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워> 논란이 뜨겁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9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서 영화 <디 워>를 비판한 후 네티즌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에게 <100분 토론> 뒤 일어난 일과 영화 <디 워>에 대한 원고를 청탁했다. 진 교수는 아래 글이 <100분 토론>과 그 뒤에 일어난 일들, 일부 네티즌이 진 교수 블로그에 몰려가 올려놓은 글들에 대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고 밝혔다. [편집자말]
 진중권씨는 9일 MBC <100분 토론>에서 영화 <디 워>와 <디 워>를 둘러싼 분위기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 MBC

<디 워> 찬성 쪽 패널들이 말을 못했다고 질타를 좀 받는 모양이다. 이건 말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 포지션의 문제다. 어느 누구라도 그 포지션에서는 그 이상 할 수 없다. 나도 그렇게 못할 게다. 심형래 감독의 열광자들은 자기 패널들을 향해 '이렇게 했어야 한다, 저렇게 했어야 한다'고 구구하게 주문을 많이 한다. 하재근씨는 네티즌들이 애써 마련해 준 '총탄'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사과까지 한다. 하씨는 나와 달라서 전쟁터에 나오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사실 하씨와 나는 견해가 많이 다르지 않다. 나는 다수가 조성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발언의 자유를 빼앗긴 소수를 옹호하려 했고, 하씨는 <디 워>를 비판하는 소수를 존중하고 <디 워>를 보고 감동하는 다수를 이해하면서 두 그룹이 화해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화해의 전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는 것. 사과 없는 '화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나는 토론을 어정쩡한 타협에서 끝내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끝장을 보는 쪽을 택해야 했다.

인터넷에서 집단의 품에 묻혀서 까부는 네티즌들은 야무지게도 하씨 말고 자기들이 나왔으면 상황이 달랐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 허접스러운 논리를 들고 용감하게 방송에 나왔다면, 그날 <100분 토론> 시청률이 거의 '무릎 팍 도사'에 육박했을 게다. 제일 까부는 친구를 대표로 뽑아 한번 내보내보라. 집단 속에선 그렇게 사납던 아이들도 정작 개인으로 만나보면, 그렇게 착할 수가 없다. 우기지도 않고, 싹싹하게 사과도 잘 하고.

애초에 <디 워> 열풍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에서 비롯된 것. 논리와 정서는 원래 만날 필요가 없었다. 내 돈 내고 내가 영화 보고, 내가 좋다는 데 뭐가 문제인가? 그럼. 그렇다면 내 돈 내고 내가 영화 보고, 후지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말아야지.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이 논쟁은 '논리로는' 애초에 '심빠'들이 이길 수 없는 구조. 틀린 논리는 아무리 많은 수의 머릿속에 담겨 와도 한 큐. 큐질을 머릿수만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작품 자체로

방송을 위해 받아본 큐시트에는 정작 작품 자체에 관한 얘기는 별로 없었다. 이래서는 논의가 겉돌 수밖에 없다. 헝클어진 실타래가 있으면, 실마리를 잡아내야 한다. 실 끝을 잘못 선택하면 실타래는 겉잡을 수 없이 엉켜버린다. 반면 제대로 실마리를 잡으면 실타래는 술술 풀린다. 이 논쟁에서 실마리는 바로 작품 자체. 모든 논의가 작품의 질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급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대중이 평론가들의 혹평에 분노하는 것은, 작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 그저 막연히 '작품이 좀 허술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감독의 노력, 컴퓨터그래픽(CG)의 성과, 미국에서 거둘 성공에 비하면 그 정도 결함은 눈감아줘야 한다'는 게 대중의 정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의 승패는 작품의 구조적 결함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에 달려 있다.

토론이 시작되자 곧바로 작품 자체로 덤벼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매듭만 풀면 나머지 논점은 저절로 다 풀리게 되어 있다. 상대편에서는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예상을 했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작품 자체에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격하는 쪽은 마침 전공이 미학이라 애초에 무장의 수준이 다르다. 거기에 성깔도 그다지 온순한 편이 못 된다.

