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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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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는 한동안 회장이 공석인 채로 활동하다가 1983년 3월 28일 제1차 정기총회를 열어 문익환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공덕귀 여사가, 남편인 윤보선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자, 회장직을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물러났다.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은 신군부 정권에 우호적인 발언을 했었다.

새 회장을 맞이한 기념관건립위원회는 문익환 회장이 중심이 되어 의욕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그중에서도 1982년 말경부터 추진해온 <전태일 평전> 출판 사업은 괄목할 만한 사업이었다.

<전태일 평전>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었을 당시, 조영래가 약 3년간에 거쳐 집필한 것으로 원제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다.

이소선은 아들 태일이가 남겨놓은 일기장을 비롯해 평화시장에서 활동했던 기록물들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간직했다. 비록 무허가 판잣집이지만 그것들을 창고 하나에 깊숙이 넣어두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남몰래 꺼내며 대화를 나누고는 했었다.

경찰 몰래 조영래 찾아가는 길, 버스와 택시의 반복

이소선은 아들이 남겨놓은 다섯 권의 일기장과 한 묶음의 설문지 등, 전태일이 생전에 활동했던 기록물들을 꺼내놓고 이리저리 궁리를 하면서 담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내일 저것들을 어떻게 가지고 가야 안전하게 가지고 갈 수가 있을까?'

이소선은 쌍문동 자신의 집에서 조영래가 숨어 사는 집 홍제동까지 전태일의 일기를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인 조영래는 지인의 도움으로 홍제동의 한 단독주택 옥탑 방에서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이소선은 비밀리에 만나왔다.

조영래는 전태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사상과 감정 등을 복원하고, 그 역사적 진실과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전태일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첫 번째로, 전태일이 남긴 기록물들을 읽으며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수배 중이어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조영래를 위해, 이소선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태일의 일기를 가져가야 했다.

궁리 끝에 이소선은 내일 아침 일찍 늘 따라다니는 담당형사가 오기 전에 집에서 나오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또 탄 버스에서 내려 다시 다른 버스를 갈아타고 홍제동까지 가기로 했다. 일기장은 그럴듯한 선물처럼 보이게 예쁜 보자기에 쌌다.

다음날 아침 이소선은 계획대로 차질 없이 실행했다. 조영래는 이 자료들을 꼼꼼히 읽고, 분석하고, 종합하며 전태일의 삶을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조영래는 이옥경과 비밀리에 결혼을 해서 갓난 아들까지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만난 인연도 전태일에 의해서였다. 1970년 전태일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조영래 부인 이옥경은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중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무관심한 사회를 비난하는 글을 한 신문에 실었고, 당시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조영래는 '이 훌륭한 여성이 누구인가' 찾아 나섰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연애를 하고 결혼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소선이 조영래를 집중적으로 만나서 구술한 시기는 1975년 여름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소선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쌍문동에서 홍제동에 도착했다.

이들은 여름이라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만났다. 이소선은 전태일이 살아온 얘기를 하고 조영래는 받아 적고 질문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다 보면 해는 점점 높아지고 더위도 맹렬해진다. 더워지면 걸쳤던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두 사람은 작업에 몰두한다.

더위에 지친 이들을 위해 옆에서 지켜보던 이옥경은 냉수나 주스를 갖다 주지만 마실 때뿐이었다. 그러다 한낮이 되면 옥상의 복사열까지 밀려와 이젠 더 이상 옷을 벗을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을 정도가 된다.

"어머니, 안되겠습니다. 여기서는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 저 밑에 다방에 가서 합시다."
"그래, 담배 한 대 피고 해요."

이들은 근처 유진상가 지하에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고 이제 살 것 같네 담배도 맘대로 피울 수 있고…."

이소선과 조영래는 담배를 매우 즐겼다. 특히 조영래는 전태일 작업을 할 때 더 많은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이소선과 조영래는 다방 구석 쪽에 앉아서 묻고 답하는 구술 작업을 계속하고, 이옥경은 다방 입구에 앉아서 혹시나 이상한 사람들이 덮치지나 않을까 망을 봤다.

