떠들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오프 더 레코드'는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이다.

인터뷰를 하러 가기 전에 출판사에 책이 얼마나 팔렸냐고 물었다. 영업부의 담당직원은 대외비라고, 아무튼 잘 나가고 있다고 대답을 회피했다.

"2주도 채 안되었는데. 한 10만권은 나갔다고 한다. 시장의 반응이 좋은 편이다."

출판사에서 확인한 거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얼떨결에 그가 대외비를 노출한 셈이 되었다.

이문열이 '내상'의 시절로 기억하고 있는 2000년을 전후로 한 시기는, 한국의 민주화에 있어서도 비슷한 내상을 경험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우파는 우파 나름의 내상이 있겠지만, 좌파는 또 제 고유한 내상을 견디고 있는 시절일지도 모른다.

좌우지간(左右之間). 공유될 수 없는 차이와 간극이 더 크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2007년은 더 깊은 성찰과 세련된 소통에의 희망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태그:#이문열, #이명원, #386, #작가, #소설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