 9일 <디 워>를 주제로 열린 MBC <100분 토론>.
ⓒ MBC

'싸가지'에 관하여

"논리는 옳다, 그런데 '싸가지'가 없다." 반응은 대충 이렇게 요약된다. 내가 인간성마저 좋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태도까지 점잖았다면, 그나마 끓어오르는 분노를 배출할 통로마저 막혀 임상의학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사태가 벌어졌을 게다. 이는 재정 악화를 낳고, 다시 의료보험 개혁 요구로 이어질 것이며, 그럼 유시민씨가 부랴부랴 보건복지부로 복귀하여 2007년 대선 구도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게다(애국 두뇌에게는 이게 농담이라는 것까지 일일이 다 말해줘야 한다).

'꼭지가 돌았다'는 말을 트집 잡는 모양이다. 나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감독에 대한 네티즌들의 사이버 폭력에 꼭지가 돌아야 한다고 믿는다. 왜? 언젠가 대중의 폭력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 <100분 토론>에 나간 것도 <디 워>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행패 부리는 짓 좀 그만 하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EBS 개고기 토론과 MBC <디 워> 토론을 비교해 보면, 내 태도가 다름을 알 수 있을 게다. 개고기 토론에서 상대는 사회적으로 소수다. 극우파가 아닌 한, 소수자는 함부로 몰아치면 안 된다. 반면 <디 워> 토론의 상대는 사회적으로 다수이고, 상당수는 수적인 우세로 소수의 입을 가로막고 있다. 당연히 태도가 다를 수밖에. 나는 이런 게 민주시민의 진정한 '싸가지'라 믿는다.

평론가의 임무

 <디 워> 포스터.
ⓒ 쇼박스
대중의 환호를 등에 업고 설치는 것은 검객이 아니라 양아치나 할 짓이다. 물론 이럴 때 슬쩍 대중의 감정에 편승하면 여러 모로 얻는 게 많다는 것을 내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먹물 노릇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얘기를 하는 것. 그게 먹물의 임무이고, 먹물의 윤리다. 평론가라는 이름의 먹물도 마찬가지다. 평론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축복만 하는 예식장의 주례가 아니다.

평론은 예술적 소통에서 피드백 시스템에 해당한다. 하다못해 신발을 하나 만들어도 출시 전에 철저하게 검사한다. 그래야 시장에 나가 흠을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화의 본고장인 할리우드에, 심지어 그것도 블록버스터로 승부를 걸겠다는 영화가 검사조차 안 받겠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제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검사 결과를 없앤다고 제품의 질이 좋아지는가?

우리 사회의 평론에 대한 관념을 보자. '비평=비판=비난=비방=흥행 망치기', 그리하여 급기야는 '매국행위.' 더 가관은 트집을 잡기 위해 늘어놓는 궤변이다. 그 논리를 들어보면,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수준으로 퇴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 나는 <디 워>를 감동적으로 보았다.
2. 근데 너는 왜 작품이 후지다고 하냐?
3. 그것은 나를 우습게 보는 거다.
4. 500만 관객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5. 그러므로 모 감독은 사과하라.
6. 여러분, 대국민 사과 요구 서명합시다.
7. 이것은 전쟁이다. 충무로를 타격하라, 평론가를 타도하라.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정신병동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의 혁명?

일부 언론에서는 '대중지성' 운운하며 상황을 '대중 대 평론가'의 싸움으로 몰고 갔다. '대중지성'이 뭔지나 알고 떠드는 걸까? 평론가 중 그 누구도 자기가 권하는 영화가 언제나 대중의 사랑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매트릭스 I>처럼 대중성과 작품성이 일치하는 영화도 있고, <디 워>처럼 작품성은 없는데 대중성만 있는 영화도 있고, <블레이드 러너>처럼 작품성은 있는데 대중성이 없는 영화가 있는 거다.