이런 작업을 그해 여름 내내 했다. 조영래는 이소선 뿐만 아니라 전태일의 친구 김영문 등 평화시장 노동자들도 이소선의 주선으로 만나 취재를 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이라는 제목을 붙인 <전태일 평전>은 1976년에 탈고됐다. 

간신히 탈고했지만... 일본에서 먼저 빛을 본 <전태일 평전>

조영래는 완성한 전태일 평전 원고를 가지고 이소선을 만났다. 그 자리에 민종덕도 함께 했다. 이들이 만난 곳은 서울 변두리 개포동의 어느 배 밭이었다. 당시만 해도 개포동은 개발되지 않은 변두리였다.

"이것은 태일이가 어머니한테 남긴 유산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또 다른 아들 전태일을 낳은 것 입니다."

이소선은 의롭고 가슴 따뜻한 지식인이 되살려낸 아들의 부활을 어루만지며 "애썼다, 고맙다"는 말로 답했다.

조영래는 민종덕한테 말했다.

"자네가 이것을 복사 좀 해 보겠나? 다섯 부만 복사하게. 그 이상 복사하면 절대 안 되네."

민종덕은 조영래로부터 파란 표지의 두꺼운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쓴 원고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복사기가 흔치 않아서 쉽게 복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배 당한 사람이 쓴 전태일에 관한 글을 아무데서나 복사할 수가 없었다.

복사기로 영업을 하는 곳에서 돈을 주고 복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글을 영업집에서 복사하다가 만약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나 정보부에 적발이라도 된다면 저자가 수배중인 조영래라는 것이 밝혀지고, 따라서 여러 사람이 잡혀 들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 끝에 당시 경동교회 야학교사인 박문수한테 부탁을 했다. 박문수는 삼도물산 사무직이기 때문에 사무실에 복사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문수는 회사 직원들이 다 퇴근한 뒤 밤중에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 기계로 원고의 청사진을 떴다.

그렇게 복사한 <전태일 평전> 한 권을 민종덕이 소장하게 됐다.

<전태일 평전> 초판 표지
 <전태일 평전> 초판 표지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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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을 읽은 민종덕은 전태일의 생애를 거의 완벽하게 복원해낸 데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전태일 일기만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그는 그 감동을 남몰래 자기 혼자만 느끼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자신이 그 책을 읽고 받은 감동, 체계적으로 정리된 전태일 사상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로써 간접적으로 전해보려고 했으나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글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이 하루라도 빨리 출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조영래가 혼신의 노력으로 완성한 전태일 평전을 엄혹한 유신독재 체제인 국내에서 출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원고는 손학규·김정남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1978년 11월에 일본어로 먼저 출판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판 저자는 김영기(金英琪)였다. 그 이유는 영(英)은 조영래를 의미하는 것이고, 기(琪)는 장기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평전을 기획한 것은 장기표였는데, 장기표는 바쁘기도 하고, 아무래도 글을 쓰는 것은 조영래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조영래가 쓴 것이다. 조영래로서는 전태일 평전은 자신과 장기표의 공동저작이라고 생각해서, 김영기라는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82년 수배 중이었던 민종덕이, 다른 수배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인천 구월동 주공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 박승옥을 만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전태일 평전>을 출판할 의향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돌베개' 출판사의 임승남 사장, 편집장인 박승옥을 비롯해 출판사 모든 직원이 당국으로부터 가해질 어떠한 탄압도 감수할 결연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자신이 원고 복사본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출판사 측의 결연한 의지가 있다는 것은 확인이 되었지만, 저자를 밝힐 수는 없는 상황에서 누구를 저자라고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다.

