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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7일에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를 당했을 때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은 "Je suis Charlie"라는 메시지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지지와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를 표명했다. 이에 반해 <샤를리 에브도>의 증오 표현적 만평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Je ne suis pas Charlie"라는 구호를 내세우기도 했으며, 테러범 손에 죽은 무슬림 경찰 아메드를 기리기 위해 "Je suis Ahmed"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Je suis Charlie"라는 표현이 정당한가를 놓고 논란이 많았지만, 오늘은 이 표현의 번역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는 한국어 보조사 '은/는'과 격조사 '이/가'에 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 전에 2015년 3월 5일 리퍼드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을 살펴보자.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부채춤, 난타 공연, 개고기 선물 등 이채로운 촌극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한국청년회에서 제작한 "내가 리퍼트다 I AM LIPPERT"라는 팻말이었다.

'내가 리퍼트다'와 '나는 리퍼트다'

보수단체 자유한국청년회 회원들이 3월 6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주한 미국대사관 인근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의미로 카네이션을 펼쳐놓고 있다. 이 단체에 따르면 카네이션은 리퍼트 대사의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를 상징하는 꽃이다.
 보수단체 자유한국청년회 회원들이 3월 6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주한 미국대사관 인근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의미로 카네이션을 펼쳐놓고 있다. 이 단체에 따르면 카네이션은 리퍼트 대사의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를 상징하는 꽃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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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퍼트 대사의 한국 사랑에 감사하며 리퍼트 대사의 아픔을 함께한다'라는 의미였다면 '내가 리퍼트다'가 아니라 '나는 리퍼트다'라고 써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라는 표현은 나머지 사람을 배제한다. '네가 아니라 내가 리퍼트다' 또는 '그가 아니라 내가 리퍼트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후자는 '네가 공격한 사람은 리퍼트가 아니다. 내가 진짜 리퍼트다. 너는 나를 공격했어야 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문맥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 "I am a boy"는 "나는 소년이다"라고 번역하지 "내가 소년이다"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그래서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 ‘내가 리퍼트다’에 대한 생각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 노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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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구글에서 위 문구를 입력했더니 '나는 리퍼트다'는 9810건, '내가 리퍼트다'는 2320건이 검색되었다. 따라서 한국어 사용자는 '나는 리퍼트다'를 더 자연스럽게 여긴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내킨 김에 '샤를리'도 검색해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샤를리다'가 1만1700건인 반면에 '내가 샤를리다'는 19,200건이었다. 나의 언어 직관이 틀린 것일까?

"Je suis Charlie"라는 구호를 처음 쓴 사람은 <스타일리스트 매거진>의 미술·음악 담당 기자 조아킴 롱생이다. 그는 <월리를 찾아라> 프랑스어판 <Où est Charlie?>를 아들과 함께 즐겨 읽은 덕에 이 문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고 말했다. 과연, '샤를리는 어디 있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면 '나는 샤를리다'보다는 '내가 샤를리다'가 어울린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프랑스 방송에서 니콜 바샤랑은 "Ce soir, nous sommes tous Américains"라고 말했는데 이 문장은 "오늘 밤, 우리는 모두 미국인입니다"이라고 번역하는 게 자연스럽다.

게다가 <샤를리 에브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구호 "Je ne suis pas Charlie"는 어떤가? 이 문장은 "내가 샤를리가 아니다"라고 번역할 수 없으며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Je suis Charlie"와 "Je ne suis pas Charlie"는 "내가 샤를리다"와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로 짝지어야 할까, "나는 샤를리다"와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로 짝지어야 할까?

<샤를리 에브도>는 2015년 1월 14일 자 표지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Je suis Charlie"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그림을 실었다. 이 그림은 무함마드가 "나는 샤를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연대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테러범을 향해) "내가 샤를리다", 즉 "너희는 나를 위한다며 그들을 공격했지만 사실은 나를 공격한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일 수도 있다. 프랑스의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독일어로 휘갈긴 낙서 "Ich bin Charlie"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

에세이 <바다의 기별>(생각의나무)에서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문학동네) 첫 문장을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할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로 할지 고민했다고 말한다. 주격 조사 '이/가'와 대조의 보조사 '은/는'은 문장의 주어를 표시하면서 사뭇 다른 뉘앙스를 덧붙인다. '이/가'의 경우 "내가 리퍼트다"라는 문장에서처럼 배제의 뉘앙스를 줄 수도 있고 "비가 온다"라는 문장에서처럼 상황을 총체적으로 전달할 수도 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을 첫 번째 의미로 해석하면 '다른 무엇이 아닌 꽃이 피었다'가 된다. "버려진 섬마다 뭐가 피었니?" "꽃이 피었어." 이런 문답 구조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반면에 예의 문장을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하면 '개화'라는 상황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된다. 김훈은 이를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꽃이 피었다"가 아니라 "꽃은 피었다"라고 쓰면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이 문장에서는 '꽃'과 '피다'가 분리된다. 말하자면 저자는 '꽃'이라는 대상이 어떤 상태인지 독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용법을 언어학에서는 '화제'topic라 한다. 화제는 대체로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영어에서는 대체로 문장 맨 앞에 오는 단어, 그러니까 주어가 화제이며 한국어에서는 문장 맨 앞에서 '은/는'에 붙는 단어가 화제다.

이에 반해 독자가 모르는 것―화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을 '초점'focus이라 한다. 영어에서는 대체로 문장 끝에 오는 단어가―주로 목적어나 동사―초점인 반면에 한국어는 이와 더불어 초점을 나타내는 표지가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꽃이 피었다'의 주격 조사 '이/가'다. 이 문장에서는 '(무언가가) 피었다'라는 것이 기지旣知의 정보이고 그 빈자리를 '꽃'으로 메운다.

이제 '나는 샤를리다'와 '내가 샤를리다'를 단순하게 비교해보자.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말함직한 문장은 '나는 샤를리다'일 것이고 '샤를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말함직한 문장은 '내가 샤를리다'일 것이다. 전자의 질문은 '너는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가? 누구와 연대하는가?'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후자의 질문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나설 사람이 있는가?'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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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라고 생각한다. 번역한 책으로는『새의 감각』『숲에서 우주를 보다』『통증연대기』『측정의 역사』『자연 모방』『만물의 공식』『다윈의 잃어버린 세계』『스토리텔링 애니멀』『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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