이번 사태가 평론가에 대한 대중의 반란, 디지털 민주주의 혁명이란다. 영구가 한 말이 아니다. 언론에서 떠드는 말이다. 작품성이 뛰어나면 대개 대중성은 떨어진다. 가령 백남준 비디오 아트 전시장은 텅텅 비어도, 동네 앞 비디오 가게는 늘 북적인다. 나 역시 가끔 후진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만, 그렇다고 그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평론가들을 향해 이 대중적 취향을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민주주의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도 한다. 누가 가르치려 들었다는 걸까? 그렇게 말하는 바보에게는 이렇게 대꾸하겠다. '평론가가 할 일 없냐. 너 같은 분을 수업료도 안 받고 가르치려 들게. 아니, 아무리 수업료를 많이 내도, 배움에 대한 욕구도 없고, 이해할 머리도 없어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 돌 머리는 애초에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니, 그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요.'

평론의 역할

무식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평론은 크게 (1) 영화 구조에 대한 분석, (2) 그 영화의 영화사적 의미, (3) 종합적 평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앞의 둘이 기술적(descriptive) 부분이라면, 세 번째는 평가적(evaluative) 측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토론에서 내가 제시했던 <디 워>의 허술한 서사구조에 대한 지적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디 워>의 CG 이미저리에 대한 분석은 시간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할 수가 없었다.

둘째는 가령 이런 거다. <라쇼몽>은 사건을 보는 여러 관점을 병행 진행하는 비선형적 서사, <메멘토>는 시간을 되돌리는 역행카논의 서사를 보여준다. <스타워즈>는 최초로 영화에 CG를 도입했고, <쥬라기 공원>은 최초로 실사와 CG의 구별을 없앴으며, <아이스 에이지>는 최초로 털 달린 포유동물을 시뮬레이션 해냈다. 이는 전에 없던 시도다. 그럼 <디 워>는? 'CG를 한국 기술로 최초로 해냈다.' 한국에서는 통하겠지만, 할리우드와 경쟁하겠다는 영화의 성과로 꼽기는 좀 뭐하지 않은가?

대중을 분개시킨 평론가들의 언급은 (3)에 속한다. 뭔가 찾아봤더니 대부분 짤막한 열자 평이다. 글자 열 개로 (1)과 (2)를 다 담을 수는 없고, 그것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3)뿐이다. 그러자 왜 성의 있게 비평을 안 하느냐고 따진다. 시장에 나오는 모든 영화를 어떻게 다 자세히 평한단 말인가? 평론가에게 성의 있는 비평을 받아내려면, 일단 영화에 말할 건더기가 있어야 한다. <디 워>에 어디 그런 게 있던가?

게다가 자세히 비평하면 뭐하는가? <100분 토론>에서 이미 서사 구조의 결함, 그것과 미숙한 연기의 관계, 플롯과 CG의 어색한 결합 등 일일이 다 지적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어디 소용이 있던가? 다음날 신문에는 어차피 이런 기사만 실릴 텐데.

"<디 워>는 비평할 가치조차 없다”, 진중권 막말, 일파만파
진중권, <디 워> 보고 "꼭지가 돌았다"

이 글의 내용도 이렇게 요약하지 않을까?

"<디 워> 관객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진중권 폭언, 일파만파
"<디 워> 보면 바보, 돌 머리", 진중권 막말, 언제까지 계속되나

재미있다. 대한민국에 살아서 좋은 거 한 가지. 도대체 심심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디 워>를 주제로 토론한 MBC <100분 토론>.
ⓒ MBC

CG의 진전, 영화의 후퇴

어떤 평론가가 <디 워>의 서사구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했을 뿐이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목걸이 한 방에 부라퀴 군단이 다 날아가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선한 이무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FBI 요원이 약 먹고 동료에게 총을 쐈다는 얘기다. 대중의 분위기가 평론의 수준까지 떨어뜨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영화가 혼자 발달하는 게 아니다. 영화가 발달한 나라는 평론도 고도로 발달해 있고, 평론의 토대가 되는 인문학적 담론도 풍성하고, 괜찮은 영화를 보아내는 감식안을 갖춘 일반 관객의 층도 두껍다. 이게 바로 좋은 영화가 나오는 인프라다. 전문적 평론가의 높은 식견과 수준 있는 관객의 높은 기대라는 검증을 통과한 영화라면,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우리의 영화 인프라의 꼴을 보라.