이소선은 조영래가 쓴 이 전태일 평전의 존재에 대해 어느 누구한테라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유신독재가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지명수배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책을 지금 국내에서 출판을 하겠다고 하니 이소선으로서는 이에 대해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고민 끝에 묘수를 찾아냈다. <전태일 평전>이 이미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출판되었다. 그것을 1980년 11월 전태일 추도식 때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 서남동 목사다. 그러니 서남동 목사를 찾아가서 서남동 목사님이 번역한 것으로 해서 출판을 한다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이 모아졌다. 이런 취지의 제안을 목사한테 하니, 서남동 목사는 흔쾌하게 허락해 출판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결정에 대해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문익환 회장이 다른 의견을 냈다.

"전태일처럼 훌륭한 청년이 우리 민족이라는 데 한없는 자부와 긍지를 갖고 있는데, 그처럼 자랑스러운 <전태일 평전>을 우리나라사람이 쓰지 못하고 일본사람이 쓴 것처럼 한다면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수치이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에서 엮은 것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전태일 평전>이 1983년 6월 출판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에 '전태일 평전'이라는 부제목으로 출판 되었다. 저자는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엮음'이었다.

밝힐 수 없었던 저자의 이름, 그는 결국 그 책을 보지 못했다

부천 성고문사건 피해자 권인숙양과 담당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 부천 성고문사건 부천 성고문사건 피해자 권인숙양과 담당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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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런 일련의 과정을 전해 듣고 지켜보고 있는 이소선은 아무런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다만, 마음속으로 저 사람들이 저러다가 혹시 조영래라는 이름이 밝혀지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에 애가 탔다.

조영래는 1947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수석으로 들어갔다. 대학 재학 중에 같은 법대의 장기표와 함께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하다가 졸업 역시 수석으로 하고 사법시험 준비 중에 전태일 사건을 맞아 전태일 사건을 학생운동을 통해 사회문제화 시키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민청학련사건이 터져서 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수배 중에도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고,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꾸준히 투신해왔다.

이소선이 본 조영래는 언제나 온화한 마음과 말씨로 함께 있는 사람을 더 없이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다. 사물과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하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확실하게 추진하는 사람이다. 많이 배우고, 지식도 많고, 머리도 남달리 똑똑한 사람이지만 그는 언제나 약한 자, 억눌린 자의 편에 서는 그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다.

드디어 1983년 5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 출판되었다.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것이 번듯한 책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도 전태일의 진심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아들 태일이 장례식 때 자신이 아들의 사진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 책 표지에 실린 것을 봤다.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아 온 몸이 쑤시고 아파서 앓아누웠다.

<전태일 평전>은 예상대로 출판되자마자 당국으로부터 즉각 판매금지조치를 당했다. 출판기념회도 원천 봉쇄를 당해 약식으로 했다. 책 판매는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서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 운동 단체, 종교단체, 노조 등에서 조직적으로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평전의 영향은 대단했다. 전국의 각 대학, 노동단체, 농민단체는 물론 지식인, 종교인, 해외에서까지 필독서가 됐다. 그리고 전태일에게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노동자가 되고,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억압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1990년 가을 어느 날, 민종덕은 서소문에 있는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조 변호사님, 이제 <전태일 평전> 저자를 밝힐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민종덕의 이 말에 조영래 변호사는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출판사에 연락하겠습니다."

조영래는 다시 빙그레 웃다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전태일 평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 써졌다고 생각하네. 첫째는 지식인의 관점에서 써진 것이고, 두 번째는 본의 아니게 죽음을 미화한 게 아닌가 생각하네. 그래서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가 다시 썼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하네."

세상 사람들이 평전에 대해 감동하고 찬사를 보낼 때, 정작 저자인 조영래는 남몰래 괴로워했다. 특히 전태일 이후 투쟁 현장에서 죽어간 열사들한테 미안해했다. 그중에서도 박영진 열사를 거론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민종덕은 즉시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출판사에서는 조영래가 <전태일 평전> 저자로 된 개정판의 인쇄를 서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영래는 그 책이 나오기 전인 1990년 12월 12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개정판은 1991년 1월에 나왔다.

너무도 이른 나이(43세)에 조영래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소선은 자신의 몸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몸부림치며 슬퍼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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