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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아이가 책읽는 모습은, 곤히 잠들었을 때 만큼이나 예쁩니다. 아이가 '큭큭' 대며 읽는 책 내용이 궁금한 마음에 한두 권 따라 읽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얼굴 빨개지는 책부터 독특한 그림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책까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이들 책을 기웃거리며 울고 웃은 내용을 담아봅니다. -기자말

가정환경 조사가 있던 어린 시절, 나는 그 수많은 빈칸 가운데 아버지의 직업을 쓰는 게 제일 어려웠다. 회사원, 공무원, 은행원, 자영업…, 많고 많은 직업 가운데 아버지가 하는 일과 딱 맞는 걸 고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늘 새벽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셨고, 벗어놓은 옷에서는 모래나 시멘트 가루 같은 것들이 날렸다. 또 가방에는 어디에 쓰는지 모를 연장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여름에는 비오는 날만 빼고 거의 일을 하셨고, 겨울에는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다.

'이런 직업이 뭐람?' 고민하고 있을 무렵, 두 살 많은 오빠가 말했다. "아버지는 집 짓는 일을 하시니까 그냥 건축가라고 써." 그 후 아버지의 직업은 '대외적'으로 건축가였다. 머리가 제법 굵어진 나중에야 공사장 인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렇더라도 아버지 직업이 '건축가'인 건 변하지 않았다. 뭐든 폼나 보이는 게 좋은 때였으니까. 

집 짓는 일을 하는 직업, 건축가만 있는 건 아니죠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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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옛날 기억을 들추는 건, 고 구본준 기자가 지은 <누가 집을 지을까?>(창비가 내는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림책)를 읽어서다.

주인공 재모네 집이 완성되기까지 실제 집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지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필요한지 소개하는 이 책에는 아버지의 실제 직업과 가까운 공사장 인부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대화 한 토막을 옮겨본다.

"아저씨, 그 타일은 왜 붙이는 거예요?"
"화장실은 물을 많이 쓰는 곳이잖니? 타일을 제대로 붙이지 않으면 물이 스며들어서 집이 썩을 수 있거든."

"타일이 정말 반듯반듯하게 붙어있네요. 아저씨는 달인 같아요."
"달인이 한 수 가르쳐줄까? 이 파이프가 뭔지 아니? 요건 네가 세수할 물이 나오는 파이프, 저건 네가 눈 똥을 내려보내는 물이 나오는 파이프지."

"집안에 이렇게 파이프가 많아요? 우리 집엔 하나도 없는데?"
"다 벽 속에 감춰놔서 그렇지, 파이프가 없는 집은 없단다. 파이프를 설치하고 타일을 붙여야 욕실이 완성되지. 내 덕분에 네가 깨끗이 씻을 수 있는 거야."

아저씨들은 다들 자기 덕분에 집이 완성된다고 자랑해요. 재모는 웃음이 나왔어요.

벽돌을 쌓아 올려 집의 뼈대를 만드는 일을 했던 아버지도 이랬을까. 다 지어진 집을 보고 '내 덕분에' 이렇게 멋진 집이 완성됐구나, 생각했을까. 아버지 '덕분에' 완성된 집은 어디에 몇 채나 될까? 그 집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아버지 생전에 단 한 번도 궁금해 본 적 없는 질문들이 재모와 아저씨의 대화를 읽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좀 더 일찍 관심을 갖고 물어보지 못한 게 살짝 후회가 될 만큼.

하나의 집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공정이 필요하다. 이 말은 곧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다는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해도 건축가, 현장소장, 공사장 인부(콘크리트 기술자, 목재 기술자 등 여러 기술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경사 등 다수다. 저자는 '건축가'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을 든든히 받쳐주며 '내 덕분에' 집이 완성된다고 자부하는 공사장 인부들의 일까지 하나의 직업으로 소개하고 있다.

"엄마는 이 책이 그렇게 재밌어?"라는 소리를 아이에게 들을 만큼 이 책을 자꾸 펼친 건 저자의 이런 따뜻한 시선이 좋아서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땀 흘리며 묵묵히 일하는 공사장 인부들을 가리키며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싶어서다.

덧글. 고 구본준 기자?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 있겠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기자 맞다. 건축가와 함께 직접 단독주택을 지어 '땅콩집' 열풍을 불러일으킨, <한겨레> 신문에서 대중문화팀장, 책지성팀장, 기획취재팀장을 지낸 그리고 지난 2014년 11월 12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고 구본준 기자. 그의 짧은 삶이 아쉬워서인지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추리동화 짓기, 골목길에 어린이도서관 만들기, 건축 만화 스토리 쓰기가 꿈이었다'는 작가의 프로필에 내 시선이 오래 머물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베이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누가 집을 지을까?

구본준 글, 김이조 그림, 창비(2014)


태그:#누가 집을 지을까?, #구본준, #직업,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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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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