사실 충무로의 영화언어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엄청나게 발달했다.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상을 타는 것을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 전도연을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수상으로 한국 영화의 연기능력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디 워>에 그동안 한국 영화가 이룬 성취가 조금이라도 반영되어 있던가? 충무로 탓하는 것과 별도로 그 성취를 조금이라도 따라가려 했다면, 영화가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게다.

서사에 관하여

'디빠'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느 시민논객이 내 꼭지를 돌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꼭지가 돈 기억이 안 난다(방송이 끝난 후 그녀는 내가 쓴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받아갔다). 내 꼭지를 돌린 것은, 영화에 대해 평도 못하게 하는 분위기, 소수에게 사이버 폭력을 가하는 집단의 행태였다. '꼭지가 돌아 <디 워>에 대한 평을 썼다'는 게 평론은 냉정해야 한다는 말과 모순된다는 얘기도 있다. 꼭지가 돌았기에 <디 워>에 대해서는 더욱 더 냉정하게 글을 썼다.

<300>에서 나는 "서사보다는 CG가 더 중요한 영화"라고 말했다. <300>의 CG는 마약과 비슷한 환각성이 있다. 그녀의 지적은 '그런데 왜 <디 워>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한 답은 이미 내가 1주일 전에 써서 <씨네21>에 보낸 글 속에 들어 있다. "장르 영화는 웬만하면 근사한 CG만 갖고도 서사의 빈곤을 가릴 수 있다. 사실 <트랜스포머>의 경우에도 서사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그것도 서사가 웬만할 때의 일. <디 워>의 서사는 CG의 화려함으로 수습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

<300>에는 서사가 있다. 왜?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건이며, 플루타르크가 기록한 텍스트가 있으며, 그 드라마틱한 측면 때문에 서양예술에서 여러 번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항복 권유-레오니다스의 거절-전쟁을 금하는 신탁-호위병 300명만 데리고 출병-에피알테스의 간청-레오니다스의 거절-에피알테스의 배반-300용사의 전멸-그리스 연합군의 결성.' 발단부터 결말까지 철저히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디 워>는 할리우드 괴수 영화와 비교해야 한단다. 괴수 영화에서는 괴물이 주인공이란다. 그럼 <킹콩>을 예로 들어 보자. 이 거대한 괴수에게는 감성이 있다. 그래서 관객은 그의 최후를 안타까워하게 된다. 부라퀴는 어떤가? 그에게서 감성이 느껴지던가? 또 <킹콩>에서는 인간과 괴수가 애정에 가까운 감정의 교류를 보여준다. 반면 <디 워>에서는 둘 다 사람이면서 90분 내내 사랑조차 제대로 못 한다. 이런, 얘기, 더 해야 하는가?

<트랜스포머>에 대해서는 "서사가 미흡하지만 CG가 훌륭하다"고 하면서 <디 워>에 대해서는 "CG는 훌륭한데 서사가 미흡하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이중 잣대(?)를 지적하는 논리도 있다. 아둔한 머리에는 이 두 문장이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논리적으로 두 문장은 모순이 아니다. 왜? <트랜스포머>는 CG나 플롯 모두 <디 워>보다 낫기 때문이다. 정 못 믿겠으면, 나중에 '디빠'들의 유일한 기준인 그 잘난 흥행성적으로 직접 확인해 보라.

ⓒ MBC 화면 갈무리

"하면 된다"?

토론 마지막에 내가 했던 말은 "<디 워>, 한국 영화의 희망인가?"라는 토론 제목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을 '대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 말을 "독일, 프랑스도 못하니 한국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진중권 부라퀴는 '사대주의' 부라퀴라고 떠들고 다닌다. 이 규모에 대한 동경. 거대함에 대한 열망. 그들이야말로 영화에서 오로지 커다란 덩치만을 사모하는, 글자 그대로의 사대(大)주의자가 아닐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영화 한 편에 2000억원 이상을 쓰기도 한다. <디 워>와 비교가 안 된다. 충무로에서 무리 없이 동원하는 자본의 규모는 편당 100억원 정도. 편당 300억원씩 들여 영화를 만들어 수출하다가는 자칫 충무로 바닥 전체가 파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 워>의 전략은 한국 영화의 일반적 모델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면 된다"는 전두환 철학으로 <디 워>의 깃발 아래 충무로 타도에 나설 일이 아니다.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 할리우드 영화도 자국 시장만으로는 제작비 뽑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해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미국 영화가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는 것은, 영어가 사실상 세계 공용어이고 미국 문화가 이미 전 세계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디 워>에서 배우의 대사가 어색한 것은 한국어 대본을 영어로 직역했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을 점령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미국과 한국의 감성의 간극을 거기서 볼 수 있다.

CG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에는 그밖에도 최고의 영화미학, 고도의 평론수준, 발달한 관객문화가 있다. 한국 영화에는 그런 인프라도 아직 부족하다. 심 감독에게 "겸손하라"고 말한 어느 감독의 말에 대중은 "주제 파악하라"고 대꾸한다. 그 말은 심형래의 인격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조지 루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를 따라잡겠다'며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남발하지 말라는 얘기다. 약속은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는 법이니까.

비평과 흥행의 관계

평론가가 '좋은 작품이다', 혹은 '나쁜 작품이다'라고 말할 때, 반드시 그 영화를 봐야 하거나 혹은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영화를 볼 때 참고하라는 것이다. 내 경우에도 그냥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에는 웬만하면 영화 평론가들이 권하는 영화는 안 본다. 반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특정한 사람과 같이 영화를 볼 때는 평론가들이 권하는 작품 중에서 골라서 본다.

대중은 충무로의 사주를 받은 평론가들이 <디 워>의 흥행을 막기 위해 악평을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들도 이런 어리석음에 기꺼이 동참한다. "<디 워> 500만 돌파, 관객 입심이 평론가들보다 세다." 평론이 어디 대중과 전문가 사이에 관객 수로 승부를 내는 입심 전쟁인가? 평론이 관객 수의 함수를 구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까? "평가는 우리가 한다." 누가 하지 말하고 했나? 당신들도 하는 평가, 평론가들도 하게 좀 내버려두라는 얘기다.

대단히 허탈하겠지만 평론가들은 영화의 흥행에 전혀 이해가 걸려있지 않다. <디 워>를 비판하러 나가던 그날도 나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꼭 보라"고 권했다. 영화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너무나 허술해서 영화에서 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좋은 기회라고 믿어서다. 정말 대형 스크린 위에서 이렇게 서사가 허술한 영화를 다시 보기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살아서 핼리혜성 볼 기회만큼이나 희귀하다. 이런 귀한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단 말인가?

비평과 흥행 사이에는 별 인과관계도 없다. 기사를 보니, 여름방학용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59%)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 <씨네21>에 보낸 내 글이 생각난다. "<디 워>의 스토리를 의문 없이 따라가려면, 마음의 연령이 네버랜드 주민의 평균을 넘어서는 안 된다. <디 워>의 연출력은 아직도 방학특선 어린이 영화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못했다." 근데 이게 외려 흥행에 도움을 준 모양이다. 세상의 이치는 이렇게 오묘하다.

거기서 나는 또 "이 글을 읽고 받은 열에너지를 <디 워>의 반복관람으로 승화시키는 거룩한 이도 더러 있을 터, 이 기여로써 <디 워>의 관람에 의무로 따르는 내 몫의 애국질을 대신"한다고 썼다. 실제로 기사를 보니, <디 워>를 보는 또 다른 이유가 <100분 토론>으로 생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써 남을 못살게 구는 데 사용됐던, '비평이 흥행을 떨어뜨린다'는 열광자들의 믿음은 아무 근거도 없는 기우로 드러났다.

 진중권 교수 블로그. <100분 토론> 후 이곳엔 진 교수를 비난하는 댓글이 빗발쳤다.

내기 걸기?

어차피 <디 워>는 미국을 겨냥해 만들어진 영화. 그쪽에서는 어떨까? 이른바 '빠'와 '까' 사이에 내기가 벌어진 모양이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정답. '예언 같은 것은 되도록 안 하는 게 좋다.' <디 워>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굳이 예언을 안 해도 유지된다. 그런데 뭐 하러 쓸 데 없이 예언에 따르는 증명의 의무를 스스로 지는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디 워>는 미국 평단에서도 좋은 평을 듣기를 기대하지는 말라는 것.

'흥행성=작품성'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들은 흥행의 성공으로 작품성을 증명하려 했고, 또 이제 증명해야 한다. 이래서 제 주장을 예언에 묶어두는 것은 별로 현명한 수가 못 되는 거다. 어차피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성공하여 달러를 벌어다 주겠다고 약속한 영화. 거기서 실패하면, 그들의 마지막 논리마저 파산하게 된다. 물론 나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거국적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500개의 개봉관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터. CG에 볼만한 부분이 있고, 용과 이무기라는 새로운 괴수의 이미지도 있고, 미국에는 괴수 영화 마니아들이 꽤 많을 테니, 부디 미국의 관객들이 <디 워>에서 뭔가 서사의 가공할 허접스러움마저 용서하게 해주는 또 다른 측면을 찾아내기를 바랄 뿐이다.

토론 이후

당연히 블로그에 난리가 났다. 실명 올린 지인의 글은 행여 피해가 갈까 다 지워놓았지만, 학교 홈피 다운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다. 한편 걱정과 격려의 문자와 메일도 날아온다. 어떤 이는 네이버 검색 1위 캡처 화면을 "기념으로" 보낸다며,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축하해요." 허걱. 황우석 때문에 감금됐을 때 '허걱'했던 일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감금에서 풀려놨다고 전화했더니, "야, 벌써 풀려나면 어떻게 하냐? 재미없게…."

황우석 때에 비하면 포스는 10분의 1 수준에, 욕설도 그때 들었던 것의 재탕이라 스릴도, 재미도 없다. 욕을 하더라도 좀 창의적으로 하면 안 되나? 대부분 진부해서 하품이 난다. 성의를 봐서라도 다 읽어주고 싶은데, 너무 지루해서 읽을 수가 없다. 욕을 하더라도 욕먹는 사람 생각 좀 해줬으면 한다. 욕설도 예술적으로 승화해서 하면 어디가 덧나나? 가령 두 손에 딸기를 들고 있는 '꼭지 중권' 패러디 사진. 그건 맘에 들어 따로 컴퓨터에 저장해 놨다.

인터넷 바닥에서 그나마 DC의 '디 워갤' 애들 글은 읽는 재미가 좀 있다. 그 지루함 속에서 한 가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게 있긴 있었다. '디빠'들이 들고 나온 진중권의 학력 위조 의혹. 세상에, 그건 내가 아니라 외려 그 분을 괴롭혔던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논리에 전혀 구속되지 않는 이 두뇌의 무한한 자유로움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어떤 종교적 숭고함이 있다. 자폭 테러리스트를 보며 느끼는 외경심이랄까? 하긴, 영화 한 편 보고 후지다고 말하는 졸지에 사회적 사건이 되는 그런 나라에 사는 국민들이 아닌가.

후기

<디 워> 팬 카페에서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디 워> 팬들이 황우석 지지자들처럼 맹목적인 부류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사실 모든 <디 워> 팬이 광적인 것은 아니다. 실은 인터넷의 다른 곳과 달리 <디 워> 팬 카페에는 비교적 합리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디 워> 팬 카페가 부디 건전한 지지와 합리적 비평의 온상이 되기 바란다.

'애국' 내걸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소수에게 폭력을 가하는 문화. 개인적으로 질색이다. "네티즌의 저력을 보여줍시다." 그들은 아마 그런 짓을 하면서, 모종의 권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현실에서는 고독한 개인으로 권력에 눌려 살던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소수의 약자를 향해 권력을 휘두르며 비로소 느끼는 쾌감이랄까? 안쓰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워낙 하는 짓의 죄질이 고약해서 그런지 동정할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다.

내 "꼭지"를 돌린 것은 실은 <디 워> 자체가 아니라, 그 영화를 지지하는 광적인 방식이었다. 도대체 왜 '영웅' 없이 혼자서는 못 살아가는 걸까? 하도 요란하게 광고하던 영화라 기대하고 봤다가 큰 실망을 했지만, 솔직히 나도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영화가 미국에서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흥행에서라도 웬만큼 성과를 내는 것을 보고 싶다.

디 워 심형래 MBC 100분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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